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주 작가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김소영이라고 합니다. 이 글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이지만 편지의 형식을 따르자면 간단히 제 소개를 드려야겠지요. 저는 선생님의 독자이고, 독서 교실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했어요. 그때는 동화 작가님들께 편지를 쓰는 게 일과였습니다. 십수 년 동안 아마 수백 통은 썼을 거예요. 그런데 이 편지를 쓰려니 처음인 것처럼 들뜹니다. 좋아하는 옷을 입고, 책상을 깨끗이 정리하고, 달고 차가운 음료를 챙겼습니다.
그리고 작가님의 책 『지금은 여행 중』을 쓰다듬은 다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단 한 가지. 작가님의 다음 책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 중에 저도 있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글을 쓰려면 가장 먼저 독자를 파악해야 하지요. 이 편지를 쓰려고 저도 작가님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아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작가님 이름이 본명인지 필명인지도 몰라요. 심지어 제 마음속에서는 책 제목에 작가님 이름이 녹아 있어요. ‘지금은 우주여행 중’.
표지 안쪽의 작가 약력만으로는 부족해요. 작가님은 어떤 동화를 좋아하시는지(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작가님의 동화를 좋아해요), 왜 동화를 쓰시는지, 어린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길을 걸을 때 어디를 보시는지, 이 세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런 것을 안다면 좋겠는데요. 상상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제가 그런 걸 잘 못해요. 한 어린이에게 어른이 왜 그렇게 상상을 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힌 적도 있어요.
그러다가 동화란 얼마나 쓰기 어려운 갈래인가 생각했어요. 독자를 파악하기가 간단하지 않으니까요. 어린이의 나이나 지식수준, 어린이들 사이의 유행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닌 것, 아시지요? 그런 것도 알아야 하지만, 거기에만 기대면 작품의 수준이 금방 결정되고 말아요.
동화에서 독자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고 저에겐 너무 어려운 주제이니 여기서 자세히 쓰진 않겠습니다. 다만 ‘어린이’ 독자를 생각할 때 제가 동화에 가장 기대하는, 아니 애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린이가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놀라움을 경험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문학이 하는 일이니까요. 작품 속 사건이 독자가 겪은 일과 똑같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어떤 어린이는 자신의 고통이 재현된 동화에서 오히려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읽는 순간 인물의 마음이 곧장 이해되는 작품을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어린이도 어른도 공감했다는 착각 때문에 더 생각할 기회를 놓칠 때가 많잖아요.
제가 바라는 건 그 반대입니다. 어린이가 전혀 몰랐던 행복, 의문, 기대, 심지어 아픔까지도 처음으로 가져보았으면 좋겠어요. 무한한 축복과 동의,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서 자꾸 생각해보게 되는 인물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어린이의 세계가 커졌으면 좋겠어요. 제가 이제 무슨 말을 할지 아시겠지요? 저에게 작가님의 동화들이 바로 그런 작품이에요.
작가님의 책을 읽는 어린이들을 떠올려보았어요. 「직진 말고 유턴」은 초경을 시작한 화자(‘나’)가 택시 조수석에서 기사인 아빠와 다투고 화해하는 이야기지요. 아빠는 화자가 타고 있어도 뒷자리에 손님을 받고, 그럴 때마다 화자의 불만은 경우와 예의를 따지지 않고 터져 나옵니다. 화자는 미혼부로서 자신을 키우기로 한 아빠에게 마음속으로, 때로는 입 밖으로 책임을 물어요. 아빠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형편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우고 있지요. 어느 손님이 둘의 대화를 듣다가 뜻밖의 사연을 털어놓으면서 둘의 갈등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요.
어떤 어린이는 작품 속 아빠와 딸이 티격태격 다투는 것을 수다 정도로 생각하며 재미있게 읽을 거예요. 그것도 좋겠지요. 화자가 그렇듯이 ‘능력도 안 되면서 굳이 나를 낳았으면 더 잘 키워야지.’ 하는 생각을 해본 어린이가 읽을 수도 있겠지요. 떠올리자마자 죄책감이 들고, 지우려고 할수록 또렷해지는 원망. 그런 걸 품어본 어린이라면 도저히 책을 덮을 수 없을 거예요. 이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알아내기 전에는요. 저는 그래서 아무리 짧은 동화라도 반드시 그 안에서 생긴 문제를 해결하거나 적어도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다음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책에서 얘기한 게 맞는지 아닌지는 어린이들이 각자 생각할 테니까요.
「지금은 여행 중」은 다 읽자마자 쪽수를 세어봤어요. 세계관이 통째로 흔들리는 데 몇 쪽이 필요한가. 삽화를 빼면 열두 쪽이더라고요. 반지하 좁은 방에 혼자 살면서 곰팡이와 배고픔, 외로움을 견디는 어린 ‘너’에게 외모도 행동도 남다른 전학생이 손을 내밀어요. “왜 너한테 친구가 없어? 넌 정말 바보 같아.” 이 대사를 쓰면서 작가님은 울지 않으셨어요? 저는 읽으면서 울었어요.
이 작품에 대해 오래 생각했어요. ‘너’는 어째서 극단적인 빈곤 속에 고립되어 있을까. 돌보는 어른 한 명 없이 이렇게 방치되다니. 현실이라면 이렇지는 않을 텐데 과장된 설정이겠지. 그런데 그럴까요? 제가 모든 어린이의 사정을 다 알고 있을까요? 주변에 어른이 있다면, 거주지가 1층이라면, 배가 고프기는 해도 초콜릿을 훔칠 정도는 아니라면 그 어린이는 ‘너’와는 다를까요? 저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단정 짓는 것 아닌가 생각하니 목 뒤에 땀이 났어요.
고백하자면 저는 오랫동안 어린이의 고통을 다룬 이야기를 피해왔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통을 재현하는 것이 어린이 당사자에게 새로운 고통을 주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이야기 속의 결말이 너무 적절해서 도리어 이야기를 믿을 수 없게 되는 어린이도 있을 테고요. 또 하나는 설령 어린이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어린이에게, 그러니까 이 작품 속의 ‘너’에게 도착할 확률이 얼마나 되나 하는 점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어른들이 읽고 대신 위로를 받을 확률이 높지 않나. 차마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제가 상상한 최선의 상황은 동화를 통해 어른들이 어린이의 불행을 이해하고 그들을 돕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작가님의 책을 읽으니 알겠어요. 단 한 명의 어린이에게만 도착해도 되는 동화가 있다는 것을요. 우주여행 중에 곤경에 빠졌더라도 나를 찾으러 오는 친구 단 한 명만 있어도 되는 것이었어요. 그 친구가 지구에서 쓰지 않는 언어로 말해도 결국은 알아들을 수 있어요. 어떤 동화는 독자에게 천천히 이해되어요. 절망의 바닥에 있다가도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찾으러 갈 수 있지요. 그렇게 우리는 살 수 있어요.
이 책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어느 날 누군가가」예요. 그런데 그 얘기를 하려면 너무 눈물이 나서(보세요, 지금도 울고 있잖아요) 안 되겠어요. 이 작품을 읽은 날에 제가 공책에 뭐라고 썼는지 아세요?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린이를 돌보는 일. 문학은 할 수 있다. 문학이 할 수 있다면 사람도 할 수 있다.’
이 편지를 쓰면서 저는 작가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 알게 되었어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동화를 좋아하실 테고, 어린이를 살게 하고 싶어서 동화를 쓰시는 것 같아요. 어린이에게서 희망을 보실 것 같고, 길을 걸을 때는 구석진 곳의 슈퍼마켓, 어울리지 않게 큰 가방을 멘 어린이를 유심히 보실 것 같아요. 어차피 세상은 하도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무슨 문제든지 빠져나갈 방법은 하나쯤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제가 맞혔을까요?
김우주 작가님. 이 편지를 보신다면 더 자세히 알려주세요. 제 말은 어서 다음 책을 내주셔야 한다는 뜻이에요. 긴 이야기도 읽고 싶어요. 짧은 이야기도 더 많이 읽고 싶어요. 많이 바쁘신가요?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책상 정리를 제가 해드릴까요? 달고 차가운 음료를 만들어 드릴까요? 작가님이 새 책을 내시는 날을 하루라도 앞당길 수 있다면 무엇이든 편히 말씀해주세요.
좋은 책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어린이들을 위해서 반드시 강건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 김소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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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aloes95
2022.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