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OO의 애창곡 시간입니다. 처음 들려드릴 곡은 석지훈의 '당신은 나의 운명'입니다."
장지(葬地)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형과 어머니는 거실에 누워 있었다. 이런 상황은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나는 뭘 할지 모르겠어서 아빠의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에 연결했다. 마지막에 찍었던 사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렇게 파일들을 찾던 중 음성 녹음 폴더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아빠가 남겨둔 노래가 숨어있었다.
평소 습관대로 당신이 좋아했던 노래의 리스트를 종이에 써놓았을 것이다. 반주 없이 노래하는 걸 좋아했던 터라 목만 몇 번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렇게 녹음된 노래가 스무 곡이었다. 엄마와 형을 불렀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맨 처음 고백, 그대 그리고 나, 남자라는 이유로, 인생, 불 꺼진 창, 울고 넘는 박달재...... 벌써 그리운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빠를 잃은 두 아들이 조용히 노래를 들었다. 책장을 짚고 서 있던 엄마가 말했다.
"아빠 노래 이제 못 들어서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장례식 내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그의 부재가 그제야 확실해졌다. 불과 10일 전까지 상상도 못 한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온갖 기계를 달고 누워 있던 아빠의 모습에 일주일 내내 괴로웠다. 수십 년 동안 가족 옆에 있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아빠의 부재를 '감당'하고 '적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빠의 부재와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남아 있는 우리와 떠나간 당신이 온전할 터였다.
"이런 작업은 저도 처음인데 노래가 좋네요. 계속 들었어요."
CD 제작 업체 사장이 최종 검수용 CD를 건네며 말했다. 회사일로 몇 번 작업을 했던 터라 헛말을 하지 않는 분이란 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부분이 없나 들어보고 다시 연락을 주기로 했다. 엄마는 70세에 에세이집을 내고, 아빠는 75세에 음반을 내기로 했었다. 휴대폰에 남겨진 스무 곡의 노래는 음반을 위한 연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아빠의 CD를 제작하기로 했다. 표지 디자인을 의뢰하며 그동안 찍어둔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몇 달 전부터 수십 년 전까지 시간이 거꾸로 흘러갔다. 흰머리의 아빠가 점점 젊어졌고, 온화한 미소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사진을 추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버릴 사진이 보이지 않았다. 디자이너에게 선택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최종 선택한 사진을, 엄마는 한참 동안 바라봤다.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완성된 CD가 배달됐다. 비닐을 벗기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노래 사이로 익숙한 기억들이 떠다녔다. 마지막 트랙인 조항조의 '고맙소'가 끝났다. 그렇게 다시 친해져야 할 아빠가 찾아왔다. 노랫속 그는 편안했고, 노래가 흐르는 집엔 예전과 같은 익숙함이 가득했다.
얼마 전 10년 전 영상 하나를 엄마와 형이 있는 단톡방에 올렸다. 아빠가 운전을 하며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고 나서 노래 가사에 대해서 나한테 설명해주는 영상이다. 찍고 찍히는 게 어색해서 카메라는 내내 흔들리는 중이다.
"고운 손으로 넥타이를 맨다고 한 거 보면 아내가 죽는 거란 말이야? 그다음에 크고 투박한 두 손으로 당신을 감싸주던 그때를 기억하오,라고 한 거 보면, 이게 아빠가 엄마한테 하는 얘기인 거지."
영상을 몇 번 다시 재생했다. 고향에 있는 엄마도, 조카들과 거실에 있을 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시 뒤, 엄마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참 재미있게 살았네.'
3년이 흐른 지금, 그의 음성은 여전하다. 덕분에 아빠는 이곳에 없음에도 여전히 이곳에 있다.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한 가지 욕심이 생기곤 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가 조금씩 늙었으면, 내가 살아내는 시간만큼 그의 모습에도 시간이 흘렀으면 하는 그런 욕심. 저곳의 아빠가 웃으며 손사레를 치는 모습을 상상하곤 피식 웃는다. CD를 정리할 때 창밖에서 희미한 바람이 흘러들고 있음을 느낀다. 어느 곳에서 온 바람이 이곳을 돌아나간다.
김구환 일을 하고 여행을 시도하고 사진을 반복합니다. 작은 글들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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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환(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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