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 바이오센서를 만들던 생화학 대학원생이 소설가가 되었다. 「관내분실」과 함께 필명으로 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한국과학문학상을 타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 김초엽은 ‘한국 SF의 우아한 계보’라 불리며 첫 번째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을 펴냈다. 할머니 과학자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마지막 생까지 최선을 다하고(「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촉망받는 연구자였던 생화학자는 사고로 태양계를 떠돌다 처음으로 외계 지성체와 만나 완전한 타자를 이해해보려 애쓴다((「스펙트럼」).
과학의 한계 안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김초엽 작가는 SF 소설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없지만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이야기는 “불가능성을 껴안는 것”(인아영 평론 중)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김초엽의 소설은 “잠정적 진실을 끊임없이 세워나가”며 진실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고자 했다.
산발적인 관심사가 하나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어요.
SF가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다 보니까 소소하게 읽히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많은 분이 읽어주셨어요. 책이 나오고 독자들을 계속 만나다 보니 소설가란 자의식이 조금 생긴 것 같아요.
책을 내기 전에는 소설가라는 의식이 약한 편이었어요?
문예지나 잡지에 글을 실으면 아무래도 단행본보다 독자분들이 덜 보시거든요. 쓰면서도 제 글을 어떤 사람들이 볼까 감이 안 생기기도 했고요. 피드백을 받더라도 지인과 작가님들만 있었는데, 독자 피드백을 많이 받은 게 의미 있었어요.
인터뷰도 꽤 많이 나왔어요. 매체의 관심과 독자의 관심을 둘 다 받은 셈이에요.
독자들 반응과 매체에서 주목하는 게 조금씩 포인트가 다르기는 해요. 보통 독자분들은 재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잘 읽히고 쉽게 읽히는 게 이유가 아니었나 싶고요. 매체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메시지나 주제의식인데, 둘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쓰다 보니까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쓰면서 고민하게 되잖아요.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데, 메시지만 이야기하면 선언이 되고, 재미를 붙이자니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 같고요.
쉽지 않은 일이에요. 메시지를 우선으로 내세우면 글이 교훈적이거나 재미가 없게 되기 쉬워서 쓸 때는 최대한 재미에 중점을 두고 써요. 쓰다 보면 평소에 생각하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것 같아요.
김원영 변호사님과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칼럼을 연재했어요. 소설의 주제 의식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아요.
칼럼으로 세상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과, 소설에서 담아내는 메시지가 상통하는 측면이 있어요.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데, 논픽션을 쓸 때는 메시지를 조금 더 선명하게 하려는 편이에요. 소설에서는 선명하지 않더라도 맥락적으로 파악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메시지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정소연 작가님 작품을 읽고 ‘SF가 타자와 소수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르’라고 깨달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 전에도 SF에 대한 관심이 있었나요?
어릴 때부터 과학을 좋아했어요. 과학을 접한 계기 자체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같은 책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학책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외국 저자들이 과학 책을 쓰면 SF를 레퍼런스로 많이 언급하더라고요. 과학을 좋아하면 SF 읽을 때도 재미있거든요. 처음에는 흥미로 시작했던 것 같아요. 크면서 SF에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관심사를 주요하게 다룬다는 걸 알게 됐고, 결국 산발적인 관심사가 하나로 묶이게 됐어요.
SF 습작의 계기도 궁금해요.
한동안 문학을 거의 안 읽다가 학교를 졸업할 때쯤 소설을 다시 읽고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해진 루틴을 따라서 글을 쓰면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작법서가 많이 나와 있잖아요. 대단한 글을 쓰겠다는 생각보다 그런 작법서를 읽으면서 저도 한 편의 글을 완성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첫 작품은 무슨 내용이었어요?
학교에서 소설 특강을 받았을 때 처음으로 완전한 단편을 썼던 거로 기억해요. SF는 아니었고 연필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흑연과 흑연을 둘러싼 나무 심의 입장 차이를 보여주는 단편이었어요(웃음). 둘 다 깎여나가지만 흑연은 자신이 깎여서 뭔가를 만드는데 나무 심은 그냥 깎여나가기만 한단 말이에요. 연필이 하나의 존재가 아니고 분리된 입장이 있는 게 아닐까 보여주는 거였죠. 그러다가 학교 SF 공모전에서 처음으로 SF를 썼어요.
음악가인 아버지와 시인인 어머니가 있는 가정환경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영향이 있죠. 가정 환경 때문에 책을 많이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처음에는 부모님께서 글을 직업으로 삼기보다 다른 일을 하면서 글을 쓰면 좋을 거라고 권유하셨어요. 글을 계속 쓰되 직업을 다른 걸로 찾아봐야겠다 하고 찾아보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요.
대학원 졸업 전에는 소설이 직업이 될 거라 생각한 적이 있나요?
작년까지는 직업으로 삼겠다는 마음보다 한동안 글에만 집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앞으로도 잘 모르겠어요. 내년까지 집필 일정이 잡혀 있어서 이 삶을 살고는 있지만(웃음) 앞으로 다양한 일을 해볼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상실을 재해석하기
“SF같지 않아 좋다”는 리뷰가 있었어요. 좋은 말이지만, SF 작가 입장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들 것 같아요.
과도기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다양한 SF를 접한 분들이 많지 않아요. 대부분 SF를 상업 영화로 접하다 보니까 남성중심적이고, 최첨단 과학이 나와야 할 것 같고, 인간의 이야기보다는 기술에 집중한다는 대중적 이미지가 있어요. 대중 인식과 실제 작품을 맞춰가다 보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 아닐까 싶어요. SF에 여러 가지 갈래가 있고, 저랑 비슷한 결의 작품들도 많이 있거든요.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아요.
등장인물 간의 감정을 묘사하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신경을 쓰는 부분이 있나요?
등장인물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읽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 같아요. 등장인물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상황에 감응할 수 있잖아요. 감정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어요. 그게 꼭 등장인물이 울거나 웃는 게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 자체가 뭔가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우리는 거기서 괴롭지만 그보다 더 행복할 거야”라는 메시지가 있었어요.
그런 모순적인 부분을 좋아해요. 특정한 것이 아름답기만 하거나 슬픈 것이 아니라 슬프면서 아름다울 수 있고, 불행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다면성이요.
작품에 무엇인가를 외로워하거나 그리워하는 등장인물이 많이 나와요.
쓰고 난 다음에야 제 작품에 상실을 겪은 인물이 많다는 걸 알았어요. 어릴 때부터 상실을 경험한 인물들이 상실 안에서 유의미한 것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이 가까운』도 좋아하는 책인데, 상실에서 이야기가 출발하거든요. 끝에 그 상실이 회복되는 건 아니에요. 상실을 주인공이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좋아해요.
「감정의 물성」은 물성을 가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건드렸어요. 스스로 물건에 욕심이 있는 편인가요?
그런 편이 아니어서 물질을 소유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으로 썼었어요. 책도 의외로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많이 사는 편이에요. 반응이 갈리더라고요. 물건을 모으는데 이입한 분도 있고 주인공 정아의 입장에서 읽었다는 분도 있고요.
「스펙트럼」에서는 할머니가 루이를 이해할 수 없음에도 이해하려고 해요. 끝내 이해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노력하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불가능성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죠. 타인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계속해서 이 상태로 놔둘 건지, 그럼에도 이 간격을 좁힐 건지 선택하는 문제죠. 과학에서 배운 태도가 있다면, 과학에는 절대적인 지식이 없어요. 모든 게 다 잠정적인 진실이에요. 알고 있는 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자세히 알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태도가 이 잠정적 진실을 실제적 진실에 가깝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꼭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불가해한 다른 존재들을 이해할 때에도 잠정적 진실을 끊임없이 세워나가면서 가까워가려고 시도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요. 어떤 존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어요.
미래 사회에 대해서 낙관적이지는 않다고 말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을 이야기하는 힘이 있다면요?
얼마 전에 유토피아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면서 유토피아가 거의 모든 사상에 의해 쓰였다는 걸 알고 흥미로웠어요. 페미니즘적, 남성 중심적, 사회주의적, 종교적 유토피아가 모두 있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유토피아인 사회가 다른 사람에게는 디스토피아가 되는 거죠. 낙관적인 답도 하나가 아니고 각자가 낙관적인 방법을 각자의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해요. 다만 억압받은 대상들이 비관에 빠지지 않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패배주의에 빠지면 내가 억압받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잖아요.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성을 찾을 것인가 궁리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교조적인 메시지로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능성은 이런 거라고 제시하는 거죠. 소설이 하는 역할 중 하나가 다양한 종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게 아닐까요? 단순히 질문만 던져 놓고 질문에 대해 비관적인 답을 내놓는 게 아니고, 비관적인 현실을 보여주더라도 결국은 여기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적어도 실마리 정도는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가족이 있는 행성을 향해 수만 광년을 가로지르는 안나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어요. 하지만 출발한 채로 여지를 남겨놓죠.
저는 주로 그 가능성의 목격자를 쓰거나, 아니면 미래 세대에서 답을 찾는 것 같아요. 앞선 세대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의 가능성이 될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해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지켜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지켜보는 사람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실패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는 미래 세대에 대한 가능성이 제일 크게 보였던 것 같아요.
쓰고 싶은 이야기를 최대한 쓰자
등장인물에 한국인 이름을 쓸 때와 다른 이름을 쓸 때 차이가 있나요?
대개 서구권 작품이 SF의 기준이 되다 보니까 읽다 보면 한국 정서와 조금 다른 측면이 있어요. 반드시 한국을 배경으로 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어울리는 걸 찾은 것 같아요. 「순례자들」은 이국적인 게 어울려서 배경을 그렇게 잡았고, 최근에 쓰는 작품은 무국적인 작품이 많아요. 한국인 이름을 쓰면서도 국적이 모호한 이름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한국인으로 묶이는 이름을 넣으면 동시대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이고, 어떤 국적으로 흐릿하게 만들면 나름대로의 효과가 있어요.
한국이 우주 기술과는 맞지 않는다는 자기 안의 검열 때문에 쓰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전세계에서 외계인과 최초로 만나는 국가가 한국이라고 한다면 어색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저보다 앞세대 작가가 계속해서 한국에 UFO가 들어오고 한국인들이 우주에 나가서 사는 사건을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작업을 해 왔어요. 지금은 이야기 안에서 어느 정도 한국도 SF의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게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무래도 최첨단 이야기보다는 어느 정도 보편이 된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니까, 한국인이 주인공이 되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거예요.
소수자를 소설에 쓰면서 ‘내가 너무 한국인만 쓰나? 여성만 쓰나?’ 하고 스스로 제약을 걸 때는 없나요?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쓰던 중에 남자주인공을 한 명 정도 넣어야 하나 생각하긴 했어요. 남성이 너무 없으면 현실과 괴리가 있을 테니까요. 여성들은 조금 더 자기 작품에 대해 정치적으로 옳아야 할 것 같고, 비판 받는 부분이 적어야 할 것 같고, 상황적으로 그런 고민을 많이 하게 돼요. 저도 고민하다가 지금은 일부러 자유롭게 쓰려고 해요. 물론 고민이 작품을 좋게 만든다는 장점도 있지만, 오히려 쓰고 싶은 이야기를 못 쓰게 되는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최대한 쓰자고 마음먹고 있어요.
SF는 사고실험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변인을 통제하는 과정이 과학 실험이라면, SF를 쓰면서 통제하는 변인은 뭘까요?
한 가지 사건이라도 굉장히 복합적인 여러 가지 면이 있어요. SF에서는 사건이나 설정을 통해 특정 측면을 극대화하죠. 예를 들어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디스토피아는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제한 설정을 통해 인간성의 어떤 측면을 강조해요. 「관내분실」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는 리뷰가 많았는데, 상황을 한정시킨 세트 안에서는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파악하기 힘든 부분들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단편은 상대적으로 일부분에 집중하기 쉽지만, 장편은 또 다른 것 같아요. 장편을 쓰고 나서 다시 고쳐 쓰고 있다고 들었어요.
확실히 단편과 장편은 다른 장르인 것 같아요. 단편에서는 어느 하나의 감정에, 어느 짜릿한 순간에 집중할 수 있어요. 물론 그 순간이 담는 감정은 복합적일 수 있겠죠. 하지만 장편은 곁가지가 중요하고 하나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기보다, 여러 개의 절정이 있고 그것들이 마지막에 갈무리되는 것 같아요. 쓰면서 차이를 알아가고 있어요.
소설 아이디어를 얻는 곳이 있나요?
주로 과학 논픽션이나 과학 기사를 많이 보는 편이에요. 뭔가 독특해 보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삶에서 오는 이야기와 결합해요. 아니면 클리셰를 변용하거나요. SF는 사이보그라든지 하는 클리셰가 계속 변용되는 장르다 보니까 앞의 작품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독특한 소재 중에 써보고 싶은 것들은 많이 있는데, 이야기가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어떤 건 2주 만에 떠올라서 쓰는 소설도 있고, 재미있어 보여서 메모했는데 아주 나중에 써먹는 것도 있어요. 예를 들어 소재 두 개를 생각했는데, 하나는 혀 미각세포가 남보다 훨씬 많고 뛰어난 초미각자였어요. 재미있는 소재라고 생각만 하다가 계속 못 쓰다가 얼마 전에 썼어요. 한 번은 세 번째 팔을 기계 팔로 단 행위 예술 아티스트가 있었어요. 이것도 되게 옛날에 본 소재였는데 최근에 썼어요. 언제 무엇이 소설이 될지 모르니까 일단 메모를 하고 보는 편이에요.
요즘 쓰는 건 어때요? ‘괴롭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한 상태인가요?
힘들게 쓰는 편이고, 쓰고 나서는 되게 기분 좋아요. 완성하고 나서 읽을 때는 좋은데, 쓸 때는 마감 때문에 힘들고요.
주로 언제 쓰는 편이에요?
정해진 시간은 없어요. 낮에 놀았다 싶으면 밤에 쓰고 낮에 좀 열심히 썼다 싶으면 밤에 쉬는 편인데……. 보통 미루고 미뤄서 새벽이 될 때 많이 작업하죠.
다음 소설은 어떻게 만나게 될까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사이보그가 되다’ 칼럼을 책으로 묶어 내려고 하고 있고, 장편 초고가 하나 있는데 다시 쓰고 있어요. 마감을 지키다 보면 단편집을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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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저 | 허블
자신만이 그려낼 수 있는 김초엽 특유의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투명하고 아름답지만 순진하지만은 않은,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근사한 세계를 손에 잡힐 듯 이야기에 담아냈다.
정의정
uijungchung@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