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위 고양이] 언젠가, 결혼 - 문보영
고래 알아보기. 그들은 잠실에 있는 <치앙마이의 기적>이라는 태국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글ㆍ사진 문보영(시인)
202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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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에세이를 격주 월요일, <채널예스>에서 소개합니다. 

<책장 위 고양이>는 7명의 작가들이 돌아가며 1편의 에세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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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이쉬르마른과 수리마리파라는 비에 젖은 벤치에 앉아 있다. 그들은 사랑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수리마리파라 : 내가 좋아하는 나 자신이 되는 게 중요해

뇌이쉬르마른 :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 자신을 잃지 않는 건 중요하지

수리마리파라 : 그런데...

뇌이쉬르마른 : 그런데?

수리마리파라 : 내가 너무 나면 그게 할 짓인가

뇌이쉬르마른 : 그렇지... 구릴 수 있지

수리마리파라 : 그리고...

뇌이쉬르마른 : 그리고?

수리마리파라 : 내가 나면 그게 정말 나인가

그때, 어떤 남자가 그들 앞을 속보로 걸어갔다. ‘우리 남편인가?’ 수리마리파라가 말했다. 수리마리파라의 남편인 수리마리고래가 일을 마치고 공원으로 오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뇌이쉬르마른은 수리마리파라가 자신의 남편을 타인과 자주 헷갈려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나도 알아. 그런데 나는 남편을 밖에서 만날 때면 늘 조금 긴장해. 내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까 봐’ ‘네 남편인데 어떻게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어?’ ‘항상 집에서 보던 사람을 밖에서 보면 밖이라는 환경이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같아.’

수리마리파라와 수리마리고래는 왕년에 클래식 기타 동아리 회원이었다. 기타 동아리에 처음 간 날, 주황색 벙거지 모자를 쓴 선배(이하 주벙모)가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수리마리파라는 통기타와 클래식 기타의 차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판에 발을 얹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보면대를 보며 기타를 연주하는 풍경에 조금 당황했다. 주벙모는 수리마리파라를 환영하며 동아리를 소개했다. 그렇게 수리마리파라는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 주기적으로 나가게 되었다. 주벙모는 수리마리파라에게 클래식 기타 운지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수리마리파라가 기타를 잡자마자 (잡기만 했는데) 재능이 보인다고 했다. 수리마리파라는 웃으라고 하는 말인 줄 알고 따라 웃었다. 그런데 주벙모는 수리마리파라가 손가락으로 기타의 현을 뜯자 (처음 뜯은 건데) 더욱 감탄하며 그녀가 기타에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수리마리파라는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잘 틀리나 보다, 하고도 생각했다. 잘 틀리고 자꾸 틀리고 너무 많이 틀리기. 좀 틀려야 사랑이기 때문에. 틀린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른 각도에서 상대방을 보는 사람이므로 그 사람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확률도 높았다. 그러니 사람들이 더 자주 틀리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한 명만 틀리면 안 되고, 둘이 동시에 틀려야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데...

좌우간, 사랑에 빠진 인간은 일단 틀리다, 하고 수리마리파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주벙모가 수리마리파라에게 기타를 가르쳐줄 때 구석에서 개인 연습을 하던 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고래였다. 고래가 제일 잘하는 건 보면대와 발판 접기였다. 저놈이 기타를 치러 오는 건지 발판 접기를 하러 오는 건지 싶을 정도였다. 말을 걸려고 하면 가버리고, 가버리고, 가버려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수리마리파라는 놈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고래는 구석에서 혼자 작은 노트에 뭔가를 끄적이곤 해서 더욱 궁금증을 자아냈다.

하루는 수리마리파라가 고래에게 무슨 글을 쓰냐고 물어보았다. 고래는 ‘읽어볼래?’ 하고 물었다. 그래서 수리마리파라는 고래의 글을 읽었다. 고래가 어떠냐고 물었다. 되게 좋다. 수리마리파라가 말했다. 그럴 리가... 정말이야? 고래가 물었다. 응! 네 글에는 아무것도 없어. 수리마리파라가 근거를 댔다. 칭찬이야? 고래가 물었다. 당연하지! 엄청난 재능이야! 수리마리파라가 말했다.

그게 그들이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수리마리파라는 고래를 은밀히 짝사랑했지만 고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고래 옆에 있을 땐 세상이 연해졌다. 주변이 신경 쓰이지 않았고 그래서 주변 자극에 둔해졌다. 세상이 계속 흐릿하고 연할 수 있다면 고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수리마리파라는 고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는데 고래는 고래처럼 입을 꾹 다물고 기타만 쳤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어느 날, 주벙모의 결혼 소식을 계기로 둘은 연락을 하게 되었다. ‘너 갈 거야?’ 고래가 수리마리파라에게 물었다. 수리마리파라는 고래가 자신에게 말을 건 게 처음이어서 이렇게 답했다.

‘다른 사람한테 보내려던 문자 잘못 보낸 거 같은데’

고래는 당황했다. 실은 고래도 수리마리파라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주벙모가 수리마리파라를 좋아하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감추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고래는 이제 더 이상 바보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7년 치의 용기를 긁어모아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 물어본 거 맞아.’ 그러자 수리마리파라가 말했다. ‘난 안 갈 거야.’ 고래는 시무룩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럼 그날 일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수리마라파라는 집에서 자거나 밖에 나가서 숨 쉴 거라고 말했으므로, 둘은 주벙모의 결혼식 날 둘이서 따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잠실에 있는 <치앙마이의 기적>이라는 태국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

고래와 만나기로 한 날이 왔다. 그런데 수리마리파라는 고래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고래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흐릿했던 것이다. 너무 많이 떠올리고 생각해서 지워지고 닳아버린 얼굴이었다. 오랜 시간 제멋대로 생각해서 변형되어버린 얼굴이었다.

고래를 만나러 <치앙마이의 기적>으로 향하는 길. 어두운 겨울 저녁이었다. 골목을 돌았는데 전방 15m에서 고래와 닮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수리마리파라는 멀리서 그 사람의 전체적인 형상을 보았다. 고래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상대방도 수리마리파라를 의식하는 것 같았다. 그쪽도 만나러 가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그 사람이 수리마리파라와 닮았는지 실눈을 뜨고 그녀를 살피는 듯했다. 그들은 티 내지 않고 서로를 스캔했다.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고래일 리가 없었다. 약속 장소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더욱 고래인 것 같았다. ‘그런데 알아본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수리마리파라는 문득,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일의 메커니즘이 이해되지 않았다. 전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보고 알아보는 거지? 그걸 어떻게 하는 거야? 수리마리파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간다면 확실히 덜 헷갈릴 거라고 수리마리파라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알아보게 만드는 요소에는 그 사람의 얼굴, 손가락, 발가락, 목소리도 있지만 약속 장소도 그러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를 누군가로 보이게 도울 것이다. ‘여기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그들이게끔, 서로를 서로이게 보이게 돕는다는 점에서 약속 장소야말로 그들의 정체성인지도 몰랐다.

상대방이 전방 2m까지 다가왔다. 수리마리파라는 그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상대방이 수리마리파라의 얼굴을 보더니 흠칫했다.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쪽에서 ‘어!’ 정도만 해줘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아보는 기색을 좀 더 확실히 내비쳤다면, 그녀는 고개를 들 것이고, 그 사람의 얼굴은 고래의 얼굴과 딱 들어맞을 것이며, 그 순간 초점이 맞춰지면서 그녀는 그를 반길 수 있을 것이었다. 전방 1m. 둘은 이제 아주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서로를 지나치고 말았다.

방금 지나친 이가 고래였다면, 둘은 식당에서 만나 좀 전에 서로를 지나쳤던 순간을 회고하며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지?’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래. 그래도 반갑다, 야’ 따위의 말을 어색하게 주고받을 것이다.

수리마리파라는 치앙마이의 기적에 도착했다. 음식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만한 얼굴은 없다. 그녀는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무릎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 고래에게서 연락이 왔다.

“뛰어가는 중이야!”

삼 분 뒤, 누군가 땀을 흘리며 허겁지겁 치앙마이의 기적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땀이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보이게 하였다.

“너구나!” 수리마리파라는 고래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결혼 후에도 수리마리파라는 낯선 곳에서 남편을 만날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하는데 사실 걱정만 하고 알아보지 못한 적은 없다. 수리마리고래가 우산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우리 남편이다!” 수리마리파라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간다. 비 온 벤치에 앉아서 엉덩이는 젖어 있다.


<문보영 작가의 말>


수리마리파라와 고래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뇌이쉬르마른도 좋은 짝을 찾기를......


<셸리의 말>


이전부터 문보영 작가의 《에세이》를 받아본 이라면 이제 뇌이쉬르마른이나 수리마리파라와 같은 이름들이 어느덧 꽤 익숙해졌을 것으로 아오. 어쩌면 그대는 과거 그녀의 글로부터 인력거와 같은 이름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금일의 서신에는 새롭게 수리마리고래가 등장했구려. (아차차-주벙모도 언급하길 잊어서는 아니 되겠소.) 나 셸리도 이 지면에서 수리마리파라와 고래의 결혼을 축하하고 싶소. 물론 수리마리파라와 수리마리고래가 〈참으로〉 있는 사람들인지 나 셸리는 알 길이 없으나, 〈시는 역사보다 진실하도다〉라는 말도 있지 않소? 뇌이시르마른에게도 즐거운 일이 있기를 축원하오.

문보영 작가의 금일 글을 읽어보자니 〈나〉란 무엇인지, 〈내가 나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인데, 그대 생각은 어떠하오? 어떤 단일성 그 자체가 아니고서야 만유는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이라 이르는 말을 내 젊었던 시절 지중해 인근에서 들어본 바 있소. 다만, 요즘은 내 과거지사에 관한 말을 그대 위한 서신에 과히 자주 쓴 듯하여 이만 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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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작가 #에세이 #고래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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