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 스티븐스>의 포스터
영화 <미스 스티븐스>는 풋풋함의 결정체다. 학교에서 친구도 없고 숙제도 곧잘 빠뜨리며 행동장애로 치료받는 고등학생 ‘빌리’와 다소 까칠한 영어 교사 ‘스티븐스’는 주말 사흘간 ‘연극 대회’에 함께하며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운전하는 스티븐스의 취향대로 옛날 노래만 나오니 동행한 세 명의 학생 중 두 명은 고리타분한 ‘아버지 노래 같다’는 말로 은근히 싫은 티를 내지만 빌리는 좋아하며 심지어 선생과 듀엣으로 따라 부르기도 한다. 밴드 <아메리카>의
문제아로 취급받는 빌리에게 스티븐스는 물은 적 있다. “누구랑 얘기는 하니?” 얼마나 시니컬한 답이 돌아왔는지 모른다. “얘기할 사람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어쩌면 두 사람은 바로 그 점, 누구에게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특성 때문에 ‘얘기할 사람’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어린 빌리와의 공통점으로 두 사람은 신분도 나이도 앞세우지 않고 대화가 가능했다. 물론 처음부터 대화가 수월해던 것은 아니다. 각각 자신의 마음을 얘기하는 타입이 아니니까.
감독 줄리아 하트의 데뷔작인 <미스 스티븐스>는 청춘 배우들의 열연까지 더해져, 보기만 해도 푸르게 물들 듯한 여운을 남긴다.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여교사 스티븐스 역의 배우 릴리 레이브도 매력 넘치지만 빌리 역을 맡은 20대 초반의 티모시 샬라메는 복잡한 내면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경이로운 재능을 가졌다.
티모시 샬라메가 누구인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 역으로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여럿 수상했던 연기자다. 티모시 샬라메가 “나에게 <미스 스티븐스>는 연기 인생 여정의 프롤로그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1장인 셈이다”고 고백했듯이, 그의 연기력, 그 싹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 <미스 스티븐스>다. 영화 속에서 연극 대회 장면, <세일즈맨의 죽음> 모놀로그를 통해 티모시는 특유의 연기를 선보인다. 애절한 눈빛과 연극 대사의 정확한 호흡과 발성으로 영화의 배역에 녹아든 모습이 강렬했다.
티모시의 한국 팬들은 끊임없이 <미스 스티븐스> 극장 개봉을 요구하고 응원했다. 티모시 샬라메가 스스로 자신의 연기 생활 프롤로그라고 밝혔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출연 이전 작품이라는 정보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년 전 제작된 <미스 스티븐스>는 전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극장 상영을 하게 되었다. 티모시의 힘, 한국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의 힘이다.
감독 줄리아 하트가 교사였던 시절의 체험을 각본으로 쓰고 연출하면서 리얼리티가 살았다. 극중 배우였던 엄마와 단둘이 살던 스티븐스는 1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활동하던 극장의 관람석에 앉아서 밀려드는 상실감에 정신을 놓을 정도가 되었다. 연극 대회 전날 밤이었다. 눈물 맺힌 스티븐스, 릴리 레이브는 여배우 질 클레이버그의 딸이기도 하다.
영화 <미스 스티븐스>의 한 장면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교사는 연극 대회 동행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학교에서 매일 마주치고 수업 시간에도 자유롭게 토론하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각각의 상처와 결함, 지향점을 알기 어려웠다. 특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냉정한 교사로서의 면모에 감춰진 스티븐스의 슬픈 기운을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섬세한 빌리는 어른보다 더 성숙한 감수성으로 스티븐스의 마음을 열고 어루만진다.
약을 먹으면 활력이 없고, 약을 먹지 않으면 예민해져 생활하기 어려운 빌리의 감각이 스티븐스의 상처를 느끼고 들여다보는 순간, “내 말의 의미를 아는” 어린 너 앞에서 스티븐스는 울기도 한다.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데에는 깊은 마음만 필요하다. 누가 어른이고 아이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연극 대회 수상자가 된 빌리는 학교로 돌아와 스티븐스에게 말한다. “선생님도 누군가에게 기대야 해요.” 괜찮은 척, 슬프지 않은 척하며 살았던 스티븐스의 마음 모서리가 빌리의 따뜻한 말에 감화되어 부드럽게 다듬어진다.
세상이라는 큰 학교에서, 마음이 마음을 부르고 마침내 진심을 주고받는 공부를 함께 마친 두 사람의 내일이 궁금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sunkinn
2019.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