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다. 매일같이 비가 올 땐 마냥 지겹더니, 며칠 날씨가 좋다가 비가 오니까 실망스럽기보다 오히려 ‘봄비’의 감흥이 일어서 좋았다. 아니, ‘여름비’라고 해야 할까?(아일랜드에서는 5월을 여름이라 부른다. 하지만 기온은 초봄 같다).
코크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코크에서 열리는 채식 축제 ‘코크 베지페스트Cork Vegfest’에 가기 위해서다.
오후 4시 정각에 휴스턴 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6시 30분에 코크의 켄트 역에 닿았다. 좌석이 반 정도밖에 차지 않아서 조용하고 여유로운 여정이었다. 난 통로석을 예약했는데 내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아서 창가에 있는 전기 콘센트도, 창문을 스쳐 지나가는 빗방울의 춤 사위와 비에 젖은 초록빛 시골 풍경도 모두 내 차지였다. 7월에 열리는 ‘골웨이 국제 아트 페스티벌’ 프로그램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아이리시 뮤지션 개빈 제임스의 노래 <포 유For You>는 비 오는 날의 기차 여행과 싱크로율 백퍼센트다. 오랜만에 사춘기 소녀 같은 감상에 젖어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코크 시내 구시가지의 오래된 호스텔에 짐을 풀고 팔라펠을 전문으로 하는 채식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팔라펠은 으깬 병아리콩에 양파, 마늘, 파슬리 등으로 양념해서 동그랗게 튀겨낸 중동 지역 음식인데,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보통 후무스(레몬주스, 오일, 마늘을 넣어 맛을 낸 병아리콩 소스)와 중동식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다.
밤에는 애플사이다 한 캔을 마시며 넷플릭스로 영화를 봤다. 먼지 풀풀 나는 옥탑방이지만 도미토리가 아니라 화장실이 딸린 싱글룸이라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감사했다. 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영화를 보며 화장실을 속옷 바람으로 들락거릴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큰 사치인지, 배낭여행에 익숙한 가난한 여행자들은 알 것이다. 시원하고 달달한 아이리시 애플사이다, 재밌는 영화 한 편, 창밖의 빗소리…… 소박한 행복 속에 밤이 갔다.
원래 아침형 인간이기도 하지만 여행 중에는 더 일찍 잠이 깬다. 여럿이 방과 화장실을 나눠 쓰는 호스텔에 묵으며 생긴 버릇이기도 하다. 화장실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제일 먼저 샤워하고 볼일 보고 밥 먹고 튀어 나가는 거다.
하리 강을 끼고 형성된 코크 시의 모습. 아일랜드 제2의 도시답게 아일랜드 채식 문화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해가고 있다.
식당에 내려가니 아직 아무도 없었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 뉴스 앵커의 바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료로 제공되는 토스트와 커피에 어제 챙겨놓은 사과를 아침으로 먹고, 호스텔에 왔던 모습 그대로 다시 거리로 나섰다.
‘코크 베지페스트’가 열리는 코크 시청 앞에는 벌써 줄이 꽤 길게 늘어섰다. 10시에 오픈이니 아직 15분이 남았는데 이렇게나 많이 모이다니, 그것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
예상은 했지만 역시 히피 포스가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치렁 치렁하게 꼬아 내린 긴 머리, 색은 찬란하고 스타일은 어벙한 바지를 입은 무리가 눈에 띈다. 데리고 온 아이들까지도 히피 패션 일색이다. 사람들이 ‘채식’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자연 친화적인 삶’이란 면에서 히피 문화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이제 채식을 한 지 15년쯤, 완전채식을 시작한 지는 2년쯤 되지만, 단순히 음식을 가려서 먹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운동으로서의 ‘비거니즘veganism’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다. 특히 성장기 아이들의 채식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논란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고 비건 육아를 고집하는 부모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적으로 채식 인구가 꾸준히 늘면서 ‘채식’에 대한 인식도 예전에 비해 많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특히 유럽 여행을 하다보면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다. 별도의 채식 메뉴를 갖춘 식당들은 물론, 베지테리언(채식) 또는 비건(완전채식) 식당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일랜드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종종 점심을 먹으러 가는 더블린 위클로 거리의 채식 식당 ‘코누코피아’(41쪽 정보 참조)와 테이크아웃 샐러드바 ‘블레이징 샐러드Blazing Salads’는 늘 줄이 길게 늘어서 있고, 포토벨로에 새로 생긴 비건 식당 ‘소바 비건 부처Sova Vegan Butcher’는 유럽의 인기 비건 식당 20위에 선정되면서(Big 7 사이트) 연일 잡지에 오르내린다.
곁 이야기지만, 채식을 결심했다면 다이어트보다는 균형 잡힌 영양 섭취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비건’은 ‘플랜트-베이스드Plant-based 다이어트’, 즉 땅에서 자연 에너지를 가득 품고 자란 채소와 과일, 곡류의 영양분을 되도록 가공하지 않고 섭취하는 것을 기본 철학으로 삼는다. 즉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대신 감자튀김과 콜라만 먹는다고 채식이 아니란 얘기다. 어쨌든 철학적인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나로서는 식당 선택의 폭이 넓어졌을 뿐 아니라 웨이터 눈치 보며 특별 메뉴를 부탁해야 하는 부담도 줄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고풍스러운 건물의 외관에 비해, 행사가 열리는 코크 시청의 분위기는 소박하고 가족적이었다. 음식뿐 아니라 비누를 비롯한 각종 세제와 화장품, 향수, 의류 등 ‘친환경Eco’과 ‘식물 성분’을 콘셉트로 한 다양한 비건 제품을 선보이고 있었다. 천연 코르크로 만들었다는 가방, 구두, 모자, 벨트, 지갑은 동물 가죽으로 만든 제품 못지않게 튼튼해 보였고 디자인도 예뻤다.
비거니즘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코크 시민뿐 아니라 아일랜드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행사는 성황을 이뤘다.
“유기농 마늘이 10퍼센트나 들어 있어요!”
마음씨 좋게 생긴 아이리시 부부가 맛보라며 건넨 크래커에는 직접 만들었다는 마요네즈가 듬뿍 얹혀 있었다. 보기에는 좀 느끼할 것 같은데 먹어보니 전통 마요네즈보다 훨씬 담백하고 알싸한 마늘 향이 입맛을 돋웠다. 그 자리에서 한 통 구입했다.
또 다른 부스에서는 유제품이 들어 있지 않은 치즈를 팔고 있었는데, 치즈의 종류도 일반 치즈 못지않게 다양했다. 개인적으로 콩으로 만든 고기, 소시지, 베이컨 등 고기를 흉내 낸 것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주재료인 코코넛 오일의 고소함과 발효 효소의 쨍한 맛이 어우러진 채식 치즈는 ‘흉내’라도 훌륭했다. 그 밖에 공정무역 카카오로 만든 수제 초콜릿, 백퍼센트 천연 허브 성분의 오일, 비누, 로션 등 제품 하나하나마다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철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축제 참가자 중에는 다른 나라, 혹은 아일랜드의 타 지역에 기반을 둔 판매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코크 지역에 기반을 둔 로컬 기업과 개인, 시민단체들이었다. 나는 설거지용, 빨래용 두 가지의 천연세제를 조금씩 사고, 저녁때 집에 가서 존과 나눠 먹으려고 퍼피 시드(양귀비 씨)가 콕콕 박힌 레몬 케이크도 한 조각 샀다.
점심때는 일부러 제일 긴 줄에 합류했다(줄이 길다는 건 뭔가 맛있는 집일 거라는 믿음!). 긴 기다림 끝에 두툼하고 따끈한 렌틸콩 버거를 손에 넣고는 이벤트 홀 한편에 이미 한 가족이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의 남은 의자 하나에 엉덩이를 걸쳤다. 현미와 렌틸콩을 잘게 부수어 둥글게 구워낸 패티에 신선한 토마토와 양상추를 얹고 두유로 만든 살사마요를 살짝 뿌린 버거는 고소하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뒷맛이 산뜻했다. 후식으로 샘플로 얻은 생초콜릿 한 조각을 곁들여 진한 커피를 마셨다.
배도 부르고, 몇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있었더니 피곤하기도 했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아직도 빗줄기가 굵다. 슬슬 다시 켄트 기차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 얼룩이 채 마르지 않은 검정 레인 부츠 위로 다시 빗방울이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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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힐링의 섬 아일랜드에서 멈추다이현구 저 | 모요사
우리가 모르는 아일랜드의 숨은 속살은 무엇일까? 요리하고 기타 치는 아일랜드 남자를 만나 아일랜드에 정착한 지 9년. 그녀가 들려주는 아일랜드 이야기는 흔한 가이드북에서는 만날 수 없는 속 깊은 이야기들이다.
이현구
아일랜드에 살면서 느끼고 경험한 일상과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마야 리Maya Lee’라는 필명으로 카카오 브런치를 통해 다른 이들과 나누고 있다. 극본 번역가로서 동시대 아일랜드 연극을 한국어로 번역해 무대에 소개하는 작업도 한다. 현재 기타 치고 요리하는 아이리시 남편과 함께 여행 같은 삶을 꿈꾸며, 더블린 근교의 바닷가 마을 브레이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