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보이 음악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어눌한 발성에서 태어난 독창적인 래핑, 다른 하나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유동성'이다. 비록 그를 바라볼 때 우주비행(WYBH) 크루의 대표 이미지와 방송 매체에 비친 장난기 어린 캐릭터에 시선이 갇히는 경향이 있지만, 순수 개인 커리어의 영역을 파고든다면 단박에 수긍할 문장이다. 치명적이고 육감적인 감각의 내음부터 고도화된 기술로 가득한 기계 소리까지, 하나로 정의하기 힘든 세계관을 자행하면서도 매번 준수한 퀄리티를 입증해온 기리보이에게 '유동성'이란 단어는 마땅한 훈장처럼 보인다.
작년 10월 발매된 EP <영화같게>에 수록곡을 추가해 완성한 정규 8집 <9컷> 역시 탐험 정신의 연장이다. 본작의 테마는 절절한 발라드 넘버. 전작 <치명적인 앨범 III>의 '별이지고있다'와 '제설' 등을 전신으로 둔 뒤 OST 풍의 카테고리를 따라간다. 쌓아 올린 방대한 커리어에서 얻은 배경지식 역시 건재하다. 작풍을 암시하는 직관적인 제목, 정해진 기준 아래 단편이 묶인 구성. 그리고 드라마틱한 상황을 논하되 절대 우아하지만은 않은, 특유의 현실적인 연애의 치부를 다룬다는 점 역시 그가 꾸준히 주장해온 '찌질' 미학에 포함된 내용이다.
물론 여러 장르가 혼재하던 형식과 달리 진중함과 감성의 조합만을 전문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차이를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접근할 때 평소 사용하던 몽글몽글한 신시사이저 재료 대신 주제에 걸맞게 록 사운드와 현악 세션으로 교체했다는 점 역시 개성을 부여하는 영리한 요소다. 초반부 '사랑이었나 봐'와 '휴지'가 이러한 스타일을 대변하는 좋은 예시인데, 연애 다툼을 올림픽에 비유하는 등 재치 있는 비유로 본인 색채를 주입함과 동시에 더욱 간단하면서도 명확해진 멜로디와 가사 배치로 대중의 접근성까지 확보한다.
과거를 회상하는 '내자리'의 가사와 밴드 사운드를 활용한 전반적인 연출법에서는 2016년 작 '하루종일'이 밴드 버전으로 편곡되기까지 걸린 2년간의 시간적 흐름이 떠오르기도 한다. 결국 뻗어 나간 작법의 갈래는 작법뿐 아니라 어느 정도 본인의 성장도 가리키는 셈. 다만 새 페이지를 펼친 감각을 전부 끌어 올리기에 시간이 부족했던 탓일까, 피아노를 이용한 연결처 '인터루드' 이후 어쿠스틱 질감이 강조되는 후반부는 평범을 탈피하지 못하고 기시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번뜩이는 지점이 적다. 피처링 진은 의도대로 곡에 자연스레 녹아들지만 신선함을 피력하지 못하고, 결국 예전 작법의 그림자가 호출되는 '라식'에게 킬링 트랙의 역할을 내어주고 만다.
시중에 존재하는 스타일과 양상을 기리보이 식으로 정립한 모범적인 발라드 힙합이다. 다만, 대중성에 초점을 맞추고 무난함을 택한 탓에 커리어의 비약을 가져다줄 분기점보다는 여전히 도약을 꿈꾸며 안정적인 활주로를 달리는 듯하다. 일관된 기조 가운데 진행된 앨범의 통일성만큼은 발전적이나 이 역시 정리의 인상이 강하다. 물론 다작 아티스트가 짊어진 편견을 돌파하고 보컬과 래핑, 그리고 감각이라는 무기를 번갈아 꺼내 들며 또 한 번의 준수한 작업물을 만들어 냈다는 점. 그의 프로듀싱이 보증수표라는 데 반기를 들 사람은 도저히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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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