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팬’은 영원한 젊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피터 팬 신드롬’은 늙는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저항 혹은 부적응으로 어리게 사는 남성의 심리를 나타내는 용어로 쓰인다. 스코틀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매튜 베리가 네버랜드의 피터 팬을 선보인 지 110년이 넘었다. <웬디>는 피터 팬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2020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근데 제목에서 피터 팬이 빠졌다! 원작에서 피터 팬의 모험을 지켜봤던 웬디가 제목에 단독으로 등장할 정도라면 기존의 피터 팬을 완전히 뒤집었다는 얘기다.
웬디(데빈 프랑스)는 기차가 지나가면 건물이 흔들리는 기찻길 바로 옆 작은 식당에 살고 있다. 그때마다 웬디는 달리는 기차 위에서 곡예를 부리는 또래의 아이를 본다. 아이에 대한 호기심과 그에 동참하고 싶은 모험심으로 무장한 웬디는 밤늦은 시간 쌍둥이 형제 더글라스(게이지 나퀸), 제임스(개빈 나퀸)와 의기투합하여 달리는 기차 위에 올라타는 데 성공한다. 아이의 이름은 피터(아슈아 맥)다. 피터를 따라 기차에서 내려 배를 타고 긴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은 자신의 의지로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 수 있는 신비로운 섬, ‘네버랜드’다.
놀잇거리가 널린 섬의 곳곳을 탐험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아이들의 세계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더글라스가 실종됐다. 형제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제임스는 손에서부터 점점 노화가 시작된다. 웬디는 더글라스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제임스는 더글라스가 어딘가에서 죽은 거라고, 갈등하면서 이 섬은 젊음과 늙음이, 긍정과 부정이, 낙관과 비관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편이 갈린다. 제임스는 노화하는 손목을 절단하고 배의 선장이 되어 어른들을 이끌고 아이들을 납치한다. 이에 상실한 피터를 설득하여 웬디는 감금된 친구들을 구출하겠다고 나선다.
<웬디>를 연출한 이는 벤 자이틀린 감독이다. 장편 데뷔작이자 전작인 <비스트>(2012)로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과 여우주연상과 각색상 후보에 오르는 등 장편 영화 단 한 편 만들었을 뿐인데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을 했다. <비스트>를 발표할 당시 고작 서른이었던 벤 자이틀린(1982년생)은 예상치도 못한 극찬과 영화계의 환대 속에 장편영화 연출의 기회를 얻으려고 두문불출했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참 알다가도 모를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비스트>를 만들기까지 벤 자이틀린의 인생은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10대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의지는 풍화와 침식의 시간을 겪으면서 점점 깎여나가 30대가 가까워졌을 때는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련을 한계라고 여겨 포기했다면 그걸로 끝이었겠지만, 성장통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니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경험을 통해 버티는 삶을 구축하는 과정이고 그런 면에서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자 어릴 때 읽었던 <피터 팬과 웬디>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 자체로 모험이었다. <피터 팬과 웬디>를 재해석한 <웬디>를 준비하면서 벤 자이틀린은 “내 커리어를 걸고 스스로에게도 나이 든다는 것이 부정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영화가 되기를 바”랐던 벤 자이틀린은 늙음을 상실의 관점이 아니라 나이테가 생기듯 무언가를 더하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어린 시절의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를 기억한다면, 변화와 성장은 삶을 더욱 풍부하고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벤 자이틀린이 보기에 피터 팬이 젊음과 상상력의 가치라면 웬디는 그에 더해 나이 듦과 경험의 중요성까지 아우르는 포용의 대명사다. 원작이 피터 팬과 후크 선장의 대립으로 대결의 스펙터클을 구현했다면 <웬디>는 인공의 네버랜드 대신 화산섬과 같은 실제 배경에서 모든 장면을 촬영하며 자연이 내재한 포용과 회복의 쓸모를 부각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래서 의미 있는 메시지는 차치하고 인종이나 성의 측면에서 차별적이었던 원작과 다르게 벤 자이틀린의 영화는 웬디의 주인공 설정은 물론 레게머리가 인상적인 유색 인종의 피터까지, 현대적인 면모를 보인다.
<웬디>를 기획할 때 서른두 살이던 벤 자이틀린은 영화를 완성하면서 서른여덟이 되었다. 원작을 새롭게 해석하고 캐릭터에 걸맞은 배우를 캐스팅하고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촬영 장소를 찾아다니는 등 지난 7년은 <웬디>라는 작품에 깊이를 부여한 시간이었다. 산다는 건, 나이가 든다는 건 일종의 숙성 과정이다. 모든 가능성을 시험하는 젊음을 거쳐 그중 선택한 한두 개의 가능성에 집중하는 늙음은 선을 이뤄 진행형의 삶을 구성한다. 후크 선장의 존재로 피터 팬이 두드러지고 웬디로 인해 후크와 피터가 손을 잡는 <웬디>의 결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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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