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의 창작과 독서] 마구 집어넣다보면 언젠가는 (3)
가끔은 소설 쓰기를 낯선 여행지의 가이드가 되는 일에 비유한다. 나에게는 이 세계를 먼저 탐험하고 이곳이 지닌 매력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글ㆍ사진 김초엽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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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성 속에서 이야기를 발견하기

SF 작가여서 그런지, 요즘의 트렌드가 그런 건지 나는 유독 소재가 먼저 정해진 소설 의뢰를 자주 받는다. 주위 작가들에게 물어보니 예전에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는 말도 있고, 장르 앤솔로지에서는 오래전부터 흔한 일이라는 말도 있어서 아마 둘 다 약간씩 영향이 있나 싶다. 평소에는 생각해본 적 없던 소재에 관해 써볼 기회여서 이런 의뢰를 반긴다. 자유롭게 써달라는 의뢰를 받아도 이번에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써봐야겠다고 얼른 정해둘 때가 많다. 선인장에 관해 써야지, 버섯이 나오는 소설을 써야지 하는 식이다. 어떤 작가들은 인물이나 상황에서 시작한다는데 나는 그보다 소재와 설정, 아이디어에서 주로 시작하는 편이다.

소재가 정해져 있다고 이야기가 바로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엇에 관해 쓰기로 결심하면 그 무엇에 대한 자료를 계속해서 찾아본다. 아무리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도 그것에 대한 책을 열 권 정도 읽으면 그 책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가급적 내가 이전에는 잘 모르던 것들, 낯설고 새로운 개념에 대해 알려주는 책일수록 좋다.

이를테면 작년 여름에는 아르코미술관의 프로젝트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에 전시할 짧은 소설을 의뢰받았는데, 스테이시 엘러이모의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는 전시였다.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연결과 얽힘, 탈인간중심주의 등의 주제를 포괄하는 전시라고 했다. 원래 포스트휴머니즘에 관심이 있고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논픽션 책도 썼지만, 정작 그런 주제로 소설을 써달라고 하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럴 때 답은…… 일단 책을 사는 것이다.

기존에 내가 관심 있던 이론은 좀 더 과학이나 기술 쪽에 가까운 과학기술학(STS) 계열이었다. 한편 스테이시 엘러이모는 비인간 사물과 물질성에 주목하는 신유물론 계열의 이론가인데, 마침 최근 몇 년간 신유물론 분야의 책이 국내에 많이 번역 출간되어 있었다. 『숲은 생각한다』『부분적인 연결들』『생동하는 물질』『존재의 지도』와 같은 책들인데 이번에도 무작정 읽어보려 했지만 학술서에 가까운 데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분야라 독서는 지지부진했다. 그렇지만 계속 읽다보니 어떤 이미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 소년과 늪 사이 상호 침투하는 물질들의 흐름이 그려졌고, 그렇게 서로 침투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장소에서, ‘나’라는 개체적 정체성이 확고한 소년, 그리고 몸의 안과 밖이라는 개념이 없는 다른 생물이 만나는 이야기를 써보려고 했다. 소설가의 좋은 점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책에서조차 약간의 단서는 얻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SF비평도 이 분야의 이론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렵지만 다시 도전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장 한 칸에 모아두었다.



중편소설 『므레모사』는 비극과 재난의 장소로 여행을 떠나는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키워드에서 시작됐다. <다크 투어리스트: 어둠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중에 새벽 시간의 투어 밴에서 시작되는 다크 투어리스트들의 이야기를 써봐야겠다고 메모해두었다. 사실 쓰다보니 결과적으로는 다크 투어리즘보다 다른 쪽에 방점이 찍힌 소설이 되었는데, 어차피 글을 다 쓰기 전에는 소설이 어떤 메시지를 담게 될지 쓰는 사람도 잘 모른다. 시작할 때는 일단 마구 읽어서 이야기를 구체화하는 수밖에.

살면서 다크 투어라고는 감옥 관광만 해본 나에게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가 투어의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1부는 취재진이 직접 투어를 다녀와 쓴 가이드로 구성되어 있고 사진도 많아서 마치 현장에 가본 듯한 기분이었다. 다크 투어리즘의 여러 측면을 다룬 인터뷰와 기고문도 실려 있어 유용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된 ‘므레모사’라는 지역은 예전에 읽었던 『아토믹 걸스』를 재독하며 구체화했는데, 이 책은 맨해튼계획을 수행했던 오크리지의 비밀 군사기지에 관한 논픽션으로, 책 자체도 재미있지만 나는 주로 기지의 지리적 위치나 내부시설, 구조 등을 참고했다. 자료 조사를 위한 독서는 케이트 브라운의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로 이어졌는데, 재난 이후의 풍경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을까 싶어 집어든 책이었지만 그보다는 더 무거운 질문들이 남았다. 재난과 재난 이후의 삶, 그곳의 생존자들, 드러나지 않은 행위자들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환경사였다. 정작 소설을 쓰면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은 주제였지만, 이 책을 만난 건 글쓰기가 나에게 준 뜻밖의 선물이다.

반대로 무작정 책을 읽다가 이야기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카라 플라토니의 『감각의 미래』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최신 인지과학을 탐색하는 책인데, 목차에는 우리가 흔히 ‘감각’이라고 여기지 않는 시간감각에 대한 챕터도 있다. 인간의 시간감각이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기본적인 감각들을 뇌 안에서 통합하고 편집하여 인지하는 초감각이자 다중감각이라고 한다. 언젠가 이걸 소설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나중에 울산의 공중관람차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이어갔다. 관람차를 탈 때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 주위의 풍경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을 시간감각, 시간 인지능력과 연관지어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고 그 결과물은 「캐빈 방정식」이 되었다.

의뢰받은 소재와 당시 관심 있던 소재가 합쳐지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광장: 미술과 사회> 전시 도록의 일부로 실을 소설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기획자님은 ‘광장’이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이졸데 카림의 『나와 타자들』을 예로 드셨고, 나는 에릭 캔델의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를 읽으려던 참이었다. 마침 추상미술과 뇌과학이라는 주제가 미술 전시 도록과도 연결될 것 같아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 『나와 타자들』이 담고 있는 다원화사회에서의 타자 혐오와 공적 공간에 관한 고민을 읽다보니 물리적인 공간과 가상의 공간을 잇는 어떤 기술, 그것을 통한 공존과 충돌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한편,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는 인간이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고 편집하는 방법, 그리고 뇌가 추상미술을 인지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책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앞서 생각한 집단 간 충돌의 원인이 세상을 인지하는 ‘시지각’의 차이에서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시지각을 지닌 세대의 출현, 그리고 그들만의 고유한 기술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하는 소설 「마리의 춤」을 그렇게 구상했다.

소설을 막 쓰기 시작할 때, 보통 내 머릿속에는 아주 희미한 아이디어와 구체화되지 않은 배경, 설정, 인물들이 죽처럼 희멀건하게 뒤섞여 있다. 나는 삶의 경험도 부족하고 박학다식하지도 않아서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도저히 이 이야기를 구체화할 수가 없다. 나를 끊임없이 뒤쫓아오던 ‘작가로서의 밑천이 없다’는 두려움은 바로 그 때문에 생겨났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아는 걸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알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백지 위에 세계를 단숨에 휘갈겨 그려낼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이 나에게 없다면, 적어도 다양한 재료를 가져와 그걸 섞고 다져서 토대로 쌓아 올려보자고 생각했다.

가끔은 소설 쓰기를 낯선 여행지의 가이드가 되는 일에 비유한다. 나에게는 이 세계를 먼저 탐험하고 이곳이 지닌 매력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낯선 여행지는 아직 내게도 안개로 덮인 듯 뿌옇게 보인다. 그렇지만 안갯속에서 초고를 쓰고, 많은 자료를 읽고 공부하고 가져와 길목 구석구석을 점차 구체화하고, 또 다시 쓰고 고치다보면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시야가 점차 맑아지고 풍경이 선명해진다. 어느 순간 내가 그 여행지의 풍경 속에 정말로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비로소 나는 이 소설을 쓸 준비가 된 것이다.



므레모사
므레모사
김초엽 저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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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소설가. 1993년생. 포스텍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쓴 책으로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원통 안의 소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