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나는 안으로 조금씩 부스러지고 있었다.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오래된 감정들로 딱딱해진 응어리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게 분명했다. 손을 넣어 안을 만져볼 도리가 없으므로, 좀 걷기로 했다. 목도리와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파주의 겨울밤은 고요하고 바람이 없어 춥지 않았다. 개미 한 마리도 없구나, 혼잣말을 하며 무작정 걸었다.
좀 쉴 요량으로 벤치에 앉았다. 떠오르는 상념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였다. 고양이 한 마리가 사뿐사뿐, 벤치를 향해 걸어왔다. 고양이를 향한 내 짝사랑은 꽤 오래 되었다.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경외감에 가까운 감정이 고양이를 볼 때마다 들었다. 우습게도 나는 고양이 앞에 서면 늘 심장이 뛴다. 좋아서, 그리고 두려워서(경외!). 사실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쩔쩔맸다.
가까이에서 보니 베이지색 털에 납작하게 코가 눌린 페르시아고양이었다. 떠돌이 길고양이인지, 근처 주택의 고양이인데 잠시 외출한 건지 가늠이 안 됐다. 경계심이 없고 모양새가 깔끔한 것을 보아 후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고양이는 내게 눈을 찡긋 감아 보이더니 벤치 위로 뛰어올라왔다. 둘이 벤치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엉덩이는 내 쪽을 향해 두고, 밤의 가운데를 응시하는 듯 시선을 멀리 둔 고양이가 내 옆에 있다니. 겨울밤의 호사였다.
밤을 두려워하는 고양이는 없다. 고양이는 밤의 야경꾼, 밤을 다스리는 여왕이다. 내 옆에 앉은 고양이 역시 품위를 잃지 않고 우아하게 앉아있었다. 모든 동작에 서두름이 없고, 지체하지도 않는다. 장 그르니에는 <고양이 물루>라는 산문에서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장 그르니에 『섬』 37쪽.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진 존재. 어쩌면 이 아이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일지도 모르겠군. 작은 목소리로 나비야, 하고 부르니 침묵이 돌아온다. 등선이 이토록 우아한 동물이 또 있을까. 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역시 침묵. 벤치에 고양이와 둘이 앉아있으니 시끄러운 마음이 고요해졌다. 나는 입 밖으로 꺼내면 금세 누추해지고 마는 소소한 일들을 고양이 앞에 털어놓았다. 울적한 기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양이는 잠자코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가만히. 보고 있지 않지만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얼마 동안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러다 내가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너는 세상을 어떻게 견디지, 혼자?”
그 애는 일어나더니, 폴짝 뛰어 벤치에서 내려갔다. 내게서 2미터쯤 거리를 두고 자리에 엎드린 고양이.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그리고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마. 그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멀어진 고양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리 와, 내 곁에 다시 앉아 보렴, 그 애를 불러봤지만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애는 어둠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는 자기 뒷모습을 한동안 더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일어나 떠나버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표표히, 밤을 가로질러 갔다.
고양이는 내게 질문을 던지고 떠났다. 혼자 견디는 법,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존재하는 법, 밤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법을 궁리해 보라고.
외투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집을 향해 걸었다. 조금은, 용기가 생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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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쟝 그르니에 저/김화영 역 | 민음사
철학적 사유라 해서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개 한마리의 죽음에서 떠 올린 일상적 추억,튀니지의 작은 해변도시에서 발견한 꽃 핀 테라스,그리고 지중해 해안가의 무덤 같은 것들이 글의 소재다.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찻잎미경
2019.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