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는 참 애매한 나이다. 젊지도, 그렇다고 젊지 않은 것도 아닌 나이랄까. 확실한 건 ‘어떤 가능성’은 크게 줄어든다. 경험이 쌓인 만큼 두려움도 커지고 열정과 체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뮤지컬배우 신영숙 씨를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에 예외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어찌된 셈인지 그녀는 과거보다 40대인 지금 더 많은 무대에 서고, 더 주목받고 있다. 현재 <웃는 남자> , <레베카> , <맘마미아!>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만큼 인터뷰 자체가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웬걸, 그녀는 유일하게 쉬는 월요일 큼지막한 미소를 띠며 나타났다.
캐릭터, 내 안의 또 다른 나
모두 경험이 있는 공연이지만, 그래도 세 작품을 동시에 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너무 바쁘네요. 지금 제 안에 3명의 캐릭터가 있거든요. 일단 지난해 시작한 <맘마미아!>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지방 공연이 계속 잡혔어요. 3월에는 서울에서 앙코르 공연도 하고요. <레베카> 는 제가 초연부터 5연째 출연하는데, 많은 분이 사랑해주시는 소중한 작품이죠. 공연 때마다 그 인물과 좀 더 깊게 만나면서 새롭게 찾는 감정이 있다 보니 스스로도 만족스럽고요. <웃는 남자> 가 좀 갑작스레 잡혔는데, 조시아나라는 인물도 좋아하니까 놓을 수가 없더라고요. 관리를 잘해서 세 작품을 어떻게든 해보자 싶었어요.
체력도 체력이지만 세 인물이 확연히 다릅니다.
그래서 제 모습과 감정을 그대로 활용해요. 예를 들어 <레베카> 댄버스 부인의 경우 제가 화가 나 있는 날 공연을 하면 최고예요(웃음). 겉으로는 감추고 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새 여주인이 와서 분노에 가득 차 있는 거잖아요. 기분이 좋으면 오히려 그 감정을 눌러야 하는데, 요즘처럼 몸이 힘들 때는 그냥 메소드 연기가 나와요(웃음). <맘마미아!> 지방 공연을 갈 때면 주위에 ‘그리스로 휴가 다녀올게’라고 말하는데, 커튼콜이 즐겁지만 마냥 유쾌한 작품은 아니에요. 사실 도나는 혼자서 키워온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복잡하거든요. 그런데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반갑고, 그렇게 감정적으로 회복되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힘이 들어갈 필요가 없고, 연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기운을 얻게 돼요.
<웃는 남자> 의 조시아나 여공작은 어떤가요? 2018년 초연을 앞두고 만났을 때 굉장히 재밌는 캐릭터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맞아요, 조시아나는 특이한 인물이에요. 초반에는 ‘내 맘대로’ 살기 때문에 한껏 들떠 있어요. 부유하고 따르는 남자도 많고, 그래서 세상만사가 지루한데 마지막에는 혼자 깨우치죠. 거기에도 제 마음이 실려요. ‘내 삶을 살아가’라는 노래에 많이들 공감하시더라고요. 고민의 깊이만 다를 뿐 모두 진정한 행복에 대해 생각하잖아요. 이렇게 세 작품이, 또 인물 모두 색깔이 다르지만 평소 제 감정을 잘 녹여서 표현하니까 재밌어요.
상대 배우도 계속 바뀌잖아요. 호흡을 맞추는 게 어렵기도 하고 자극도 될 것 같아요.
배우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웃음)? 어릴 때는 실수할까봐 무대에서 약속을 정확히 지키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약속을 꼭 지켜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감정은 바뀌기도 하고 특히 공연은 라이브잖아요. 각 장면의 목표나 상황은 잘 아니까 상대 배우가 주는 만큼 받아서 연기하는 게 점점 재밌더라고요. 공연을 자주 보러 오는 관객들은 무대가 매번 달라서 좋아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호흡을 주고받는 게 아주 재밌어요. 상대가 신인일 경우 ‘맘껏 해라. 다 받아줄게!’라는 여유도 생겼고요(웃음).
그럼 <웃는 남자> 의 경우 네 명의 그윈플렌은 어때요?
일단 (이)석훈 씨는 노력파예요. 연습을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무대에서도 안정적으로 소화하고 있고, 규현은 약간 장난꾸러기라고 할까요. 평소에도 농담을 잘하고 능청스러운 면이 있는데 무대에서도 드러나요. 수호도 정말 잘해요. 초연 때도 잘했지만 1년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어서 제가 다 뿌듯하더라고요. (박)강현이는 제가 팬인데, 그윈플렌에 빙의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웃음). 어떤 그윈플렌을 보셔도 재밌을 거예요. 각자의 개성으로 다들 빛나거든요.
귀족들의 놀잇감으로 강제로 입이 찢긴 그윈플렌을 통해 17세기 사회상을 담아낸 작품인데, 창작뮤지컬인데도 초연 당시 한국뮤지컬어워즈 등 뮤지컬 관련 상을 휩쓸었습니다. 객석에서 보기에는 무대 연출이 압권이었는데, 배우로서 가장 와닿는 부분은 어떤 점이었나요?
메시지가 참 좋은 작품이에요. 마지막 ‘진짜 괴물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라는 그윈플렌의 노랫말에 전 세계, 모두에게 통용되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있어요. 외면적으로는 그윈플렌이 괴물이지만, 이 세상에 내면적으로 괴물인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작품이 그냥 ‘재밌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좋은 메시지가 있어서 더 남는 것 같아요.
사모하는 일에 끝이 있을까
1999년에 데뷔해서 20년 넘게 무대에 서왔습니다. 배우도 사람이니, 가장 사랑하는 인물이 있겠죠?
댄버스 부인을 빼놓을 수 없는데, 작년에 새롭게 엘리자벳이 등극했어요(웃음). 이 작품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팬분들이 저와 잘 어울린다고 독일어로 된 대본을 다 번역해서 음악과 함께 선물해주셨거든요. 그때부터 팬들과 함께 꿈꿔왔던 작품이라 첫공 올리고 공연장에서 함께 울었어요. 16살부터 60살까지 여자의 일생을 연기하기 때문에 타이틀 롤로도 굉장히 매력적이고, 작품성도 높고요. 40대에 엘리자벳을 만나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 안에 다양한 감정들, 엘리자벳과 맞닿아 있는 많은 것을 끄집어 낼 수 있었거든요.
뮤지컬 넘버는요?
넘버를 꼽으라면 <모차르트!>의 발트슈테텐 남작부인이 부르는 ‘황금별’인 것 같아요. 지금의 신영숙을 있게 해준 노래거든요. 인지도가 없던 저를 알아봐주시고 기억해주시니까 계속 무대에 설 수 있는 거잖아요. ‘황금별’이 그걸 가능하게 해준 노래예요. ‘황금별 여사’라는 별명도 생겼는데,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 사람들한테 편지도 많이 받았어요. 올여름 <모차르트!> 10주년 공연이 있는데, 저에게도 굉장히 의미 있죠.
그러고 보면 <레베카> 나 <맘마미아!>를 비롯해 <캣츠>, <명성황후>, <엘리자벳> 등 여성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작품에 많이 참여하셨어요.
제가 좀 강한 캐릭터를 많이 하죠. 그동안 해왔던 수많은 작품에서 유일하게 안 한 캐릭터가 있다면 청순가련형일 거예요. 제안이 들어오지도 않고(웃음). 그리고 전체적으로 세계적인 흐름도 바뀐 것 같아요. 예전에 디즈니랜드 애니메이션을 보면 여자 주인공은 모두 공주고 남자가 키스해야 깨어나는 식이었는데, 요즘 <겨울왕국>이나 <알라딘> 등을 봐도 달라졌잖아요. 진취적인 여성상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공연계의 흐름도 바꾼 거겠죠.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무대에 설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은데, 신영숙 씨는 점점 어리고 주목받는 인물을 연기합니다. 지난번에 ‘신영숙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고 하더니, 결국 16살 엘리자벳도 하셨고(웃음).
멀리서 본 관객들은 아역을 따로 뒀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저한테 예쁜 음색도 있다 보니(웃음). <엘리자벳>의 경우 초연 오디션 때는 떨어졌어요. 어려서부터 쉬지 않고 작품을 했지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30대 중반이거든요. 음색이 세서 20대에 나이 든 역할을 많이 했는데, 지금 오히려 더 어리고 재밌는 역할들을 맡고 있긴 해요. 40대에 이렇게 더 빛을 발할 수 있어서 감사하죠. 보통 주연을 했던 사람들도 조연으로 가는 나이인데.
신영숙 씨도 오디션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군요!
저 오디션 많이 떨어졌어요. 떨어지는 것에 익숙해요(웃음). 반면 오디션에서 1등을 했는데도 인지도가 낮아서 출연하지 못한 작품도 있어요. 그리고 작품이나 배역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스위니토드>의 러빗부인 같은 경우 오디션을 잘 보고도 공연이 제작되지 않아서 참여를 못했거든요. 너무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인연이 있으면 어떻게든 출연하게 되더라고요. 처음부터 탄탄대로만 걸었던 배우가 아니라서 많은 경험을 했고, 그런 경험이 오래 무대에 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후배들, 또 관객이나 독자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습니다.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니가 그 자리에서 길을 열어줘서 힘이 된다’고 응원을 많이 해줘요. 그런데 잘 풀리지 않은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간절히 원해도 한 작품도 못할 때가 있거든요. 최근 한 팬분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라는 시집을 선물해 주셨어요. 공연도 배우들에게는 사모하는 일이잖아요. 무대에서 평가받는 일, 사람과 사람이 비교 당하는 것만큼 힘든 게 없는데 배우들은 숙명처럼 안고 가죠. 그래서 자기관리나 어느 정도의 욕심과 함께 강한 정신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신영숙 씨의 2020년 라인업도 이미 나와 있겠죠?
그렇죠(웃음). 일단 3월까지는 댄버스, 조시아나, 도나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공연하는 게 목표예요. 이후에는 좀 여유를 갖고 싶은데 <레베카> 도 지방 공연이 있고, <모차르트!>도 연말까지 콘서트가 이어질 것 같아요. 계속 특정 배역으로 무대에 서 있으니까 배우 신영숙으로도 알차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작년에 첫 단독 콘서트를 했는데, 관객들과 캐릭터가 아니라 신영숙으로 만나는 데서 오는 또 다른 기쁨이 있더라고요. 올해는 제대로 준비해서 더 큰 보답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뮤지컬배우로서 최근 몇 년간 계속 정점을 찍고 있는 만큼 그 다음도 생각할 것 같습니다.
내려오는 거요? 정점이라기보다는 계속 가는 거죠. 사모하는 일에 끝이 있나요(웃음). 뮤지컬이 제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신영숙에서 뮤지컬을 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이제는 나와 인연이 맞는 작품 하나하나를 최상으로 무대에 올리는 게 목표예요. 어렸을 때부터 조연을 많이 했기 때문에 조연과 주연에 대한 경계가 별로 없거든요. 하나의 역할일 뿐이고, 크든 작든 그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로 그 인물을 빛나게 하는 게 지금 제 꿈이에요. 그러니 목관리만 잘하면 사모하는 일을 끝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