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정해진 형태가 없다. 때로 우리와는 상관없는 막연한 동화 같다가도, 어느 날 불쑥 다가와 조용히 곁을 맴돌곤 한다. 종교에는 철학과 교리의 대상이지만, 과학에는 학술적 탐구의 대상으로 비친다. 동시에 모든 인간에게는 두려움과 겸손을 깨닫게 하는 절대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죽음이 가진 초월성과 다변성은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의 구미를 당기는 매력적인 소재로 여겨져 왔다. 오늘날까지도 죽음에 관한 각자의 해석을 다룬 작품이 세상에 등장하는 이유다.
그리고 여기, 국내에도 그 어려운 소재를 과감하게 담아낸 한 명의 야망가가 있다. 2020년
작년
외적으로라면, 나도 모르는 새에 신에서 이름 있는 사람이 됐다. 늘 그런 사람들을 보며 시기 어린 시선으로 내 미래가 저랬으면 하는 꿈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 남들이 내게 그런 얘기를 해주고 있더라. 개인적으로는 외압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회사에 속해 있었다 보니 현대 알앤비는 이래야 하고 기존의 것은 촌스럽다 같은 천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이러한 결과가 있으니 내 취향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그리고 음악가로 인정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감이 좀 찬 상태다. 온스테이지도 나가고, 섭외를 받아 공연도 많이 서게 되었고. 아무래도 동경하던 멋있는 인디 뮤지션들의 바닥으로 한 발자국 선을 넘어본 것 같다.
외부의 시선이 부담보다는 자신감으로 작용한 건지.
그런 셈이다. 얼마 전에 가수 오소영 님의 공연을 다녀왔다. 활동한 20년의 세월과 음악 모두 너무 훌륭하고 대단한 분이다. 나는 약간 명분파인데, 만약 내 20년을 꿈꾼다면 이제는 그냥 '원해서'라는 명분은 좀 부족하다. 혼자 만든 작품이 한대음(한국대중음악상)의 후보였다는 배지가 달렸으니 내가 그런 명분에 있어 자신감이 생기더라. 앞으로도 혼자 하고 싶고, 혼자 잘해보고 싶고, 그러다 보면 또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내 명분을 더해줄 사람들 말이다.
사실 죽음은 쉽게 겪는 일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기 때문에 워낙 멀게 느끼기 쉽지만, 굉장히 일상적이다. 나조차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죽고, 어릴 때 선택을 한 친구도 있고, 사고를 당한 친구도 있다. 우리 역시 그런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나는 이제 꿈을 좇고, 물질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을 더디게 만든 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러다 보니 괴리감이 많이 들기도 했다.
어찌 보면 죽음으로부터 치유나 생존의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닌, 오히려 그대로를 담아내기 위함이었나.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걸 말하지 못하면 속에 병이 난다. 나에게는 음악이 노래를 한다 보다는 말을 한다의 개념이었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았다. 얼마나 힘들고 절망이 많은 세상 아닌가. 비단 나만 죽고 싶은 건 아닐 테니까. 물론 '다 괜찮아질 거다' 혹은 '힘내라' 이런 무드가 아니어도 그냥 이런 나의 모습을 담아낼 테니, 당신도 외롭지 않겠네라는 메시지를 담았던 것 같다.
고통을 의미하는 'Pain'과 재생을 의미하는 'Green'의 조합을 앨범의 제목으로 삼았다. 상충하는 두 표현을 합한 이유가 궁금하다.
'PAINGREEN'이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된 이유는 일단 개인적인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고, 실제로 내가 식물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CORK'를 썼던 2018년 겨울 즈음, 식물을 병적으로 많이 키우던 때가 있었다. 비록 현실의 나는 죽고 싶더라도 식물은 명확히 살아있지 않나. 심지어 죽어가는 애를 가지를 잘라 물꽂이를 해놓으면 뿌리가 나와서 잘 산다. 식물은 초록색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나를 둘러싼 건 모두 초록색이었던 것 같다. 흔히 초록은 자연의 색이고, 눈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색이라고 하지 않나.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는 작업실을 전부 초록색으로 꾸미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집착이 심해진 것도 있고. (웃음) 일단 앨범 아트만 봐도 밝은 노란색이 많이 낀 연두색도 있고, 검정이 많이 껴있는 암녹색이 있는 것처럼,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초록색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들에 대해 각각 어떠한 초록색을 부여한다면 이것처럼 이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 'PAINGREEN'이라는 제목을 짓게 되었다. 작업 마지막 즈음에는 만약 이 음악을 듣고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초록색만 봐도 희망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더라.
'HURT'라는 타이틀이 인상 깊다. 곡에 등장하는 '상처'의 의미가 다양해 보인다. 연인 간의 사소한 알력 다툼이라거나, 혹은 전작부터 계속 반복되는 키워드인 '불안정함'이 관계에서 가져오는 상처라던가.
어느 순간 내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후로는 그 불안정함을 받아들이는 앨범을 계속 만들어 온 것 같다.
누구나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나. 돈도 벌 만큼 벌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며 좋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근데 내가 그러지 못하는 건,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과 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음악을 하는 건 그 삶을 받아줘야 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일이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포기는 할 수 없다 보니,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는데 상처는 줄 거야 하는 말이 되는 거다. 이 곡은 내 오랜 연인에게, 그리고 아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뜻이 곧으면 가지가 너무 제멋대로 자라버린다. 못 자르게 막더라도 자라긴 자란다. 가지가 자라면 내 곧아지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 주변 사람들을 찌르고 아프게 한다. 그래서 '상처'라는 표현을 썼다. 이렇게 자라버린 가지 내지는 가시를 내 손으로 자를 수 없으니, 이런 나를 받아주면 내가 너를 상처를 줄 테지만, 그만큼 내가 널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대체로 의도적으로 표현을 흐리는 듯하다. 듣는 이마다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남긴 건지.
조금은 뭉뚱그려지게끔 들리도록 했다. 개인적인 것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게 보편적으로 들린다고 하면 좋은 거니까. 그렇다면 제대로 들어준 것 같다.
어쩌면 방금 본인이 언급한 안정적인 삶을 살다가, 음악을 하기 위해 '불안정함(Insecure)'으로 뛰어든 이유가 있을까.
모르는 삶을 향해 뛰어든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였다. 나중에 책을 덮을 때 선택을 한 쪽을 후회할까, 하지 않은 쪽을 후회할까의 문제인 거다. 옛날에 한 만화책에서 이런 대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삶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답변자가 담담하게 '후회가 적은 쪽의 선택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게 삶 자체가 아닐까'라고 답하는 장면이었다. 만화 상으로는 건조하게 넘어가는 부분이었지만, 그 말이 나에게는 너무 와닿았고 그런 삶을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이건 아직도 어떤 선택을 해나감에 있어 크게 작용하고 있는 진리다. 물론 당시에는 그 불안정함이 5~6년 정도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아니어서 유감이지만, 어쩄든 그 덕분에 음악도 하고 있고, 과분한 영광도 얻을 수 있었고. 그렇다면 선택은 틀리지 않은 게 아닐까 싶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작중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다. 앨범의 주요 오브제로 물을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일단 내가 물을 많이 마신다. 거의 연가시다. (웃음) 우선 식물은 수분이 없으면 뿌리를 못 내린다. 어떻게 보면 식물에게는 물이 생명 그 자체인 셈이다. 어느 날 로즈마리 잎 사이로 뿌리가 삐져나오는 게 조금 보이길래, 뿌리가 좀 더 커지지 않을까 싶어 가지를 좀 깊게 담가놓은 적이 있었다. 근데 그냥 순식간에 썩어서 죽어버리더라. 어쩌면 나에게도 물은 삶 그 자체이자, 죽음으로 이르게 할 수 있는 신 같은 존재다.
요약하자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지만, 오히려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의미인지.
그렇다. 그래서 이 앨범에서도 물은 그런 생명의 베이스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도 사용된다. 이를테면 되게 죽고 싶을 때 썼던 'CROSS THE RIVER'라는 곡에서 강을 건넌다는 표현은 사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스틱스 강을 의미히기도 하지만, 하지만 이런 음악가의 삶으로 뛰어들기 위했던 어떤 나의 과감한 결심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강 건너로 간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를 부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니까.
'불 속에 놓고 온 것들'에서는 물과 대립되는 불이라는 소재가 등장하기도 한다.
'불 속에 놓고 온 것들'에 부여한 불의 의미는 소실이다. 예를 들어 화장을 하고, 유품을 정리할 때의 불이다. 누구나 아픔을 계속 안거나, 집착과 미련을 가지고는 제대로 살 수 없다. 그곳에 놓고 와야지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피처링으로 참여한 버둥이 2절에서 남녀관계를 다뤄준 덕에 조금 캐주얼해지고 해석의 여지가 더 많아졌다. 이건 되게 해피 액시던트라고 생각한다.
'Pity' 때부터 에이트레인의 창법은 절제하듯 부르지만, 한 문장마다 사력을 다해 부른다는 감상을 많이 받는다. 차분하고 정확한 전달법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을까.
나는 사실 완전 컨템포러리 알앤비 키드다. 애초에 뮤지끄 소울차일드(Musiq Soulchild), 맥스웰(Maxwell), 탱크(Tank), 보이즈 투 맨(Boyz II Men),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의 음악을 계기로 자라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호흡이 긴 보컬 라인을 좋아한다. <시스터 액트>에 삽입된 로린 힐(Lauryn Hill)의 노래만 봐도 한 프레이즈가 엄청 길지 않나. 근데 지금은 조금 나쁘게 말하면, 그런 표현의 미학들이 촌스러운 게 되버렸다. 시대가 바뀐 거다. 사람들이 멋있게 느끼는 지점이 바뀌었고, 신세대들이 그 이상의 멋을 제안했으니까. 조금 오만할지 모르지만, 그들을 선배라고 칭한다면 그 선배들의 몰락을 보며 존속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똑똑하고 민첩하게 받아들인 이들만 여전히 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안 나오더라.
그렇다면 본인은 현대식으로 해석을 한 케이스인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믹스테입 때는 BPM이 빠른 트랩 소울 음악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런 거에는 긴 프레이즈를 할 수가 없으니 조금씩 호흡을 짧게 내며 툭툭 던지는 방식이 멋있게 다가오더라. 그리고 문어체 가사를 정말 좋아한다. 나는 내가 개성이 많이 부여된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말할 때도 특별한 지점을 살리기 위해 신경 써서 좋은 단어를 선택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얘기를 꺼내려 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려면 너무 문장형이지 않되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놓을 가사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번 호흡을 뱉고, 다시 삼키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특히 '추모'부터 'SWEET SIDE'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듣는 사람조차 침울해지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나다.
그게 죽음이 가진 힘인 것 같다. 영화나 문학도 그렇듯이, 죽음이 가지는 무게감이나 압도감이 있다. 그런 게 잘 표현이 됐다니 다행이다.
사실 보통 앨범을 내면 후속 카드로 싱글을 남겨뒀다가 조금씩 풀면서 굳히기에 들어가는 게 보통인데, 나는 1년 동안 아무것도 못한 것 같다. 정확히는 앨범에 관한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노래도 하고, 작곡도 하고, 편곡, 엔지니어링 전부. 게다가 주목을 받으니 해야 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이를테면 온스테이지에서 연락이 왔을 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무대적인 연출을 구상해야 했고, 또 공연이 잡혔을 때는 한 시간 가량으로 셋리스트를 꾸려야 했으니까. 그 외에도 이런저런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게 있었나.
우선 남들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음악가들이 레슨을 돈벌이 수단으로 가져가지 않나. 그러나 만약 자기 발표물이 없는데 레슨을 계속한다면 그건 음악가가 아니라 튜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능력이 좋은 튜터라면 삶은 평화로워질 수 있다. 근무 시간이 만들어지고 일정한 수입이 생기면 일단 의식주가 해결이 되니까. 근데 그러다 보면 또 간절한 음악이 나오지 않기도 한다. 일종의 선순환이자 악순환에 가까운 고리가 생기는 거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돈벌이를 안 하고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곧 '한대음' 시즌이 돌아오지 않나.
사실 후보에는 한번 올라봤으니 언젠가는 수상을 해보고 싶다. 그 때만 해도 음악을 그만두고 다른 삶을 살아볼까 하는 마음도 있던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끌려 올라가 보니 욕심이 좀 나더라. 아, 최근 에피소드가 떠올라 하나 말하자면, 백신 2차를 맞고 집에 쉬던 날이었다. 2차 접종 후 고통이 따른다고 하니 걱정이 되면서도 궁금하기도 한 위험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창가에 앉아 3~4시간 동안 들어오는 직사광선을 맞고 있었는데, 갑자기 노래가 떠올랐다. 평소에는 건반을 잡고 시도하거나 어떤 워딩을 떠올리며 쓰곤 하지만 그날은 막 써졌던 것 같다. 아마 그 곡들이 후속작으로 나가게 될 것 같다.
후속작에서 다루고자 하는 메시지나 원하는 방향이 있을까.
음, 우선 내가 꿈꾸는 음악의 지붕은 '추모'라는 곡이 가까운데,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고, 왜 이런 소리를 썼을까 싶은 시도가 많은 곡이다. 근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작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쓰고 있는 노래들이 윤곽이 잡혀가고 있는 와중에 이게 전작의 'HURT'만큼 맛있을지, 아니면 과감하고 독창적인 선에서 끝날지는 모른다. 무릇 아티스트들이 그렇듯 2집에서 쇠퇴하는 소포모어 증후군을 겪을지, 아니면 다시 주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후속작에 실릴 음악들은 나 스스로를 감동케 하는 노래들이다.
그렇다면 서사적으로도 연결이 되는 건가. 죽기 직전의 감정에서 삶을 선택한 이가 다르게 직면하는 문제들 같이.
죽음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문학적으로 멋있으려면
발매 시점은 언제로 생각하고 있나.
내년 가을쯤으로 예상 중이다.
에이트레인의 음악 세계에 영향을 준 아티스트와, 그 아티스트의 베스트 앨범이 있을까.
우선 첫 번째는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다. 최근에도 앨범을 냈는데, 내가 좋아하는 앨범은 그전 작품인
두 번째는 <본 이베어(Bon Iver)>다. 특히
세 번째는 아우스게일의 데뷔작
제임스 블레이크나 본 이베어, 그리고 초두에 언급한 오소영 모두 초기작부터 여러 음악적 변화를 거쳐온 뮤지션이다. 혹시 에이트레인 본인도 언제든지 변화의 시기가 찾아올지, 또한 찾아온다면 받아들일 생각이 있나.
만약 능력만 된다면 포크를 기반으로 한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이 되보고 싶다. 요즘은 어쿠스틱만 존재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질투도 안 날 만큼 멋진 뮤지션은 전부 일렉트로니카 음악가더라. 전자 악기를 다루더라도 자기만의 세계를 펼칠 수 있다면 특별한 일렉트로니카를 만들 수 있으니, 나도 그런 음악가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만약 콜라보 하고 싶은 아티스트가 있을까?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빈지노님을 한 번 더 만나고 싶다. 서로의 삶이 흘러가는 와중에 어떤 계기로 군대 가기 전 그가 작업실에 온 적이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해줬다. “하고 싶은 음악과 말을 중학생 때부터 원 없이 해왔더니, 어느 순간 회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오더라. 그러나 그때까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계속해봐야만 자기 색깔이 나온다. 지금 유행하는 음악이나 나이는 신경 쓰지 말고 너만의 음악을 찾을 때까지 해봐라.” 그가 떠나고 나서 회사 사람들은 내게 '아니다, 지름길로 가야 한다'고 말하더라. 나도 그때는 맞는 말이지만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빈지노님보다는 늦게 음악을 시작하기도 했고. 근데 이제는 알겠더라. 하고 싶은 걸 다 해봐야 그제서야 오는 게 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그때 우리가 짧게 겪은 일화에 대해 음악으로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존경과 감사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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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