나는 원래 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한번 재밌게 본 것을 재탕, 삼탕. 사탕, 오탕 하는 편이다.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엔간해서는 처음 보는 것인 양 변함없이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새로운 작품을 시도하는 걸 꺼렸기 때문이다. 익숙한 걸 지겨울 때까지 보는 게 새로운 작품을 탐색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모험을 싫어하고 익숙한 것에 집착하는 내 성격이 이런 부분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드디어, 새로운 작품이 필요한 시기에 다다랐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고, (불편한 마음을 감수하고)다른 드라마를 시도하는 용기를 내보았다. 최근 반 년 동안 새로 시도한 드라마가 (과장을 보태서) 지난 6년 동안 시도한 드라마보다 많을 정도이다.
그중 굉장히 성공적인 작품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탑 오브 더 레이크>. 제인 캠피온 감독의 2013년작인 이 드라마는 호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실종된 임신한 십 대 여자아이를 추적하는 여성 경찰(<매드맨>과 <핸즈메이드테일>의 엘리자베스 모스가 연기했다)을 다루고 있다. 어찌나 매력적이었던지, 시즌 2까지 다 보고 나니까, 갑자기! 여자 형사가 원톱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그런 식으로 찾아본 여자 형사 원톱 드라마 중 재미있었던 다른 작품은 <해피밸리>이다. 사고로 딸을 잃은 여자 경찰의 이야기를 다룬 <해피밸리> 역시 2시즌까지 정주행 한 후, 그다음으로 보게 된 드라마가 바로 <브로드처치>이다.
사실 <브로드처치>는 <탑 오브 더 레이크>나 <해피밸리>처럼 여성 형사가 원톱인 드라마는 아니다. 파트너물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과거와 병을 숨기고 새로 부임한 수사팀 (남자)팀장인 에릭(영드<닥터후>의 닥터역을 맡은 ‘데이비드 테넌트’가 분했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닥터후>를 본 적이 없다)은 괴팍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라고는 없으며 시니컬하기 그지없다. 에릭의 부하이자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인 엘리(<더 페이보릿>과 <더 크라운>의 올리비아 콜맨이 분했다)는 정반대의 캐릭터이다. 사실 엘리는 에릭뿐만 아니라 <탑 오브더 레이크>나 <해피밸리>의 주인공들과는 그 결이 다르다. 엘리는 가슴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퉁명스럽지도 않으며, 고독하거나 우울해서 자기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캐릭터도 아니다. 엘리는 동료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을 정도로 배려심이 넘치고, 다른 사람들의 사연 때문에 눈물을 훔친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남편과 함께 식사를 하며 하루의 힘듦을 털어내고, 아들을 꼭 안아주며 “초콜릿보다 더 사랑한다”라고 말해준다.
어쩌면 이런 엘리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제목인)<브로드처치>라는 마을이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의 작고 아름다운 해안가 마을, 도시 사람들이 휴가를 즐기러 오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고, 거리에서 마주치면 미소를 건네며 안부를 전한다. 함께 모여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한 번도 강력사건이라고는 벌어진 적이 없는 마을.
그러다가 모든 것이 뒤집히는 순간이 온다. 엘리의 절친한 이웃의 아들, 대니가 살인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순식간에 마을은, 아름다운 풍광은, 그전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동안 얼굴을 맞대고 미소를 보내던 사람들은 서로를 전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이 마을의 누군가가 살인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지는 타인의 비밀들이 있다.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던, 혹은 그저 좋아 보이기만 했던 내 이웃들은 이제,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살아온, 낯선 얼굴이 된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죠?”
<브로드처치>의 1시즌을 보고 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바로 이것이리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평범한 대사가 그토록 강렬하게 받아들여지는 건, 이 대사를 둘러싼 맥락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런 질문을 떠올렸다. (드라마의 내용과 상관없이) 우리가 타인의 비밀에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살인자, 협잡꾼, 범죄자일 가능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걸 영원히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절대)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나만 해도 내 옆에서 매일 밤 잠드는 사람에게 말하지 못한, 나만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순간들이 까발려진다면 얼마나 곤혹스럽고 절망스러울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죠?” 이 질문에 나는 이런 대답을 하고 싶은 유혹을 참을 수가 없다. “모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죠.” 때때로는 수면 아래 숨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알지 못하기에 좋은 것들도 있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이건 <브로드처치>와는 상관없는, 심지어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그리고, 당연히 어떤 비밀들은 만천하에 드러나야 한다. 드러나는 게 좋다, 아니, 좋다는 표현은 틀렸다. 드러나는 게 필요하다.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런 게 필요한 순간이 훨씬 더 많다. 그런 식으로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이 세상이 품고 있는 거대한 비밀 하나 - 이 세계의 안쪽은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허물어져 가는 중이라는 사실.
<탑오브더레이크>나 <해피 밸리>가 아니라, <브로드처치>에 대해 쓰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 거의 없는데, <브로드처치>를 보다가 눈물이 터졌기 때문이다. 시즌2에서 죽은 아이인 대니의 가족들은 재판정에서 자신들의 삶이 낱낱이 밝혀지는 수모를 겪으며 살인자를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고군분투중이다. 그 와중에 대니의 친구이자 주인공인 엘리의 아들인 폴은 엘리에게 반항하며 같이 사는 것, 심지어는 말을 거는 것조차 거부한다. 시즌 중반까지 아들 앞에서 눈치만 보고 아무 말도 못 하던 엘리는, 폴이 제멋대로 재판정에서 잘못된 증언을 한 날, 법원 로비에서 폴에게 소리를 지르며 혼내다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난 네 엄마고(…)우리 사이가 망가지게 놔두지 않을 거야!” 이상하게도 이 장면에서 뻘하게 눈물이 터졌다. 돌이켜보면 그건 슬픔이 아니라 안도감에서 비롯된 눈물이었던 것 같다. 세계의 안쪽이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중일지라도, 추악한 비밀, 진실과 대면하느라 너무 많은 상처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그래서 말할 수 없이 지치더라도, 다시 한번 힘을 내려는 용기, 소리를 지르고 분노를 터트리는 한이 있어도 소중한 관계와 삶을 지속해 내려는 의지, 그 작지만 작지 않고 열띤 마음들이 여전히 (어쨌든)이 세상을 굴러가게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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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소설가)
드라마와 빵을 좋아하는 소설가. 『디어 랄프 로렌』,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