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 시계를 다 없애 버린다고 해도
누군가를 잃고, 그 누군가를 생각할 때마다 신철규의 「유빙」을 떠올린다.
글ㆍ사진 백세희(작가)
201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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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며칠 전 사진 한 장을 보게 됐다. 전 애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었다. 새 애인이 생겼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동생은 그 사람의 번호를 지운 내게(사실 차단 당했다) 간혹 사진을 보여 주고는 했다.


사진을 보고는 무언가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고, 그날 밤엔 기다렸다는 듯 꿈을 꾸었다. 대체로 후회와 아픔, 비웃음과 복수, 분노 등의 감정이 함께 들끓는 꿈이었다. 잠은 깼지만 감정은 그대로 남아 한두 시간쯤 멍하게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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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를 잃고, 그 누군가를 생각할 때마다 신철규의 「유빙」을 떠올린다. 대학 시절 가까웠던 친구가 이 시를 처음 보여 주었는데,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면서도 깊고 오래 남는 글이었다. 매번 그의 신작 시를 찾아 읽으며 한 권으로 묶일 시집을 꽤 오래 기다리기도 했다.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 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 가는 유빙처럼,

「유빙」 부분

 

이 시는 사랑과 관계를 말하고, 또 잃는 시다. 두 사람은 같은 곳을 가고 있다고(혹은 싶다고) 생각해도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일쑤다. 유빙이라는 단어처럼 관계는 각자 다른 모양과 다른 속도, 다른 곳으로 떠내려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함께였던 시간은 균열되고 흩어진다.


소중한 관계를 잃을 때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미치게 할 때가 많았다. 나는 시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졌고, 그래서 과거를 곱씹으며 현재와 미래까지 망쳐 버리는 게 습관이자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괴로웠던 건 최악으로 굴었던 지난날 나의 태도였다. 나는 습관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했다. 그들에게 많은 기대를 떠넘기고 그것을 몽땅 채워 주길 바랐다. 무리해서라도 기대를 채워 주는 이에게는 오히려 더 많은 요구를 했고, 그 기대를 짐처럼 여기는 이와는 쉽게 관계를 끊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함부로 대한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었다. 다시 돌아가서 엉망으로 찢어진 관계를 매끄럽게 다듬고 싶었다. 그때 했던 실수를 바로잡고, 조금만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조금이라도 더.


그래서 이 시는 내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늘 마음을 괴롭게 하던 시다.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 버린다고 해도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관계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고 난 후 오랜만에 이 시를 꺼내 읽었다. 사실 과거 그 사람과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결단코 없다.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지 못한 후회와 아쉬움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일 때마다
서로의 귀가 스칠 때마다
같은 노래가 급류가 되어 우리의 심장을 지나간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

「연인」 부분

 

그리고 다른 페이지의 시를 읽다가 강아지들과 산책을 했다. 아침저녁 두 번씩 매일 빼놓지 않고 하는데도 강아지들은 늘 처음처럼 기뻐하며 전혀 익숙해 하지 않는다. 나를 볼 때마다 늘 처음처럼 반기는 모습을 보면서, 소중한 걸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난 이제 소중한 이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는다는 건 굉장히 차가운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온기를 가지고 있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기대하지 않기에 내가 원하는 말만 뱉기보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작은 것에도 크게 기뻐할 수 있다. 바라면 바랄수록 더 커지는 욕심도 생길 리가 없다.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약간의 여백을 두고 선 채 서로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것,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는 구절처럼, 현재를 봄으로써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시간이 내게 알려 준 건 지금의 시간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를 보여 주고는 한다. 좋은 시를 알려 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나를 위한 마음도 스며 있다. 내게 이 행위는 일종의 다짐이다. 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후회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매 순간을 기억하고, 익숙해지거나 지루해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감정을 환기시켜 주는 글을 읽는 건데, 신철규의 「유빙」은 내게 그런 시다. 내가 누군가를 잃지 않기 위해, 온 세상 시계를 다 없애 버린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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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희(작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5년간 일했습니다. 10년 넘게 기분부전장애(경도의 우울증)와 불안장애를 앓으며 정신과를 전전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지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떡볶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