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자마자 부모와 이별했다. 보육원과 남의 집을 전전하며 고된 노동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불행에 자격이 있다면 이보다 적격일 수 있을까 싶지만, 비관보다 낙관을 선택한 어린아이. 긍정과 상상력의 상징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다. 넘어진 풀밭에서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앤의 모습에서 고집스러운 기쁨을 발견했다는 백영옥 작가. 빨강머리 앤은 백영옥 작가가 가장 힘들 때 찾는 ‘안전지대’다. 초록색 지붕집에 오기 전, 어린 앤의 이야기를 담은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으로 돌아온 백영옥 작가를 만났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매 순간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앤이 내게 온몸으로 보여준 진실이었다. (9p)
캐릭터 에세이, 계속 나오지 않을까요?
4년 만에 후속작이 나왔어요.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내면서 라디오를 시작했고 어쩌다 보니 방송을 많이 했어요. 주로 책 관련 프로그램이었고, 상담 프로그램도 했고요.
책을 매개로 활동 영역이 넓어진 건데 좋은 점과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아요.
방송이 아니면 만나기 힘든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작가로 혼자 일하다 보면 그런 기회가 많지 않거든요. 다른 필드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배웠죠. 반면에 어려웠던 건 그냥 너무 힘들었어요. (웃음) 조금 다른 의미의 번아웃을 겪은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2006년에 등단한 이후로 제대로 쉰 적이 없더라고요. 10년간 주말도 없이 일한 거예요. 편집자들이 저보고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최고의 워커홀릭이래요. 제 안에 쉬면 안 된다는 불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작이 베스트 셀러가 돼서 후속작을 내면서 부담감이 있었을 것 같아요.
부담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아무래도 전작을 읽은 분들이 이 책을 읽으실 테니까요. 그런데 그런 부담이나 걱정을 달고 살면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고요. 다만 항상 읽을만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요.
가장 힘들었을 때 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고요.
2006년도에 회사에 사표를 내고 몸이 망가졌을 때였어요. 두 달 동안 누워서 우유만 먹을 정도로 의욕이 바닥났을 때였는데 그때 유일하게 보고 싶었던 게 빨강머리 앤이었어요. 빨강머리 앤 비디오를 멍하게 보고 있으니까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너는 힘들 때 꼭 그거 보더라” 하더라고요. 예전에 중요한 인터뷰를 못 하게 된 날이 있었는데 그날도 집에 와서 빨강머리 앤을 봤대요. 힘든 순간에 붙잡는 끈이 다 다르잖아요. 저한테는 그게 앤이었던 거죠. 잘 모르다가 힘든 일을 겪고 알게 된 거예요.
그때 앤의 어떤 말을 들었는지 기억나나요?
앤이 그러잖아요. 실망하더라도 기대한다고요. 처음에는 그 말이 싫더라고요. 그때는 등단 전이었는데요. 매번 ‘이번에는 등단할 수 있을까’하고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죽을 것 같은 거예요. 같은 일이 반복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더 힘들더라고요. ‘아, 나의 이 재능 없음을 어떻게 하나’ 하고요. 그런데 앤이 자꾸 그런 말들을 하니까 혼자 생각해 보다가 한 번 써보자 싶었어요. 적으니까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실망하더라도 기대할래요’를 소리 내서 읽는 데 마치 앤이 나를 응원하는 것 같더라고요. 다시 해보자 싶었어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 출간된 이후 캐릭터 에세이 붐이 일었어요. 이런 현상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내고 ‘플란다스의 개가 하는 말’부터 ‘키다리 아저씨가 하는 말’까지 다 나오겠다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했는데 진짜 나와서 정말 놀랐어요. (웃음) 독자들이 예측 가능한 인물이 주는 확실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닌가 싶어요. 요즘은 사는 게 너무 불확실하잖아요. 그런데 앤을 비롯해서 우리가 하는 만화 속 주인공들은 너무 예측 가능한 인물이니까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는 거죠.
반대로 캐릭터 에세이가 인기 있다는 건 요즘 사람들에게 예측 가능한 존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네요.
그렇죠. 결혼하고 똑같다고 생각해요. 결혼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건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 주는 거거든요. 그게 작동하면 원만하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죠. 저 사람이 나한테 돌아올 거라는 신뢰가 있으면 그 사람이 어디서 무얼 하든 고통스럽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연인이 서로 사랑하는데 못 믿어요. 결혼하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안정감이잖아요. 내 편을 만들고 싶다는 거고 사랑을 찾아 헤매는 불안정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건데 그걸 표현하는 말이 예측 가능성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앤을 좋아하는 이유도 예측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싶고요.
모든 유행이 그렇지만, 계속되는 캐릭터 에세이의 인기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처음 냈을 때 그렇게 인기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캐릭터 에세이가 지금처럼 많이 나올 거라고도 예상 못 했고요. 그런데 사실 지금 하는 말은 전부 사후적인 거죠. 나오고 나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거고요. 앞으로도 이런 책들이 계속 나올 것 같아요. 일종의 시장이 된 게 아닐까 싶고요.
캐릭터 에세이라는 장르요?
그런 셈이죠. 요즘 아이들에게도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잖아요. ‘방귀 대장 뿡뿡’이라든가 ‘토마스’라든가 얼마나 많아요. 내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내 옆에 있었기 때문에 100% 의지하고 좋아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거든요.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 같은 친구요.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나오지 않을까요?
누구나 ‘빨강머리 앤’ 같을 수는 없지만
이번 책에는 앤이 초록색 지붕집에 오기 전의 이야기가 담겼어요. 가장 기억의 남는 어린 앤의 말이 있다면요?
가장 크게 와 닿은 건 ‘고집스러운 기쁨’에 관한 이야기예요. 책의 제일 처음에 넣은 이유도 그래서인데요. 살다 보면 안 좋은 일이 생기잖아요. 이별을 겪거나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여러 종류의 실패도 경험하고요. 그런데 결국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모든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노력하느냐 아니냐인 것 같더라고요.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로 들려요.
태도의 문제죠. 그러니까 고집스러운 기쁨과 자연스러운 기쁨이 다른데요. 맛있는 걸 먹거나 좋아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기쁨이잖아요. 그런데 고집스러운 기쁨은 그런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너무 슬픈 일이 있는데 그 와중에 밥을 하다가 밥통에서 나오는 밥 냄새를 맡고 위안을 받는다거나 지는 노을을 보면서 위안을 받는 거죠. 앤이 빨래가 바람에 날리는 걸 보면서 바람에 이름을 붙여 주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고집스러운 기쁨은 좋은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은 아니에요. ‘어떻게든 나는 행복을 선택할 거야’라는 다짐 같은 거죠. 앤은 넘어졌을 때도 네잎클로버를 발견하는 초긍정의 아이콘이잖아요. (웃음) 물론 누구나 앤 같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태어나진 않아요. 앤은 타고난 거죠.
타고나지 않은 사람도 할 수는 있는 거죠?(웃음)
낙천성과 낙관은 다른 것 같아요. 낙천성은 타고나야 하지만 낙관은 일정 정도의 훈련으로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걸 해보자는 거예요. 자연스러운 기쁨 말고 고집스러운 기쁨, 행복 쪽으로 나를 가져다 놓는 연습이요. 불행 속에 자신을 던져 놓지 않겠다는 다짐이나 사명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좋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야 어른 같아요. 그런 사람이 그나마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고요. 그저 남 탓하고 ‘내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만 하면 자기 성장으로 이어질 수 없거든요.
결국 자신을 위한 태도가 아니라는 거네요.
그렇죠. 그래서 건강한 방어 기제를 갖는 게 중요해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방어하잖아요. 투사하기도 하고 회피하기도 하고 다양한데 앤의 방어기제는 유머와 상상이죠.
작가님의 방어 기제는 뭔가요? 앤과 비슷한가요?
저한테는 안전핀이 있는데요. 소설이에요. 힘든 일을 겪으면 ‘내가 이 일을 이겨내고 나면 한 권의 소설이 나올 거야’ 하고 생각하거든요. (웃음) 이게 제 마음의 안전지대예요. 대개의 작가는 소설을 쓰고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요. 그 캐릭터와 시대를 살기 때문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죠.
SNS를 안 한다고요. 지금도 마찬가지인가요?
지금도 안 해요. SNS의 좋은 점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필터를 통해 구성되는 거라 확증 편향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거죠. 우리 사회의 분열과 SNS 생태계가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현대인들은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내면화하는데 SNS가 이런 생각을 하게 부추겨요. 특히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SNS를 접하잖아요. 너무 많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요. 우리 어릴 때는 우리 반 친구랑 나를 비교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걸그룹을 보면서 비교하는 거예요.
비교 대상이 많아진 거군요.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로 예쁘고 잘하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해요.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경험을 많이 하면 스스로 평범해지면 안 된다는 공포가 생기는 거예요. ‘남들만큼 살고 싶어’의 ‘남들’이 보통 사람이 아닌 거죠. 자존감이 주식 폭락하듯 떨어지고 안 멈춰요.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끊어낸 거예요. 살려고요. (웃음)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나한테 집중을 못하더라고요.
SNS를 끊고 책도 더 읽게 됐다고요.
SNS 하는데 정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아마 많은 분이 공감하실 거예요. 물론 SNS를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바이럴 마케팅 같은 SNS 생태계에 종사하시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다만 대안을 찾을 필요는 있어요. 그리고 확증 편향을 강화하지 않고 다른 것들도 볼 수 있게 스스로 노력하고 힘을 길러야죠.
말은 위로되지 않았어요
앤이 버트 아저씨와 이별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위로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합’이라고 했어요. 위로가 어렵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데요. 혹시 기억에 남는 위로가 있나요?
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말보다 옆에 있어 주고, 따뜻한 차 한 잔 건네주었던 일이 기억 나고요. 정말 힘들 때는 언어 이전에 감각이 더 우선되는 거 같아요. 손을 잡아 준다거나 안아준다거나 그냥 옆에 있어 주는 일, 때로는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도 인정해 주는 게 위로 아닌가 싶어요. 어려운 일이죠.
어려운 일 같아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죠.
생각해 보면 상대방을 위해서라기보다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하는 위로도 많아요. ‘힘내’, ‘파이팅’, ‘시간이 약이야’, ‘다 지나갈 거야’,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다 잘 될 거야’ 같은 막연한 말들 있잖아요. 그런데 정말 너무 힘들 때는 이런 막연한 이야기는 하나도 도움 안 돼요. 와 닿지 않고 평소라면 소화할 수 있는 말들도 하지 못해서 불편해지기 쉽죠.
위로를 밧줄에 비유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고 밧줄을 던졌는데 내가 밧줄을 안 잡고 던지면 안 되잖아요. 던진 사람이 밧줄을 힘껏 잡고 있어야 올라오는데 안 잡고 있으면 어떻게 올라오겠어요. 더 밑으로 빠져들죠. 밧줄을 던졌으면 그 밧줄의 끝을 잘 잡고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이 줄을 잡고 올라 올 때 놓으면 안 돼요. 그런데 꽉 잡고 버티다 보면 잡고 있는 사람도 열상을 입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위로가 어려운 거예요.
라디오 하면서도 가능하면 ‘힘내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요.
아무리 좋은 책을 추천해도 너무 힘들면 책을 못 읽어요. 정말 힘든 사람한테는 책 추천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문장 처방을 했어요. 딱 맞는 어떤 문장과 상황을 먹기 좋은 형태로 잘 조리해서 주는 거죠. 잘 소화할 수 있게요.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이었겠어요.
후회했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고요. 그걸 몇 년을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너무 힘들어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그 원고를 썼어요. 원래 힘이 가장 많이 드는 일을 처음에 해요. 제일 하기 싫으니까. 그게 주로 소설 쓰기였는데…(웃음) 그 원고 쓰려고 트라우마나 애착 관련 책도 읽고 정신과 선생님들도 많이 만났어요.
앤의 이야기를 보고 위로받았다는 독자들이 많아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기 바라세요?
에필로그에도 썼는데요. 외상 후 스트레스보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말을 더 믿고 싶어요. 근육을 찢는 운동을 반복하면서 근력을 키우듯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앤의 어린 시절도 사실 고난의 연속이거든요.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어려움 속에서 성장한 거예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메시지를 발견하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와 닿는 이야기가 저마다 다르겠지만요.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최진영
'이야기하면 견딜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샹그리라
2020.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