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2일, 다프트 펑크(Daft Punk) 공식 계정에 '에필로그(Epilogue)'라는 이름의 영상이 게시됐다. 8분 남짓의 길이 속, 자체 제작한 영화 <다프트 펑크의 일렉트로마>(2006)에서 토마스가 자폭을 택하는 후반부 장면과
처음에는 의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그리고 동시에 그간 고수해온 신비주의만큼이나 다프트 펑크스러운 해체 선언이었다. 1993년 첫 싱글을 시작으로 그래미 어워드 5관왕의 신화를 거머쥐고, 전 세계를 호령하는 뮤지션으로 거듭난 전설적인 프랑스 일렉트로니카 듀오의 28년 행보는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렸다.
토마스 방갈테르(Thomas Bangalter; 이하 토마스)와 기마누엘 드 오멩 크리스토(Guy-Manuel de Homem-Christo; 이하 기마누엘)로 구성된 다프트 펑크가 거쳐온 음악적 분기점을 짚어본다. 설명을 도울 열 곡도 마련했다. 단순 전자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여러 장르와의 교류를 일궈내고 독특한 페르소나를 제시한 아티스트인 만큼 긴 역사를 추리는데 한없이 부족한 숫자일 수도 있다. 다만 이들을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다소 성기더라도 견고한 틀의 입문서가, 그리고 같은 세대를 겪으며 성장한 이에게는 오랜만에 다시 한번 이어폰을 집어들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펑크(Punk)에서 훵크(Funk)로
첫 발자국은 록이었다. 파리의 한 중학교에서 만나 친해진 토마스와 기마누엘은 훗날 피닉스(Phoenix)의 멤버 로랑 브랑코위츠(Laurent Brancowitz)와 함께 3인조 록 밴드 달링(Darlin')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물론 처음부터 주목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쏟아진 것은 비판이었다. 당시 이들은 비치 보이스의 커버곡을 전전하던 아마추어에 불과했고, 발표한 데모곡은 설상가상으로 영국의 평론지 <멜로디 메이커>에 의해 ‘멍청한 펑크록(Daft Punky Thrash)’ 이라는 처참한 혹평을 받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일화지만, 이 발언은 현재의 그룹명인 '다프트 펑크'가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부정적 낙인을 되려 전면에 걸어 버리며 돌파를 감행한 셈이다. 로랑을 제외한 둘은 과감히 기타를 내려놓고, 1990년대 중반부터 유럽과 영국을 강타한 테크노 열풍에 힘입어 그것보다 조금 더 앞선 1980년대 하우스(House) 음악으로의 노선을 택한다. 그리고 둔탁한 드럼 머신의 박자감과 신시사이저의 애시드(Acid) 효과를 화려하게 섞은 결정적 싱글 ‘Da funk’ 를 발표하며 전세를 뒤집기 시작한다. 쟝 미셸 자르(Jean Michel Jarre) 이후 프랑스 전자 음악계의 명성을 이을 충격적인 신인의 탄생이었다.
이후 버진(Virgin) 레이블과 계약을 마친 스무 살 초반의 다프트 펑크는 젊은 패기와 넘치는 영감을 날것의 전자음으로 구체화한 첫 정규작
인간을 사랑한 로봇
‘ One more time’ ,
‘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 ,
‘ Something about us’ ,
데뷔작이 클럽 신에서의 프렌치 하우스(French House) 부흥을 알렸다면, 그로부터 4년 후 접근성을 가득 머금은
이런 노하우의 산물이 바로 ‘One more time’ 이었다. ‘춤을 멈출 수 없다’ 는 노랫말처럼, 빌보드 댄스 차트의 정상으로 도약한 곡의 승승장구는 걷잡을 수 없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은하철도 999>의 작가 ‘마츠모토 메이지’ 가 전 트랙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 <인터스텔라 5555>가 주어지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전폭적인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전성기가 찾아온 것이다.
상업적 성공을 가져온 곡이 ‘One more time’ 이라면, 장기적 관점에서 전지구적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것은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 였다. 몇 가지 단어로 이뤄진 짧은 문장으로 얽힌 가사와 이에 톱니처럼 상응하고 현란하게 움직이는 훵크(Funk) 사운드가 자리한 이 곡은 특유의 리듬감과 재치 있는 노랫말로 흥미를 끌며 수많은 패러디 영상을 낳았다. 물론 두 곡과 더불어 앨범의 모든 트랙이 과거 타 아티스트의 곡을 절묘하게 짜깁기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후에 밝혀지면서 큰 논란을 낳기도 했지만, 이를 감안할 만큼의 놀라운 샘플링 실력이 주목받으면서 되레 명반으로 칭송받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한다. 훗날 2007년, 카니예 웨스트는 이 곡을 다시 한번 샘플링하며, 일렉트로닉과 힙합의 극적 조우를 성사시킨 ‘Stronger’ 를 통해 입지적 성공을 거둔다.
‘지금이 알맞은 시간이 아닐지 몰라
내가 걸맞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무언가 있어...’ – ‘Something about us’ 中
그들은 인간과 기계의 조화를 꿈꿨다. 초기 전자 음악의 시대를 연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의
시도와 실패, 그리고 부활
‘ Television rules the nation / Crescendolls’ ,
뼈대만 남은 기괴한 꼭두각시 인형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단조로움 속 반복되는 인간의 삶을 풍자하듯 읊는다. 다소 당혹스러운 ‘Technologic’ 의 그로테스크한 단상이다. 음악적 조명은 여전히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 를 비추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어감이 조금 다른 ‘인류와 기술’ 이 빚어낸 마찰이었다.
2005년 등장한 3집
음반은 출시 한 달 만에 골드 인증을 따내며 승승장구했고, ‘Robot rock’ 은 댄스 차트에서 상위권을 거두었으며, ‘Technologic’ 은 아이팟 광고 음악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신선함이 낳은 주목은 일시적 현상에 그쳤다. 이들이 건설한 디스토피아는 철학 면에서는 비약이었을지 몰라도 조악한 사운드와 부족한 내실로 더 이상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사람들은 등을 돌려버렸고, 앨범은 잊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혹평을 그룹 이름으로 내건 그룹인 만큼, 다프트 펑크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집요한 자존심이 있었다. 대중과 평단의 외면 가운데 절치부심의 자세로 칼을 갈았다. 그리고 라이브 실황을 담은 ‘Alive’ 시리즈의 다음 행선지
결과적으로 그들은 다소 저평가 받던 3집을 주축으로 다시 한번 판을 뒤집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그리고 영원히 저장되기 위하여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다시 ‘인간성’ 에 주목했다. 정규 4집
다프트 펑크는 도나 섬머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를 호출했다.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밴드 스트록스의 줄리안 카사블랑카스와 사이키델릭 밴드 애니멀 콜렉티브(Animal Collective) 출신의 판다 베어(Panda Bear), 그리고 소프트 록 뮤지션 폴 윌리엄스(Paul Williams) 등 많은 아티스트가 이 순간을 축복하듯 모여들었다. 그리고 세계 역시 그들을 주목했다. ‘Get lucky'는 빌보드 핫 100의 2위에 랭크되며 밴드 역사상 최고의 영예를 가져다주었다.
여러 방면에서도 꾸준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렇기에 많은 곳에서 그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2010년, 듀오는 게임 프로그램 속 세계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 <트론 : 새로운 시작>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하며, 8비트 전자오락의 그리드를 화려하게 독주하는 ‘Derezzed'부터 <블레이드 러너>의 여운을 연상케 하는 ‘End title’의 오케스트라 세션까지의 범주를 거뜬히 소화한다. 또한 카니예 웨스트와 재회하며 2013년에는 실험적인
다프트 펑크가 펼친 음악적 세계는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제 듀오의 마지막 작품이 된
현재까지도 정확한 해체 이유조차 공식 석상에서 발표된 바 없기에 이들의 해체가 더욱 아리게 다가온다. 토마스와 기마누엘의 음악이 영면에 이르는 것은 아니어도 이제 더는 ‘다프트 펑크’ 라는 이름으로 역사가 쓰일 일이 없다는 것도 슬픈 사실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들이 남긴 음악만큼은 영원히 우리 곁에 남으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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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골아
2021.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