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다 키웠을 거 아니냐는 질문에 “난자가 수정된 적도 없다고” 답하니, 아주머니가 당황하며 물을 들이켠다. 내가 싼 똥만 해도 한 트럭분은 될 텐데 나는 그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다며 우스개 아닌 우스개도 던진다. 김소민 작가가 자신의 책 『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 에 풀어쓴 내용이다. 책은 작가가 마흔 넘어 백수에 혼자가 되고 나서 경험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았다.
이런저런 농담이 툭툭 튀어나오는 에피소드를 배꼽 빠져라 웃으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눈물을 쏙 빼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 번도 ‘나’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작가의 뼈아픈 깨달음이 내 이야기인가 싶다. 작가가 꺼낸 경험을 따라 타인에게 준 상처도 곱씹어보고 나에게 준 상처도 다시 열어본다.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싱글에 애도 없지만, 아줌마 혹은 어머니로 불리는 나는 누구일까?’ 작가가 흰머리 뽑아가며 생각하는 물음을 눈으로 마음으로 좇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나로 살아본 적이 있던가.’
『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 는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퐁당’ 던진다. 그러곤 타인과 세상의 상처에 마음을 ‘풍덩’ 담그게 한다. 나를 너머 타인과 세상의 떨림과 울림에 흔들리다 보면 ‘진짜 나의 긴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오답인 줄 알았는데, 해답이었던 이야기. 아직 남겨진 작가의 긴 이야기가 있어 이곳에 쓴다.
첫 책으로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를 쓰셨고, 이번이 두 번째 에세이입니다. 아직 작가님의 이름이 낯선 독자가 있을 텐데요. 책에 보면 작가님의 ‘왕년’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독자들에게 직접 작가님 소개도 할 겸 왕년 이야기 좀 풀어주세요.
그냥 발등에 불 끄느라 정신 없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점수 1~2점에 행복과 불행을 오갔는데 정작 그래서 뭘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몰랐어요. 신문방송학과에 가게 됐고, 〈한겨레〉에 다니게 됐고, 13년 기자로 일했어요. 되돌아보면 막연히 뭔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 같긴 하네요. 그런데 제가 쓰는 게 저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될지는 정작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기자 생활 10년 차 됐을 때, 용산참사가 일어났어요. 자괴감이 컸어요. 개인인 저는 무능해도 되지만 기자인 제가 무능하면 제 문제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제가 좋은 기자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요. 휴직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는데 괜히 걸은 거 같아요. 아니에요. 또 잘 걸은 거 같기도 해요. 그 길이 독일, 부탄으로 이어졌어요. 2016년 한국으로 돌아와 국제 구호 NGO 세이브더칠드런에서 1년 7개월 일하다 그만뒀어요. 그만두지 말 걸 그랬어요. 아니에요 또 잘 그만둔 것 같기도 해요. 지금은 〈한겨레21〉에 ‘김소민의 아무몸’이란 칼럼을 쓰며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어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의로 밥벌이를 하고요. 개 몽덕이 산책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 일과예요.
책 제목 『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 와 부제 ‘(나에게) 상처 주고도 아닌 척했던 날들에 대해’가 눈에 띕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오랫동안 제가 상처받은 일 주변을 맴돌았어요. 그런데 저는 피해자일 때보다 가해자일 때가 많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 자신에게도요. 타인뿐만 아니라 저 자신도 도구로 이용해 왔다는 걸, 백수로 지내며 만날 사람이 없어 강제 묵언 수행을 하다 보니 알게 됐어요. 예를 들면, 불안하니까 자꾸 타인에게 저를 확인하려고 하죠. 자꾸 물어요.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해? 그 답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처받고 화가 나는 거죠. 그런데 타인은 제가 원하는 답을 해줄 의무가 없어요. 타인은 저를 확인해주려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또, 제가 이성으로 비판해 왔던 것들, 예를 들자면, 가부장제 같은 것들이 제 감정과 몸에 깊이 스며 있다는 점도 알게 됐죠.
‘난자가 수정된 적도 없다고’(61쪽) 대답하는 대목에선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마냥 웃긴 줄만 알았는데, 책을 덮고 나면 진한 여운이 남아요. 하고 싶었던 말을 작가님이 대신해 준 것 같기도 하고요. 솔직하게 풀어낸 작가님의 이야기에 금방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풀어쓰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사실 창피해요. 그런데 저는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아주 뼛속까지 자기중심적인 인간이에요. 모든 고민이 제 문제부터 시작해요. 예를 들면, 나는 왜 내가 혼자 사는 40대 여자라서 위축될까? 왜 자꾸 뭔가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까? 이런 질문부터 시작하게 돼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 해답을 찾는 과정을 글로 쓰는데, 대체로 답은 못 찾고 질문만 더 생겨요. 저 자신에 대한 질문을 빼곤 쓸 수가 없는 거죠. 공과금도 내고 개 몽덕이 사룟값도 벌려면 글을 계속 써야 하니까 창피하더라도 제 이야기부터 쓸 수밖에 없어요. 그냥 최대한 솔직하게 쓰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에 대해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렵게 자기를 돌아보고도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죠. 조금은 변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보면 이전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며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작가님도 그런 순간이 있나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시나요?
매 순간 그래요. 뇌생물학자 게랄트 휘터는 『불안의 심리학』 에서 자주 써온 뇌 속 회로는 고속도로가 된다고 했어요. 어떤 상황에 부닥쳤을 때 자기도 모르게 같은 도로를 달리게 되죠.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일지라도요. 정말 바뀔 수밖에 없는,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요. 이성은 한탄강에 떠내려가는 ‘쓰레빠’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정신 차려보면 상황 종료된 거죠. 그런 자주 쓰는 회로들이 모여 성격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휘터가 말했듯이, 정말 바뀔 수밖에 없을 땐, 바뀔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매일 더는 타인이 나를 무시하는지 아닌지 그 쓸데없는 질문에 매몰돼 곤두선 채 살지 않겠다 결심하고, 매일 실패하지만, 그래도 결심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은 거 같아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상처’라는 생각도 듭니다. 주변의 상처를 이해하고 살피면서도 나로 버티며 살아가려는 작가님의 모습이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상처받은 사람은 축복받은 자이다. 상처는 새로운 시각을, 타인을 향한 문을 열어준다.”(195쪽) 내내 웃으며 책을 읽다가도 이런 문장에선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인을 향한 문을 열 때 ‘나’는 무엇을 먼저 열어야 할까요?
먼저 저는 아직 저로 버티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어요. 아직 멀었어요. 매일 화나고 불안해요. 그런데 한국의 수용소 취재하다 서산개척단원이었던 김정수 씨를 만난 적이 있어요. 15살에 끌려가 몽둥이로 맞으며 강제 노동했던 분이에요. 그렇게 맞아가며 개척했는데 그 땅도 다 나라에 뺏겼어요. 김정수 씨가 그러시더라고요. “지옥에도 배움이 있더라.” 그 지옥을 견딘 자기를 존중하고 그 존중을 바탕으로 다른 희생자들을 돌봐요. 자기 고통을 참고자료 삼아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요. 그러려면 고통을 자기가 원하는 자기 이야기에 통합해 쓰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고통은 이유 없이 강타하지만, 그 고통으로 뭘 쓸지는 자기가 선택하는 게 아닐까. 선택하려고 결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해요. 저는 또, 좀 거창한데, 고통은 자아상에 대한 집착을 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세상 속에 연결돼 사는 그냥 한 보통의 존재라는 걸 알려 주는 거 같아요.
3부 「개처럼 사랑한 적도 없으면서」를 보면 개를 입양하고 싶었는데, 서류 심사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최근에 강아지를 한 마리 입양하셨다고요.
잡종개 ‘몽덕’이에요. 브런치(카카오에서 만든 글쓰기 플랫폼)에서 어떤 분이 강아지가 15마리 태어났다는 글을 올려서 메일을 보냈어요. 얘 엄마 몽실이는 차분하고 온화한 개예요. 아빠는 깐식이, 이름이 성격을 말해주죠. 엄마 몽실이를 닮았으면 했고 또 덕을 쌓아 제 발뒤꿈치를 그만 물라는 뜻으로 이름을 몽덕이라 했어요. 그런데 성격이 깐식이에요. 하루 3시간씩 동네를 질주해요. 비가 와도 추워도 달려요. 몽덕이가 좋아하니까요. 뛰면서 생각해요.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거구나 헥헥. 나는 이 개를 사랑하는구나 헥헥. 제가 어떤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소중한 개예요.
1부의 제목이 「퇴사 1년, 흰머리가 쑥대밭이다」 입니다. 퇴사 선배(?)로서 사직서를 품고 다니며 ‘퇴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저는 욱해서 퇴사했어요. 저처럼 퇴사하진 마세요. 하하. 월급날마다 슬퍼져요. 퇴사 자체가 저한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에요. 퇴사했다고 깨달음이 오거나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자기 뇌 속 익숙한 회로를 계속 타니까요. 그 회로를 어떻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꿀까, 그 계획을 완수하는 데 어떤 환경이 더 나을까를 결정하는 게 저한테는 중요했던 거 같아요. 정말 퇴사를 하고 싶으시다면, 실업급여를 챙기실 방법을 꼭 찾아보세요. 저는 자의로 그만둬서 한 푼도 못 받았어요. 실업급여는 소중해요.
* 김소민
<한겨레>에서 13년 기자로 일했다. ‘대기만성형’이란 이야길 들었다. 항상 ‘대기’하고 있다고들 그랬다. ‘만성’을 입증하지 못하고 그만뒀다. 기자 10년 차 때 ‘더 이상 못하겠다’ 싶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괜히 걸었나. 그 길은 어쩌다 보니 독일과 부탄까지 이어졌고, 몇 년을 살다 왔다. 한국에 돌아와 국제구호 NGO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했다. 퇴사하니 옛 월급날마다 슬프고 더 늘어난 의료보험료를 낼 때마다 화난다.
겁이 엄청 많은데 세상이 궁금하다. 사람이 두려운데 만나고 싶다. 양쪽을 오락가락하다 마흔이 넘었다. 한 주제를 잊고 사소한 팩트에 집착하는 습성이 있다. 타향살이하며, 별별 사람들을 만났다. 이해는 듣기부터 시작한다는 걸 배웠으나, 여전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말도 잘 듣지 못한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김소민의 아무몸」을 연재하고 있다. 몽덕이(개) 사룟값을 벌려고 프리랜서로 고군분투 중이다. 쓴 책은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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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 김소민 저 | 한겨레출판
40대 여성 작가가 퇴사 이후 나를, 주변을, 종래엔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로써 ‘나’라는 한 인간을 다시 키우며 써 내려간 에세이다. 무엇보다 싱글 여성이 온 힘을 다해 자기 자신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쓴 기록이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