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s
문고본 시대에 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장정일의 시 ‘삼중당 문고’다. ‘열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꺼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 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독서의 은밀한 기쁨에 젖은 까까머리 소년의 옆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여울 작가는 1970년대를 전후해 쏟아지던 을유문고, 서문문고, 삼중당문고들에 수많은 소년 소녀가 매혹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토록 작은 책에 그토록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믿음. 순결하고 뜨겁다.
2000’s
2000년대 초반은 지식총서들의 시대였다. 사륙판형(12?19cm)에 96쪽, 3,300원이었던 시공디스커버리 총서와 책세상문고가 포문을 열었고 창해 ABC가 뒤를 이었다. ‘숏-폼’ 콘텐츠의 두 번째, 어쩌면 세 번째 전성기였다. 그 시절에도 문지 스펙트럼은 ‘고전의 가치’라는 독특한 지형을 지향했다. 2018년 리커버본을 출간하면서 밝힌 문학과지성사의 포부는 2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고전의 가치를 현재적 의미로 새롭게 되새기는 목록들로 더욱 풍성하고, 더 작고, 더 강하고, 더 가까이 독자들과 마주하고자 한다.’ 작은 것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010’s
먼저 화살을 쏘아 올린 건 민음사의 쏜살문고였다. 2016년 『키 작은 프리데만 씨』 를 비롯한 7권으로 첫 화살을 쏘아 올린 쏜살문고는 지난해 말부터 ‘여성 문학 컬렉션’을 펼치고 있다. 열린책들은 주력 분야인 프랑스 문학 가운데 200쪽 내외의 작품을 모아 ‘블루컬렉션’을 선보였다. “가벼움을 모토로 한 말랑말랑한 소설 컬렉션이고 싶다”는 취지를 담아 블루 컬러 점, 선, 면만으로 그려낸, 커버만으로 소장 욕구를 억누르기 힘든 시리즈다. 마음산책의 ‘마음산 문고’는 ‘지식의 보급’이라는 문고 본래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다. 여기에 ‘지금 이곳’의 감성과 사고를 큐레이팅한다는 의의, 트렌드와 콘셉트에 맞춰 여러 권씩 짝지은 모듈 형식을 더해 ‘오늘의 문고본’이 탄생했다.
오늘
책을 소리로 듣거나 정식 출간 전 오디오 북으로 먼저 연재하는 형식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미디어 플랫폼들에 연재된 숏-폼 콘텐츠가 책이 되는 사례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책읽는수요일이 2019년 10월 출간한 『식물의 책』 은 원래 오디오 프로그램이었다. 2017년 8월부터 네이버 오디오클립 채널에서 방송을 시작한 ‘이소영의 식물라디오’는 최근 100화를 넘겼다. 매화 방송 분량은 15분 남짓, 본래 식물 세밀화를 그리는 작가의 나긋한 숏-폼 오디오에 다정한 세밀화가 더해지면서 한 권의 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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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책이소영 저 | 책읽는수요일
국립수목원?농촌진흥청 등 국내외 연구기관과 협업해 식물학 그림을 그리며 식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해온 이소영 식물세밀화가는 식물의 형태, 이름, 자생지 등 기본적인 정보만 정확하게 알고 있어도 더 오래도록 식물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늘 가까이에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도시식물들에 관한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세밀화와 함께 담았다.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