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의 만화가 미우라 켄타로가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수십 수백의 병사까지 한 땀 한 땀 그리는 작화로 유명한 만큼 작업량도 엄청났기 때문에 과로가 건강에 영향을 끼쳤다고들 합니다. 그의 일생일대의 작품 『베르세르크』는 결국 미완성으로 끝이 났지만 미우라 켄타로의 열정을 기억하는 많은 독자들이 추모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미우라 켄타로 글그림 / 대원
좋은 만화가의 필요충분조건이 뭘까요? 저는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온전히 그림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미완성 된 『베르세르크』를 언급하고 뒤이어 이런 말을 하다니 사이코패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끝까지 읽어주세요!)
그림만 잘 그린다면 일러스트레이터를 하면 되고 스토리에만 자신 있다면 소설가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만화가는 그 어려운 두 가지를 한 번에 해내야 한다는 겁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내용이 적절한 작화로 오롯이 전해져서 다 읽고 나면 개운한 느낌이 들면 명작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지금 소개하려는 만화들도 그런 의미에서 좋은 만화입니다.
AJS, 골왕&자룡, 고사리박사, 김이랑, 뼈와피와살 글그림 | 문학동네
제가 어렸을 때는 책은 당연히 종이책이었는데요. 요즘 들어 전자책을 읽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자 책은 낱장을 넘기는 느낌이 없잖아. 종이 질감을 음미하면서 봐야 진짜 독서지!’라고 나름의 종이책 찬양론을 펼치자 친구가 ‘죽간에서 종이로 넘어갈 때 죽간 옹호론자도 그랬을 거다.’라고 해서 머리가 띵했습니다.
대부분의 만화 플랫폼도 온라인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만화 잡지들이 폐간되어가고 있고 웹툰은 보통 장편 연재물을 기준으로 선정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여자력』 은 정말 시기적절한 기획인 것 같습니다. 어느 플랫폼에서도 공개된 적 없는 단편 만화들을 모아 굳이 굳이 종이책 단행본으로 냈거든요. 젊은 작가상 단편 소설집을 내는 문학동네라서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목이 특이하지 않나요? 『여자력』 은 ‘스스로 자(自)’자를 써서 여성 초능력자 주인공을 주제로 합니다. ‘여자력’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넘어선 발상입니다. 작품들은 전혀 다른 소재와 배경으로 각각의 스토리를 풀어내고 있지만 어쩐지 읽고 나면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각박하고 험난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이어져 있구나.’ 누군가와 어깨동무를 했을 때의 은근한 겨드랑이 온기가 느껴집니다. 그렇게 이 만화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초록뱀 글그림 / 사계절
이어 소개할 책은 출산과 육아를 겪는 부부의 심리를 남편의 시각에서 그려낸 『좋은 남편』 입니다. 7년 전쯤 참석했던 지인의 결혼식 주례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삼십여 년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만나서 이제 같이 살려고 하니 당연히 다른 점들이 많이 보일 겁니다. 서로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서로에 대한 이해는 다름에 대한 인정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이 만화를 읽으며 다시금 떠올리게 됐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나름의 거리감을 찾아가면서 보다 좋은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구요. 단순한 그림체지만 색감과 연출로 심리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라 꼭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스토리를 지고 갈 캐릭터를 최대한 생동적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캐릭터가 스토리 안을 뛰어다니고 나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모든 이야기는 끝나 있고 그 캐릭터도 지 할 말 다 해서 뿌듯해하고 있어야 하는 거죠. 좋은 만화는 어쩐지 완결이 났는데도 책 너머의 세계에서 다들 잘 살고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게 합니다.
랑또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여기서 랑또 작가의 『가담항설』을 소개해야겠습니다. 약 5년의 기간 동안 꾸준히 연재된 끝에 최근에 12권을 마지막으로 단행본 완결이 난 작품입니다. 이 만화는 작가님 철학이 담긴 대사들도 장난 아닌데 캐릭터성도 끝내줘요. 정말 그들이 사는 세계가 있는 느낌입니다. 저는 이렇게 세계관을 잘 만들어서 자신이 낳아 놓은 캐릭터의 노후를 책임지는 것이 작가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베르세르크』의 세계관이 그렇습니다. 캐릭터의 철학, 유려한 작화, 작가의 사상을 담은 세계관이 이인삼각으로 질주하는 만화입니다. 비록 작품은 미완성으로 끝이 났지만 이 만화는 관성을 가지고 독자의 상상 속에서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갈 겁니다. 만화가라는 업의 본질에 있어 존경스러운 작가였던 미우라 켄타로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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