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성준은 MBC애드컴, TBWA/Korea 등 광고대행사에서 20년 넘도록 카피라이터로 일했지만 언제나 광고보다는 노는 걸 좋아했다. '카피보다 재미있는 글'을 써보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자발적 백수의 길로 들어섰다. 80년 된 작은 한옥을 사서 고친 뒤 '성북동 소행성(小幸星)'이란 문패를 붙이고 출판기획자인 아내, 고양이 순자와 함께 산다. 늦게 만나 동거하고 결혼했던 부부의 시트콤 같은 에피소드들과 남편의 실수담으로 가득한 책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를 썼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하지만 가능하다면 새벽에 혼자 일어나 오전 11시까지 느리게 읽고 쓰며 즐기는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 볼 생각이다.
책의 재미를 느꼈던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저는 점심시간에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축구를 하는 어린이는 아니었습니다. 뛰어노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는 게 자연스러웠죠. 초등학교 6학년 때 용돈을 모아 샀던 조흔파나 오영민의 코믹 소설들이 개인 독서의 시작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러다가 리처드 F. 버튼이 쓴 『아라비안 나이트』가 그렇게 야한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된 뒤부터는 어른들이 읽는 책까지 탐독하게 되었죠.
책 읽는 시간은 작가님께 왜 소중한가요?
책은 '잘 정리된 생각'을 모아 놓은 보물상자라 생각됩니다. 언제든지 책을 열기만 하면 아낌없이 제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니까요. 그래서 후진 책을 만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약속을 어긴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요즘은 스마트폰 때문에 자투리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데, 특히 생각나는 대로 마구 올린 SNS의 조각글들이나 인터넷 댓글은 읽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로감을 선사합니다. 책은 이처럼 정제되지 않은 글을 읽는 피곤함으로부터 저를 구출해줍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내가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도 좋고요.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단독으로 세상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도 더 활발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작가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관심사와 관계하여 읽을 계획인 책이 있나요?
SF가 점점 좋아집니다. 제가 SF를 좋아하는 이유는 평소 상상하지 못했던 영생이나 로봇, 삶의 형태 변환 등 극적 상황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테드 창이나 켄 리우의 밀도 높은 단편들을 좋아하고 배명훈이나 김보영, 정세랑 같은 국내 작가의 소설들을 오래 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존 스칼지처럼 입담 좋고 자유분방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작가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최근엔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근작과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코로나 19가 모두의 삶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어차피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핑계 김에 앞으로만 질주하던 삶을 잠시 멈추고 내 인생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쓴 책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는 제목과 달리 노는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다르게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그동안의 고민과 실천을 다루고 있습니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은 다르다, 좀 바보 같이 살아도 된다, 실수담이 많은 사람이 부자다, 라는 주장들은 물론 저희 부부가 만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시트콤 같은 에피소드와 삶을 대하는 방식들이 독자들에게 보편적 공감을 얻는다면 기쁘겠습니다. 아울러 제 책을 읽고 '나도 글을 써보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든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저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에 사는 올리브는 덩치 크고 성격도 친절하지 않은 고등학교 수학 선생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주변 인물들과 펼쳐내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재미있고 가슴 찡할 수가 없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어딘가 좀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알고 있는 작가다. 소설로 성공하지 못할 걸 대비해서 한때 변호사로도 활약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소설가가 된 케이스인데, 다행히 그녀가 변호사로 성공하지 못한 덕분에 우리가 이런 멋진 소설을 읽게 되었다.
신형철 저
잘 쓴 글에 대한 정의는 취향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좋은 글에는 '품격'과 '깊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신형철만큼 밀도 높은 문장을 구사하는 평론가는 없는 듯하다. 그의 책들을 모두 좋아하지만 맨 처음 접했던 『몰락의 에티카』를 잊을 수 없다. 심오한 고민들을 담고 있으면서도 번역 문장에서 부딪히던 난해하고 낯선 표현들이 없어서 좋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시인들이 새 책을 낼 때면 그의 평론을 줄 서서 기다린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궁금하다면, 지금 당장 신형철의 평론집을 하나 사서 읽어보시기 바란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저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다 보면 글은 무거워지기 쉽다. 반면에 아무렇게나 펜을 놀리며 가볍게 쓰면서도 유치하지 않게 보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해낸다. 9·11테러 때 무역센터 빌딩에서 아빠를 잃은 아홉 살 소년 오스카와 2차대전 때 독일 드레스덴 폭격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할아버지 이야기가 교차되는 이 소설은 대담한 기획과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을 통해 전에 겪어보지 못한 신선한 감동을 선사힌다. 아무래도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은 수 없게 뛰어난' 문학 신동 포어는 요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나 『우리가 날씨다』 같은 책을 통해 환경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장석주 저
장석주는 한때 백만 권이 넘게 팔린 시집을 낸 출판사 사장이었지만 어느 날 모든 걸 정리하고 연고도 없는 시골로 내려가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그때의 고독과 평화와 즐거움에 대해 쓴 책이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다. 그는 말한다. “글쓰기란 은퇴해서 연금생활자 같이 놀멍쉬멍 쓰는 게 아니라 매미가 맹렬하게 울듯이 하는 노동이다.”라고.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도 마음이 답답해지면 나는 이 책을 꺼내 읽는다. 그러면 조금 나아진다. 진짜다.
아사다 지로 저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사무라이보다는 샐러리맨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피에 대한 굶주림이나 대의명분 대신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칼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찌질한 이야기 속에 엄청난 감동이 숨어 있다니. 아사다 지로의 이 소설을 처음 읽고 많이 울었다. 그는 ‘몰락한 명문가의 자제들이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라는 말을 듣고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가 그 낭설을 곧이곧대로 믿는 바람에 우리는 이런 멋진 소설을 읽게 되었으니.
앤드루 포터 저
제목이 너무 딱딱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으나 막상 읽기 시작하자 너무 재미있어서 ‘단편소설을 이렇게 잘 쓸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던 소설집이다. 이상하지만 이해하고 싶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사랑스러운 인간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다 훌륭하지만 특히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머킨」이라는 단편이 개인적으로 제일 좋다.
정혜신 저
세월호 참사나 쌍용차 해고자 사태에서 보여준 정혜신 이명수 커플의 의연함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을 통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게 되었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도 얻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고 싶다면 물어야 한다. 다만 건성으로 묻지 않고 정말 호기심을 가지고 사소한 부분까지 마음으로 느끼면서 세세하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옳다” 고, “당신의 마음이 옳다” 고 공감해 주어야 한다. 그게 정혜신 이명수가 말하는 적정심리학이고 마음이 병든 주위 사람을 살리는 결정적인 한 마디다. 누구나 곁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다시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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