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의 오늘밤도 정주행] "안될 것 없죠" - 커뮤니티
<커뮤니티> 속 주인공들이 의기소침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에너지 넘치게 무모하게 굴 수 있는 것은 “매 순간을 실수로 채우고, 힘 닿는만큼 기적으로 채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글ㆍ사진 손보미(소설가)
20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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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지희

영국 출신의 신경과학자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에는 아스퍼거증후군인 셜리 템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일반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고안해내는데, 엄청난 양의 책을 읽고 거기에 나온 인물의 태도나 감정들을 학습하고, 기억해두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속에는 거대한 도서관이 있다고, 필요할 때마다 거기에 있는 책을 꺼내 읽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적용시킨다고 말한다. 그녀는 인간을 학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화성에서 온 인류학자’라고 부른다.

그린데일 커뮤니티 칼리지와 스터디 그룹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커뮤니티>에는 아벳이라는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가 나온다. 아벳은 책이 아니라, 각종 드라마와 영화, 쇼를 통해 인간을 학습하고, 친구들을 이해한다. <커뮤니티>의 그 수많은, 빛나는 패러디(반지의 제왕, 홍콩 누와르, 대부, 샤이닝, 펄프픽션 그리고 기타 등등)와 한계 없는 상상력(가장 어두운 타임라인, 아이스크림 수업 수강권을 얻기 위해 열리는 서바이벌 게임, 담요 요새의 전쟁, 세뇨르 챙의 캠퍼스 진압, 스터디룸의 물건들을 훔치는 원숭이, 어둠의 에어컨 수리학과, 드리머토리움 그리고 기타 등등)의 세계가 아무런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건, 아벳이라는 캐릭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게 내게는 더 중요한 지점인데) 아벳은 이 드라마가 지향하는 어떤 포괄적인 태도나 비전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셜리 탬플이 지구인을 관찰하는 일종의 ‘인류학자’인 것처럼, 이 드라마 자체가 인간이라는 종을 관찰하는 일종의 ‘인류학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닐까(시즌 2의 주요 과목은 ‘인류학’이다)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관찰하는, 인간의 특징은 (그린데일 커뮤니티 컬리지의 총장의 입을 빌려)을 이런 식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배수구나 맴도는 사람들” 노파심에 덧붙이는데, 이 말을 하는 총장 역시 여기에 속해있다.

이 드라마의 주요 인물이라고 말해도 좋을, 스터디 그룹원들을 살펴보자. 잘 나가는 풋볼선수였지만 졸업파티 때 술을 마시다가 어깨 부상을 당하고 명문 대학 진학이 불가능해진 트로이, 지독한 왕따였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서 약물에 의존한 경험이 있는 애니, 여성 문제를 비롯한 각종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썰렁한 농담을 남발하고 항상 어딘가 핀트가 어긋나는 브리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엄청난 수다쟁이, 참견쟁이 이혼녀 셜리,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성차별적인 발언을 거리낌없이 내뱉는 (무려 결혼을 일곱번 한)할아버지 피어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남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속임수도 마다치 않으며 말만 번지르르한 제프, 그리고 아벳.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사회운동가와 차별주의자, 노인과 젊은이, 남자와 여자, 흑인과 백인과 아랍계 미국인. 이들에게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쓰디쓴 실패를 겪었고, 여전히, 아직은 그 실패 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

그렇지만 그들은 절대 의기소침하거나 우울해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희망 때문에? 열심히 살면 실패를 만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에?

그 답을 하기 전에, <커뮤니티>에서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들 중 하나를 언급하고 싶다. <내려놓기의 심리학>이라는 에피소드에서 피어스는 영생을 약속한 종교에 빠져 있는데, 그 이론은 이렇다. 죽은 사람의 에너지를 기화해서 ‘에너지 봉’에 보관하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기술이 발전한 이후, 기화된 에너지를 다시 잘 보관된 육체로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어스는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의 ‘에너지 봉’을 가지고 다니면서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군다

“좋은 모든 것은 결국 썩은내 나는 잔해더미로 남는다는 것”을 피어스에게 알려주고 싶은 제프는 시체 안치소로 피어스를 데리고 가서 차가운 시체로 남은 그의 어머니를 직접 보여줄 계획을 세운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는 제프의 거짓말에 속아 신체 안치소로 향하는 차에 타게 된 피어스는 우연히 어머니의 유언이 담긴 시디를 발견하게 된다. 그 시디 안에서 피어스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피어스, 이 시디를 듣는다면 난 죽었다는 의미겠지. 나는 기화된 게 아니라 죽었단다. 영원히 떠났단다. 그리고 난 그 편이 좋구나. 인생은 짧으니까 의미있는 거다. 본디 삶은 열심히 살고 움직이라고 있는 거야. 충실히 보내고 마음껏 느끼면서 삶의 매 순간을 실수로 채우고, 힘닿는만큼 기적으로 채워야 한단다. 그 다음에 놓아줄 줄 잘알야 한다. 너에게 억지로 강요할 순 없지만 너도 어미를 억지로 붙들 수는 없는 거란다. 그 바보같은 뚜겅을 열어보면 메이드 인 차이나인 걸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사랑한다. 아들아, 잘 있거라.”

그러니까, <커뮤니티> 속 주인공들이 의기소침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에너지 넘치게 무모하게 굴 수 있는 것은 “매 순간을 실수로 채우고, 힘 닿는만큼 기적으로 채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앞날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감이 그들의 삶을 추동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삶을 추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투고, 화를 내고, 삐지고, 때로는 학교 전체 학생들이 서로 편을 나누고 페인트 총을 난사하고, 도망치고, 학교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더라도 다음날이 되면 그들은 다시 새로운 ‘오늘’을 살아간다. 어떤 과정이나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그 실패가 언제나 우리에게 교훈을 주지는 않는다. 삶이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정확하게는 마지막 방영이 되리라고 모두가 막연하게 예상했던 5시즌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애니는, 감정을 가진 컴퓨터를 만들려다가 몇십년간 은둔하며 살아간 그린데일 커뮤티니 컬리지의 설립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린 서로 존중해야 해요.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이 고통만 낳을 허황된 꿈이라고는 게 분명하다고 해도 마음대로 그 꿈을 좇을 수 있게 해야죠.”

어머니의 유언을 들은 피어스는 어떻게 했을까? 피어스는 가실 때가 되니 어머니의 정신이 이상해졌다며 씨드를 창밖으로 던져버린다. 아직도 어머니가 에너지 봉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피어스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거냐고 되묻는다. 그러자, 제프는 대답한다. “안될 것 없죠.” 그래, 안될 것 없지. 영원히 배수구나 맴돌면 어떠한가?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살아있는 한 허황된 꿈은 계속될 수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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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예스24 # 손보미의오늘밤도정주행 #커뮤니티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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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e298

2022.10.07

작가님 글을 정말 좋아해서 내일 글 올라오는 것만 기다려요. 오래 연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매 회 글이 새롭고 좋은데, 이번 편은 디어 랄프로렌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아래 구절이 특히 좋았어요. 작가님 연재 오래오래 하길 기대해요. 응원합니다!

그러니까, <커뮤니티> 속 주인공들이 의기소침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에너지 넘치게 무모하게 굴 수 있는 것은 “매 순간을 실수로 채우고, 힘 닿는만큼 기적으로 채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앞날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감이 그들의 삶을 추동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삶을 추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투고, 화를 내고, 삐지고, 때로는 학교 전체 학생들이 서로 편을 나누고 페인트 총을 난사하고, 도망치고, 학교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더라도 다음날이 되면 그들은 다시 새로운 ‘오늘’을 살아간다. 어떤 과정이나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그 실패가 언제나 우리에게 교훈을 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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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소설가)

드라마와 빵을 좋아하는 소설가. 『디어 랄프 로렌』,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