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근처에 생긴 국숫집에 많게는 일주일에 세 번 간 적도 있다. 비빔국수와 잔치국수를 번갈아 맛있게 먹고 오후에 쓸 에너지를 충전해서 나오곤 했다. 그날도 주린 배를 안고 새빨간 양념의 먹음직스러운 비빔국수를 앞에 두고 있었다. 한 젓가락 떠서 입에 가져갔는데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목에서 걸렸다. 긴장해서 밥이 안 넘어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알았다.
그날 저녁 서울의 한 도서관에서 강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동네 출신 작가라는 이유로, 말하자면 연고지 전형으로 내가 사는 지역 도서관에서 강연해 본 적이 있었지만 타 지역 도서관은 처음이고 새로 준비한 내용인 데다 어떤 분위기일지 몰라 두렵고 막막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열 명 남짓한 분만 와 계신 오붓한 분위기였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여유와 용기가 샘솟아 마치 테드 강연자라도 된 것처럼 무대를 오가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었다. 미션 완수. 하지만 나에겐 더 큰 산이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처음 가 보는 충남 청양에서 처음으로 중학생 대상으로 강연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달 전에 번역을 마친 여성의 감정 노동에 관한 책에서 저자는 유난히 ‘라이즈 투 더 오케이젼(rise to the occasion)’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난국에 대처하다, 위기에 처해 수완을 발휘하다, 임기응변에 능하다’의 뜻이다. ‘rise’가 ‘올라가다’이고 ‘occasion’이 ‘기회, 경우’의 뜻이니 기회에서 올라가다, 즉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필요한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의미다. ‘occasion’ 자리에 ‘challenge(도전)’가 오기도 한다.
저자는 여성들이 원래부터 가사 노동과 감정 노동에 능한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하다 보니 잘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아픈데 출근해야 하고 도우미는 연락이 안 될 때도 여성들은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여 문제 해결을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유능한 멀티 플레이어가 된다. 저자는 여덟 살 이하 아이 셋을 키우며 잡지에 글을 쓰고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책을 집필하는 풀타임 워킹 맘이기에 당연히 남편과 가사와 육아를 분담한다. 하지만 주도적으로 일을 찾아 하지 않고 뭘 해도 서툰 남편에게 거듭 실망하고 그때마다 한숨 쉬며 외친다.
“왜 우리의 파트너들은 더 끝까지 노력해 보지 않는 걸까?” 이때 나는 ‘rise to the occasion’을 ‘끝까지 노력하다’라고 번역했다. ‘숨겨져 있던 능력을 발휘하다”라고도 했다.
나도 숨겨져 있는지 없는지 모를 수완이나 능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하지만 다음 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청양행 버스를 기다리며 거의 공포에 가까운 초조와 불안에 빠져 있었다. 우리 딸이 경고한 대로 청중인 학생들은 억지로 앉아 졸거나 딴짓을 할 것이며 나는 더듬거리다 대대적으로 망칠 것이다. 90퍼센트의 자학과 10퍼센트의 자신감 사이를 오다가 보니 어느새 청양고추 가로등이 서 있는 청소년 문화관에 도착했고 남녀 학생 30여 명이 강의실을 메웠다. 잘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내가 잘 아는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와 『헝거』 이야기를 할 테니까. 그러나 강의를 시작하려는 찰나, 준비 과정에서 생긴 착오 때문에 내가 준비한 PT 자료가 컴퓨터에 뜨지 않았다. 게다가 인터넷이 아직 설치가 안 된 곳이었다. 교장 선생님과 기자까지 온 자리였고 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일단 록산 게이의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이 동분서주한 끝에 천만다행으로 자료가 열리면서 그때부터 준비한 대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학생들을 쳐다보며 강의를 마쳤고, 질문에 대답하고 준비한 책과 사탕을 나눠 주었다.
드디어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위기가 있었지만 무사히 할 일을 마쳐서, 집중해서 들어 주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준 학생들이 고마워서, 그동안 쌓였던 긴장이 탁 풀려서 버스 터미널 옆 터미널 다방 앞에서 조금 울었다.
감정 노동 책의 저자는 몇 달 동안 글 쓰느라 서재에서 두문불출하다 어느 날 거실에 나와 보고 깜짝 놀란다. 그녀가 남편에게 집안일을 일임하고 일에 집중하는 사이, 남편은 세 아이를 야무지게 챙겨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냉장고를 채워 놓고 청소까지 완벽하게 해 놓은 것이다.
그제야 저자는 오직 여성이나 싱글 대디에게만 썼던 그 표현을 처음으로 남편을 향해서 쓴다. ‘rise to the occasion’. 나는 “우리 남편은 내 도움 없이 모든 일을 거뜬히 해냈다”라고 옮겼다. 저자의 남편도 나도 닥치니 해냈다. 그리고 저자의 남편처럼 나도 (기대치가 낮아서일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잘 해냈다고 믿고 싶다.
그즈음 읽은 레슬리 베네츠의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에서 이 구절이 눈에 쏙 들어왔다.
“도전을 즐기며 일을 해내다 보면 아무리 겸손한 여성이라도 자존감이 높아진다. 일은 전문가가 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나도 한 계단씩 올라가고 있는 것일까. 자존감이 높아졌을까. 그 뒤로 6주간의 번역 강의도 마무리했고 페미니즘 기사 읽기 모임에서도 내 몫을 해내긴 했다.
문제는 다음 주에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한다는 것. 고등학생 대상 진로 강연은 처음이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또다시 밥맛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노지양(번역가)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KBS와 EBS에서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나쁜 페미니스트》, 《위험한 공주들》, 《마음에게 말 걸기》, 《스틸 미싱》, 《베를린을 그리다》, 《나는 그럭저럭 살지 않기로 했다》 등 6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souju82
2019.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