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를 ‘좌파’라 여기며 살아왔다. 좌파란 강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기존 체제를 바꾸려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약자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정착시키려 애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진영에 속하는 멋진 인물이라고.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나는 부단히 깨어 기존의 제도를 의심하고, 원래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명제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상황상 가장 약자인 사람의 입장에서 사안을 들여다보아야한다고 되뇌며 살아왔다.
이런 내 성향이 내가 ‘몹시 양심적이고 바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프랭크 설로웨이의 『타고난 반항아』를 읽었을 때다. 그 책은 세상의 모든 혁명가, 체제 변혁가들이 대부분 동기간 서열에서 둘째 이하였다는 논지를 펼치는데, 그 책에 나오는 둘째 이하들이 드러내는 특성이 나와 너무 비슷했다. 저자에 따르면 둘째 이하 서열의 인물들이 기존의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제도로 바꾸려 하는 이유는 탄생의 순간부터 기존의 제도들이 동기간 서열 1순위, 즉 첫째아이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가 사회가 이룩해놓은 기존 관습과 제도에 호의적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태어나자마자 가족 내의 유일한 아이로 군림하며 금이야 옥이야 대접을 받았던 첫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호의적이 되고, 태어나자마자 기존에 존재하던 첫째와 부모의 시간과 재화를 놓고 다투어야 했던 둘째는 매순간 전투적으로 달려들어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만 자기 몫을 챙길 수 있었기에 기존 체제(첫째 중심적으로 굴러가는)에 반감을 품고 어떻게든 뒤집으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것. 책에 나오는 내용 모두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내 모습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는 면에서 임팩트가 큰 책이었다. 나의 반골 기질이 내가 유난히 훌륭한 성정이어서가 아니라 나의 출생순위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왔고, 기존 제도를 뒤엎는 것이 언제나 ‘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뒤이어 왔다.
다음으로 나의 농후한 반골기질에 대한 자부심을 꺾게 만든 것은 ‘귀스타브 르 봉’이라는 프랑스 사회학자였다. 그가 쓴 『군중심리』가 소름 끼치게 재미있어서 그 여파로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심리학』, 『사회주의의 심리학』을 연달아 읽었는데, 후자의 두 권이 자신을 좌파라 믿고 좌파를 선함의 대명사로 인식하며 살아왔던 나라는 인간의 명치를 거세게 후려쳤다. 귀스타브 르 봉은 프랑스 혁명을 인류에게 있었던 최악의 사건으로 꼽는다. 좌파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은 제도가 바뀌면 사회가 바뀌리라고 쉽게 믿어버리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냉철한 저자가 말하는 핵심 메시지다. 사람은 제도, 즉 이성과 합리에 의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바꿔놓는 건 언제나 정념, 감정, 충동과 같은 비이성적인 덩어리였다. 역사상 커다란 변혁은 언제나 그럴싸한 선한 명제를 내건 상태에서 시작되었으나 실상 그 움직임을 추동한 것은 언제나 몇몇 인사들의 은밀한 욕망 혹은 정념 덩어리였다. 그런데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이성과 합리로 사람을 바꿀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오랜 세월 지속되어온 제도를 전부 갈아엎어버리는 어마어마한 오류를 저질렀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사람들은 바뀌기는커녕 이전 체제의 습속을 끈질기게 지니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재빨리 예전의 제도로 돌아가버렸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로 인해 역사가 바뀌는 데에는 가시적, 비가시적인 수많은 요인이 작용하게 마련인데, 혁명가들은 사람이라는 종을 너무 단순하게 치부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그리하여 혁명은 언제나 그전보다 더 추하고 악한 상태로 사회를 타락시키는 결과로 이어졌고, 특히 사회주의 혁명의 말로가 그 중 가장 추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다분히 호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책이었다. 나는 그 극적인 특성 때문에 프랑스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 엄청난 매력을 느껴왔고, 그에 관련된 책은 족족 찾아서 다 읽었다. 그러므로 혁명과 혁명에 얽힌 인물들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찾아서 다 읽었다는 건 내 생각일 뿐 실은 그 사건들에 대해 매우 좋은 평가를 내리는 책들만 읽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허억! 혁명을...이런 관점에서도 볼 수 있구나!
물론 나는 여전히 프랑스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지닌 의미에 꽤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혁명의 과정에서 대규모의 인명살상이 있었고, 매번 극단주의자가 승리하여 상황을 망쳐버렸지만, 인류 역사라는 장대한 범주에서 볼 때 혁명은, 특히 프랑스 혁명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징, 어떤 희망으로 자리잡아 퍼올려도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인류 발전의 샘이 되었다는 면에서. 그것이 실제 그 당시 혁명이 지녔던 근본적인 성격보다는 후대가 그 혁명을 기억하는 방식에서 흘러나온 샘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음으로써, 혁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에서 빠져나와 그 이면을 보게 되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다. 인간이 단번에 뭔가를 바꾸려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인간이 의도를 갖고 시작한 일이 중간에 어떤 변모를 거치게 되는지에 시선을 두게 된 것이다.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은 이런 내 마음의 변동과 혼란에 논리를 부여해 준 책이다. 프랭크 설로웨이와 귀스타브 르 봉의 저서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옳다’ 여겨왔던 확신이 흔들렸다면, 『바른 마음』으로 내가 왜 ‘나는 옳고 남들은 그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지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뭔가를 옳다 그르다 판단할 때 사람은 이성보다 직관을 따른다. 가치평가를 요구하는 한 사안이 발생하면 어느 편이 옳은지 냉철하게 따져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한 쪽에 확 끌려간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그렇게 끌리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뒤, 비로소 논리를 찾는다. 자신이 (왠지는 모르지만) 옳다고 생각했던 명제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주는 논리들을 뒤늦게 열렬히 찾아 갖다붙이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을 빠르게 선택하게 만드는 강력한 직관을 ‘코끼리’로, 그 직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직관을 정당화해주고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논리적 추론을 ‘기수’로 비유한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코끼리이며, 직관은 코끼리의 신하, 혹은 공보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라톤과 칸트, 흄 같은 유명 철학자들의 이름이 간간히 튀어나오는 이 두툼한 책을 따라가다보면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깨달음으로 뇌에 빛이 들어오는 순간을 맛보기도 한다. 돌아보면 그동안 나만 옳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면서 살아왔다. 이렇게 뚜렷하게 보이는 ‘옳음’을 대체 왜 저들은 보지 못할까? 생각하며 가슴을 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책에는 그런 내 모습을 그대로 묘사해놓은 듯한 장면이 많이 나왔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들을 거친 뒤 나는 생각했다. 그게 다 나의 기질이고 직관이었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었구나!
좌파에 속하는 이들은 ‘평등’과 ‘자유’를 중요시하고, 우파에 속하는 사람은 ‘평등’과 ‘자유’ 뿐만 아니라 ‘충성심’, ‘권위’, ‘고귀함’을 포함한 다섯 가지 도덕적 기반을 중시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장은 가장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좌파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개인의 존엄을 중요시하고 공동체의 존속에 중요한 요소인 충성심이나 고귀함 같은 가치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왜 보수라 불리는 쪽에 이끌리는지 이해가 갔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치솟았다.
물론 공동체 유지의 이점과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공동체’의 밑바탕이 된다는 충성심과 권위, 고귀함의 개념에는 당연한 듯 계층과 성별에 대한 차별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가? 특정 계층과 특정 성별의 희생을 밑바탕으로 설계된 충성심과 권위의 개념을 어떻게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덥썩 받아들인단 말인가? 작가가 그 부분을 완전히 간과한 것은 아니었으나, 큰 범주로 봤을 때 그 부분은 일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지나가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좌파가 평등과 자유라는 가치에 골몰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기본 개념들에 서린 이런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가족 공동체’를 굴러가게 하는 충성심과 권위, 고귀함에는 늘 여성의 희생이 기본값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사회는 여성들이 부엌에 모여 가사일을 도맡아야만 가족의 화합과 의례가 지켜진다고 여겼다. 여성들은 이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다가도 ‘공동체를 위해 너 하나 희생하면 될 것을!’이라는 강력한 명제 앞에 번번이 고개를 수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런 불합리한 부분을 개선하려면 ‘충성심’과 ‘권위’보다는 일단 인간이면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하고 압제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부터 관철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런 뒤에 새로운 공동체 개념, 새로운 충성심과 권위 개념을 창출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순환논리에 빠져들어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니 이 책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감동 받은 책으로 분류할 수는 없으리라. 그보다는 수많은 생각을 양산하며 나를 흔드는 책, 좌파와 우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천착하면서 작가와 치열하게 논의를 벌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책이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가장 큰 장점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을 근본에서부터 차근차근 되짚어보게 된다는 점이고, 이 책은 그런 역할을 차고 넘치게 해냈다. 당위로 여겼던 모든 것을 의심하고 톺아보게 만들었으므로.
책을 덮은 지금은, 어쩌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고정된 정체성이 허상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쪽의 성향을 더 강하게 품고 갈 수는 있겠지만, 결국 사회적 의제 하나하나에 신중하고 복합적인 고려로 대응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 아닐까. 다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앞으로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만나도 내가 상대를 ‘꼴통’이라 비하하고 귀를 닫아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귀를 닫기보다, 상대에 대해 알아보려 애쓸 것이다. 상대도 나처럼 고유의 역사와 삶의 경로를 거쳐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테니, 그가 지나온 길들에 무엇이 놓여 있었는지, 그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을 겪으며 살아왔는지 들여다보려 노력할 것이다. 그런 내 기운이 건너가면 상대방도 귀를 열면서 내 지나온 역사와 행로를 알아보려 노력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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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