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영은 2006년 작가가 되었고, 소설 『스캔들』, 『달팽이들』 등을 썼다. 그의 글쓰기 재능은 논픽션에도 빛을 발한다. 버려진 개들에 대한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에서 최근작인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화두를 친밀한 문장으로 풀어냈다.
책의 재미를 느꼈던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책 읽는 것을 좋아하셨던 엄마는 제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사주셨어요. 책을 읽으면 여기가 아닌 전혀 다른 세상으로 떠날 수 있고, 제가 아닌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시기였어요. 저는 초록 지붕 집에 입양된 빨간 머리 앤이었고, 부잣집 딸이었다가 다락방의 하녀로 전락한 세라였으며, 은신처에 숨어서 비밀일기를 쓰는 유대인 소녀 안네였어요. 아주 어릴 때에는 주로 동화를 읽었지만 나중에는 소설, 논픽션, 전기, 역사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었습니다.
발레를 전공하고 입시를 준비하면서 책과 차츰 멀어졌어요. 학업과 연습을 병행하려면 늘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그러다 다시 책을 읽은 것은 대학을 졸업한 뒤였어요.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문학 수업을 들으러 갔죠. 첫 강독 수업 때 교수님이 그 학기에 읽어야 할 책들을 알려주셨는데 제가 읽은 책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때부터 연대별, 작가별, 나라별로 조금은 체계적인 독서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책 읽는 시간은 작가님께 왜 소중한가요?
움베르트 에코는 『책으로 천 년을 사는 방법』에서 “문맹인 사람(또는 문맹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삶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라고 말했어요. 어릴 때 책 읽기를 좋아했던 이유는 책을 통해 다른 세상에 산다는 느낌, 다른 사람이 되는 감각이 좋아서였던 것 같아요. 그때 저는 어렸지만, 에코의 말처럼, 제가 이미 다양한 삶을 산 것처럼 느꼈어요.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저의 ‘모름’을 돌아보게 됩니다. 최근에 이라영 예술사회학자의 책을 연이어 읽고 있는데 『타락한 저항』이라는 책에서 그는 반지성주의를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라 일컬어요. 저로서는 해석할 수 없었던 어떤 현상들을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답을 찾아 나가려고 하죠. 또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요. 다른 작가들이 쓴 사유의 결과물을 읽으면서 나의 경험을 관습적 사고가 아닌 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방법을 터득해요. 나아가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특권을 의식하며 타자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고민하기도 하죠. 누군가의 말처럼, 삶을 바꾸는 것은 오직 앎에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작가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관심사와 관계하여 읽을 계획인 책이 있나요?
지난해부터 여성들의 사유와 서사가 담긴 글을 주로 읽고 있어요. 정희진, 권김현영, 강남순, 이라영, 도나 해러웨이, 록산 게이, 마거릿 애트우드 같은 작가들이요. 이 책들을 통해 저의 경험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겪은 폭력의 상처, 뿌리 깊은 자기혐오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고요. 『김지은입니다』와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아주 오래된 유죄』 등을 사놓고 마음이 괴로워서 못 읽고 있었는데 이제 읽으려고요. 외면하지 않고 현실을 대면하는 것이 연대와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작과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신작인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제가 거쳐 온 집들에 대해 쓴 에세이예요. 저는 이 책을 ‘집을 통해 본 한 여성의 성장기’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집과 여성, 집과 가족, 집과 독립, 집과 계급 등 집에 관한 다층적인 의미를 제 개인사와 당시의 사회상을 엮어서 풀어보려고 노력했어요. ‘작가의 말’에서 “자전적인 이야기지만 집이라는 ‘물리적 장소’ 안에서 여성의 ‘상징적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고, “이 시도를 통해 나의 이야기가 타자의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연결성을 소망했다”고 썼는데요,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이 저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집과 삶을 반추하고, 과거의 자신을 만나 화해와 위로를 건네기 바라요.
조지프 브로드스키 저
러시아의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겨울마다 베네치아에서 한 달 정도를 머무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일곱 번의 겨울을 보낸 뒤 베네치아에 관해 쓴 글이 『베네치아의 겨울빛』입니다. 이 에세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오랫동안 면밀히 관찰해본 사람만이 포착할 수 있는 섬세한 시선이 담겨 있어요. 그는 겨울을 “추상적인 계절”이라고 정의하며 “저온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말합니다. 오래 전 제가 베네치아에 갔던 때는 여름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베네치아의 겨울을, 눈이 내리고 안개가 자욱한 도시를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박소영 저
사회부 기자인 박소영 작가는 “모든 동물이 구원받을 날”을 꿈꾸는 동물 구호가이기도 합니다. 캣맘으로서 열다섯 군데가 넘는 길고양이의 밥자리를 챙기는 그의 일상은 분투 그 자체지요. 그것은 고단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받는 일이자 마음에 묻는 동물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일입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사회는 비정하고 참혹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사랑하기에’ 삶을, 세계를, 존재를 긍정합니다. ‘사랑하기에’ 실천하고 행동하고 기어이 살리지요.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동물과, 동물을 살리는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히샴 마타르 저
이야기는 2012년 카이로 국제공항에서 한 남성이 리비아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남자는 죽었을지도,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려는 참이지요. 아버지는 카다피 정권의 반체제 인사로서 1990년 비밀경찰에 체포된 뒤 악명 높은 아부살림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6년 뒤 아부살림에서 1270명의 정치범이 학살당한 날,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보았다는 증언과 그날 이후에도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는 모순된 증언이 들려옵니다. 2011년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고 정치범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합니다.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품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여정에는 슬픔, 상실, 기대, 체념, 그리움, 애절함이 공존합니다. 이 책은 한 가족의 서사와 함께 시대의 비극을, 끝내 귀환하고 마는 진실을 증언합니다. 때로 논픽션의 힘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어떤 픽션으로도 대체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백수린 저
몇 년 전부터 백수린 작가님의 작품을 추천하는 말을 여러 곳에서 들었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출간된 이 소설집을 통해 백수린 작가님의 소설을 처음 접했어요. 엄청난 사건이 있거나 휘몰아치는 절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책을 읽고 나자 마음이 크게 휘청거렸습니다. 「시간의 궤적」의 화자가 ‘언니’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은 것은 제가 이 소설에 대해 느낀 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어떤 이와 주고받은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제가 읽은 가장 강렬한 소설이었습니다. 짧고 건조한 문장들이 그려내는 부조리는 담담해서 더 불편하고, 무감해서 더 충격적이었지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출간되고 12년 뒤에 발표된 『문맹』은 작가의 언어적 정체성과 함께, 첫 작품의 뿌리와 배경을 짐작하게 합니다. “독서라는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린 네 살 무렵부터 결혼 후 낯선 나라에 정착하기까지, 그가 언어를 가지고 잃고 다시 가지는 경험은 한 사람의 문맹자이자 이방인이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작가로 거듭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작가가 지금껏 그려온 서사의 기원을 탐색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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