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책 번역가를 자처하는 주제에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한때 대체의학에 심취한 적이 있다. 큰애 아토피를 고쳐보려고 이 병원 저 병원 기웃거리며 온갖 검사와 치료를 받아봤지만 전혀 차도가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토피에 대한 여러 이설異說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으로 이상문 씨의 『밥 따로 물 따로 음양식사법』(정신세계사, 2005) 밥 먹을 때나 먹고 난 직후에 물을 마시지 말라는 권고는 합리적이라고 판단되어 그 뒤로도 계속 실천하고 있다(실은 물 마시는 걸 본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 결정적 계기는 기름기가 몸속에 끼어 순환을 방해한다는 그의 꿈 이야기였는데, 그는 이를 근거로 독자들에게 지방을 먹지 말라고 했지만 탄수화물이 간에서 지방으로 바뀌는 기전이 밝혀진 지금은 개꿈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황종국 씨의 『의사가 못 고치는 환자는 어떻게 하나』(우리문화, 2005), 그리고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고故 허현회 씨의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할 81가지 이유』(맛있는책, 2012) 등이 있는데, 독자 중에는 제목을 보자마자 ‘사이비 과학이잖아!’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려던 얘길 시작하기 전에 변명을 해둬야 할 것 같은데, 내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에도 귀 기울이는 첫 번째 이유는 대니얼 데닛의 조언을 따라 모든 사안에 래퍼포트 규칙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데닛은 게임 이론가 아나톨 래퍼포트의 말을 인용하여 토론에서 상대방을 무작정 틀렸다고 단정하지 말고 일단 진지하게 대하라며 다음의 네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1. 상대방의 입장을 매우 명확하고 생생하고 공정하게 다시 표현한다. 2. 의견이 일치하는 지점을 모두 나열한다, 3. 상대방에게 배운 것을 모두 언급한다. 4. 이렇게 한 뒤에야, 반박하거나 비판할 자격이 생긴다.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동아시아, 2015) 54~55쪽.
데닛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은 ‘이렇게 점잖고 신사적인 사람이 있을 수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래퍼포트 규칙에 이어지는 다음 문장을 읽으면 더위가 싹 가시고 오금이 저릴 것이다. “저자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이는 분노의 도끼를 꽂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자신을 덮어놓고 폄하하는 사람에게 비난받는 것보다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이 더 뼈아픈 법이다.
내가 대체의학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두 번째 이유는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의 선례를 따르기 위해서다.
『말레이 제도』(지오북, 2017)의 저자 월리스는 찰스 다윈과 더불어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빅토리아 시대의 저명한 자연사학자다. 그런 그가 심령술(죽은 이의 영혼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소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실제로 소통을 시도하는 사이비 과학)에 심취했다는 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으랴. 실제로 학계에서는 그의 이런 비과학적 탐구에 우려를 표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관찰과 경험을 신뢰했으며 권위자의 말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순응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라는 식의 지독한 실증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2015년 11월부터 2015년 4월까지 다섯 달 동안 『말레이 제도』를 번역하면서 월리스에게 빙의되어 지냈으니 그의 비타협적 태도에 나 또한 시나브로 물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대체의학을 진지하게 대한 마지막 이유는 저 유사과학적 주장들이 책의 꼴을 하고서 내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책이 쉽게 써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책이 쉽게 써지지 않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책에 박힌 활자들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박히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진지하게 책을 만들어본 사람은 다른 책들도 진지하게 만들어졌으리라 생각할 테니까.
뜬금없이 대체의학의 추억이 떠오른 것은 최근 모 출판사와 맺은 집필 계약 때문이다. 2021년 1월부터 4월까지 오바마 자서전 『약속의 땅』(웅진지식하우스)을 번역하여 탈고하고 이제 좀 여유를 찾으려나 싶었는데,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작업실에 찾아와 단행본을 쓰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2주일에 한 번씩 모 웹진에 연재하는 강행군이었다.
내게 끝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저 아래 서왕모』(알마)의 퇴고도 아직 3분의 1이나 남았고 지금은 크리스토퍼 해드내기, 『휴먼 해킹』(까치)를 퇴고하는 중이며 다음 주부터는 『약속의 땅』 교정지가 들어올 예정이다. 가뜩이나 멀티태스킹에 약한 나의 뇌는 급기야 합선을 일으키고 말았다. 며칠째 멍하니 유튜브만 들여다보고 충동판매와 충동구매를 일삼고 작업실 집기를 이리저리 재배치할 뿐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렇다. 나는 ‘글럼프’에 빠진 것이다.
이상문 씨의 『밥 따로 물 따로 음양식사법』에는 내가 아직까지 인생의 지표로 삼고 있는 문장이 있다. “A급 태풍이 바다 밑바닥을 발칵 뒤집어엎어 한바탕 청소를 해주듯이, 폭주로 인한 술기운은 혈액 순환을 급속히 촉진시켜 전신에 축적되어 있던 독소와 노폐물을 뒤집어엎어 배설물과 함께 몸 밖으로 씻어내 몸속을 깨끗이 세척한다.”(122쪽) (여기에 이튿날 새벽부터 오후 1시까지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이 폭주 청소론이야말로 “맛있으면 0칼로리” 따위의 허무맹랑한, 그래서 그 자체로 반어적이면서 자학적인 폭식 정당화 망언을 가볍게 뛰어넘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권주문勸酒文 아니겠는가.
“후회하면 반복한다”라는 옛말도 있듯, 폭음 이튿날 ‘내가 어제 왜 그랬을까. 오늘은 절대 안 마신다’라고 다짐하면 묘하게도 그날 퇴근 시간이 되어 술 생각이 새록새록 피어오르는데, 이런 후회와 반복의 악순환을 끊게 해주는 귀중한 정신 승리 기법을 나는 폭음 다음 날마다 떠올리는 것이다.
모某 기업형 슈퍼마켓에서 물회와 멍게를 사면서 무엇에 홀린 듯 집어든 반값 포도주를 둘이서 비우고 잠자리에 들어 밤새 선잠을 자며 뒤척이다 어슴푸레 동녘이 밝아올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알코올로 나의 몸을 리셋할 수 있다면 마음도 리셋할 수 있지 않을까?’ 밀린 작업, 쌓인 작업, 마감이 임박한 작업, 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휘젓고 온몸을 옥죄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을 분비케 하는 고민거리들이 그 순간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한 채 이불 속에 누워 알코올을 이용한 리셋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 현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나며 어떤 결과를 낳는지 곱씹기 시작했다. 나의 정수리 꼭대기에는 좁쌀만 한 구멍이 있고 클립을 펴서 그 구멍에 밀어 넣어 속에 있는 작은 버튼을 딸깍 클릭하면 …… 리셋!
과학책 번역가를 자처하는 주제에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밥 따로 물 따로 음양식사법』 : 밥 먹을 때나 먹고 난 직후에 물을 마시지 말라는 권고는 합리적이라고 판단되어 그 뒤로도 계속 실천하고 있다(실은 물 마시는 걸 본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 결정적 계기는 기름기가 몸속에 끼어 순환을 방해한다는 그의 꿈 이야기였는데, 그는 이를 근거로 독자들에게 지방을 먹지 말라고 했지만 탄수화물이 간에서 지방으로 바뀌는 기전이 밝혀진 지금은 개꿈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글럼프 : ‘글이 써지지 않는 답답한 상태’를 일컫는 영어 표현 ‘writer’s block’의 번역어로, ‘글쓰기’와 ‘슬럼프’의 합성어인데,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문학동네, 2018)에서 번역자에 의해 처음 시도되어 언중에게 정착되었다고 번역자는 알고 있었으나,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편집자에 의해 ‘슬럼프’로 교정되어 있었다(85쪽)! 이에 굴하지 않고 『시간과 물에 대하여』(북하우스, 2020)에서 재시도되었으나 이번에는 ‘글문이 막히다’로 재교정되었다(65쪽). 최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꽤 많은 ‘글럼프’가 올라와 있는 것으로 보아 세 번째 시도―라는 게 존재한다면―는 편집자의 검열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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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번역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 『당신의 머리 밖 세상』, 『헤겔』, 『마르크스』, 『자본가의 탄생』 등을 번역했다.
greentea
2021.06.30
오스트
2021.06.30
신선한 시각이 흥미롭네요.
beloved
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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