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인천, 제2의 도시 ‘남포특별시’
남포시는 광복 후 북한 땅이 된 뒤에도 진남포라고 불리다가 북한 당국이 일제 잔재를 청산하면서 1952년 ‘남포’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이때 시로 승격되면서 1963년부터 주변 지역을 아우르며 영역을 넓혀나갔다. 1979년 ‘남포직할시’로 승격되었다.
글ㆍ사진 김정한(뉴스1 국제부 기자)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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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시는 단군 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영토에 속해 있던 곳이다. 고구려시대에는 중요한 곳이었으며, 이 때문에 대형 고분 등 고구려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남포시 강서구에 자리한 고분들은 고분벽화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예로, 북한의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덕흥리 벽화고분에 그려진 벽화는 다양한 매체에 소개된 것이라 우리에게도 낯익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깔리면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부산, 인천을 잇는 거대 항구가 되었다. 남포시는 광복 후 북한 땅이 된 뒤에도 진남포라고 불리다가 북한 당국이 일제 잔재를 청산하면서 1952년 ‘남포’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이때 시로 승격되면서 1963년부터 주변 지역을 아우르며 영역을 넓혀나갔다. 1979년 ‘남포직할시’로 승격되었고, 그 뒤로 행정구역 개편이 잦았다. 2004년 평안남도에 속하게 되면서 ‘남포특급시’가 되었다. 현재와 같이 특별시로 승격된 것은 2010년의 일이다. 특별시로 승격된 뒤에는 주변에 있던 강서군, 대안군, 온천군, 룡강군, 천리마군이 편입되어 그 규모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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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갑문


대동강 하류의 끝살뿌리-피도-광량만 사이에 20리나 되는 바다를 가로막아 건설한 갑문. 이 갑문에는 3개의 갑실이 있어 1호 갑실로는 2,000톤급, 2호 갑실로는 5만 톤급, 3호 갑실로는 2만 톤급 배들이 드나들 수 있다. 건설할 때는 남포갑문이라고 했지만 1986년 6월 공사를 완성하면서 서해갑문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서해갑문이 완성되면서 대동강 하류에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생겨났다. 그 물로 가뭄과 홍수 피해를 막고 농업에 필요한 물은 물론 공업용수와 주변 주민들의 식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갑문 댐 위로 철길과 도로가 생기면서 바닷길뿐 아니라 육지 교통도 원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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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 삼묘리 고분


남포시 강서군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고분군. 고분이 3개 있어 ‘강서3묘’로 불렸다. 고분들은 고구려 후기인 6~7세기 전반의 것들이다. 모두 굴식돌방 무덤의 단실묘이며 재료는 화강암이다. 3개 중 가장 큰 대묘와 그다음 크기인 중묘에 화려한 벽화가 있다. 강서대묘는 고구려 벽화무덤을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이다. 벽화의 내용은 사신도 및 장식 무늬이다. 남벽의 입구 주변에는 덩굴풀이 꼬이며 뻗어나가는 무늬인 인동 당초 무늬를 그려 장식했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주작을 한 마리씩 그렸으며,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 천장 중앙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각각 그렸다. 강서대묘의 벽화는 고구려는 물론 당시 동방사신미술을 대표하는 걸작품들이다. 중묘의 벽화 ‘백호도’ 또한 무척 유명하다.

 



 

 

북한은 처음이지?김정한 저 | 라이스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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