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는 인공 불빛에 가려 별 보기가 쉽지 않지만,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을 볼 수 있다. 풀벌레 소리만 멀리서 들릴 뿐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가만히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들은 무한의 시공간 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듯하다. 캄캄한 밤이 되면 별빛만으로 가득했을 그 옛날 사람들은 어땠을까? 그들은 별과 별 사이를 이어 익숙한 형상을,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신화 속 이야기를 덧붙여 별자리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별자리를 더 쉽게 찾고 더 잘 기억할 수 있었다. 인류에게 별자리는 밤하늘의 지도, 혹은 이야기책이었다.
『그림 속 별자리 신화』는 계절별 대표 별자리와 황도 12궁의 별자리 중 16개 별자리에 얽힌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예술작품을 통해 들여다본 책이다. 그간 여러 가지 형식으로 많이 다루어지긴 했으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접근 방식에 따라 언제든 재해석될 수 있으며 새롭게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 친절한 안내자 김선지 작가가 이번에는 어떻게 독자들을 친숙하지만 낯선 신화의 세계로 이끌어줄지 기대하며 그 뒤를 따라가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림 속 별자리 신화』는 작가님의 첫 책 『그림 속 천문학』과는 같은 듯 다른 느낌입니다. 집필하실 때 어떤 점에 중점을 두었나요?
『그림 속 천문학』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도 들어가 있지만, 주로 별과 우주, 행성 등 천문학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이번에 출간한 『그림 속 별자리 신화』에서는 그때 못다 한 신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스 로마 신화의 풍성한 이야기들을 예술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상징을 저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읽어내려 했습니다. 신화는 인간의 집단무의식(원형)의 발현이라고 하잖아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와 닿는 지점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책에는 ‘어른을 위한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어른들이 읽는 신화와 아이들이 읽는 신화는 다른가요?
어린이들이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재미있고 피상적인 스토리 위주예요. 이 책은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들을 찾아내는 데 중점을 둔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세계 각 나라의 신화, 민담, 설화에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축적된 삶의 진실과 경험, 심오한 상징이 숨어 있습니다. 신화에는 시공을 초월한 인간 존재의 문제, 즉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욕망과 이성, 경쟁과 질투, 진실과 거짓, 이 모든 것의 원형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화를 읽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동안 많은 책들이 주제로 삼은 레드오션 분야지만 무궁무진한 해석이 가능해 오래전부터 꼭 한번 다루고 싶었던 주제입니다. 신화를 주제로 쓴 다른 책들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별자리를 중심으로 엮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신화를 쓰고 싶었어요. 물론 신화에서 단순한 스토리 이상을 읽고 싶은 청소년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요.
자기 별자리에 얽힌 신화를 찾아 읽다가 실망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아요.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이 책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별자리에 따른 성격 유형을 믿는 것 같아요. 점성술의 영향이겠지요. 점성술은 천체 현상을 관측하여 인간의 운명과 미래를 예측하는 미신에 가까운 것으로, 그냥 재미삼아 보는 거지요. 점성술과 천문학을 같은 줄기에서 나왔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둘은 전혀 관계가 없어요. 그래서 이 책에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독자들이 별자리 신화를 통해 그 안에 담긴 인문학적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혹은 저의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보고 나름대로 신화를 해석하면서 읽기를 기대합니다.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우리의 삶과 연결해보면 더 실감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스 로마 신화 또는 신화를 모티프로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을 감상할 때 현재의 시각에서는 불편함이 느껴지는 장면도 있습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
오랜 미술사를 통해 여성의 강탈, 납치, 약탈혼을 미화한 예술작품들이 정말 많아요. 이른바 그리스 시대의 ‘소년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들 역시 오늘날의 가치관과 성인지 감수성으로 보면 매우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런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것들도 인류의 역사입니다. 미술작품들은 각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고 예술가도 그 시대의 사회적 가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다산과 풍요를 염원하는 원시사회에서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심하게 비만한 여성의 몸을 아름답다고 인식했어요. 현대의 미인과 거리가 멀다 해서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과거의 유산이 오늘날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다고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독선적인 태도 아닐까요?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사회문화적 배경과 조형적, 미학적 측면에 대한 이해가 함께 필요합니다. 만약 여성 강탈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라면, 그 작품의 가치를 완전히 폄훼하기보다는 작품이 지닌 시대적 특성을 이해하되 합리적인 비판의식을 가지고 감상하는 게 낫겠지요.
신화는 오랫동안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었고, 현대 작가들도 예외는 아닐 듯합니다. 아쉽게도 이 책에 담지 못한 현대작가의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책에 담고 싶은 현대 작가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현실적 여건 때문에 아쉽게도 싣지 못했어요. 먼저 피카소의 <제우스와 유로파>라는 큐비즘 양식의 멋진 그림이 있습니다. 피카소는 모더니즘의 선구자지만 전통적인 신화 주제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작품의 소재로 많이 사용했어요. 어떻게 보면, 피카소는 수많은 연인을 가졌던 제우스와 많이 닮았지요. 미술사에서 신적인 숭배를 받는 피카소는 제우스를 연상시킵니다. 그는 여성들을 유혹했고 끊임없이 다른 여성에게로 관심이 옮겨갔으며, 여성들은 이 예술가 신의 매력에 굴복했지요.
소개하고 싶은 또 다른 작가는 ‘레다와 백조’ 모티프를 추상표현주의적 언어로 표현한 사이 톰블리입니다. 화가는 얼핏 뒤죽박죽의 낙서처럼 보이는 그림을 통해 요란스럽게 푸닥거리는 날갯짓 속에서 이루어지는 열정적인 사랑을 묘사하려 했어요. 조형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최근 들어 별자리와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요. 관련 책들도 많이 나왔고요. 사람들은 왜 별과 우주를 이토록 궁금해하고 사랑하는 걸까요?
과학자들은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별먼지로부터 생겨난 존재들이며, 별과 인간이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한 몸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때가 되면 태초에 우리의 기원이었던 원래의 성간 물질로 되돌아가 우주를 떠돌다 다른 별을 생성하는 재료가 될 것이라고요. 우리의 고향인 셈이지요. 또한, 인간은 형이상학적 사고를 하는 영적인 존재잖아요?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삶의 시간 동안 매일 매시간 하찮은 일에 매달리고 집착하고 고통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별과 우주의 세계에 시선을 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궁금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림 속 별자리 신화』를 읽을 독자들에게 한 말씀해 주신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영롱한 의미들과 무궁무진한 상징이 숨겨져 있습니다. 서구문명의 원류이기도 하니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이기도 하고요. 신화 속에 숨은 보물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이따금씩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아보며 잠시라도 번잡한 세상사에서 벗어나 인류의 고향을 느껴보시기를 기원합니다.
*김선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역사를, 동대학원에서 미술사와 현대미술을 공부했다. 미술사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며 글을 써오던 중 한국천문연구원 웹진에 게재한 짧은 글 「명화 속 별자리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천문학자 남편 김현구 박사와 함께 『그림 속 천문학』을 출간했다. 별과 우주를 사랑한 화가들의 삶과 그림을 살펴보고 그 속에 담긴 천문학적 요소를 찾아 흥미롭게 엮어낸 책이다. ‘미술사에서 사라진 여성 미술가들’로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이 연재를 묶고 보완해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를 출간했다. 2020년부터 《한국일보》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예술가들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하는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를 연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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