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엄마는 지금도 ‘남의 주방’에서 일한다. 제 한 몸이 가진 것의 전부인 사람에게 건강 문제는 생계에 앞설 수 없는 부차적 문제가 된다. 따지고 보면 엄마는 늘 어딘가 아팠다. 불이나 기름에 데거나, 대형 솥을 반복적으로 옮기는 동안 생기는 근육통을 달고 살았다. 그런 상처는 연고와 밴드와 파스 따위로 임시처방하면 그만이었다. 엄마의 몸에 오래 기대 살았던 나는 해외 출장이나 여행 갈 때면 그 지역의 유명하다는 파스 제품을 종류와 크기별로 사다 나르곤 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엄마의 몸은 파스와 연고로 해결되지 않는 영역에서 무너지곤 했다. 자연스러운 노화의 진행이라기엔 변화가 급격했다. 한 군데가 아프기 시작하니, 연쇄적으로 고장 났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란 인터넷으로 대형병원의 진료나 수술 일정을 예약하고, 엄마 혼자 복잡하고 미로 같은 병원에 가지 않도록 동행하는 일이 됐다.
수술 일정을 잡고 나오던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정말 아이를 낳지 않을 거냐고. 지겹도록 듣고 답했던 질문 앞에서 나는 입을 닫았다. 엄마가 체념한 듯 혼잣말을 했다. “너는 딸도 없고 불쌍하다.” 그날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이 아주 좋다고. 그건 엄마가 나로 인해 불행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출산은 나와 짝꿍이 세운 이 관계의 계획표에 없는 일이었다. 우리에게 ‘아이를 낳아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아이를 왜 낳아야 하는가’라는 우리의 질문에는 납득할 수 없는 답만 잔뜩 돌아오곤 했다. 사람들은 종종 우리에게 조언하곤 했다. 아이가 없으면 부부관계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내용이 주였다. 적어도 그 조언 앞에서 우리는 단호했다. 아이가 있어야만 겨우 유지되는 관계라면 우리는 미련이 없으니까. 그런 때가 온다면 잘 헤어져야 한다고 다짐하곤 했다.
무엇보다 짝꿍은 ‘다음 미션’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고, 졸업하면 취업하고, 취업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당위’와 ‘정상’에 대한 압력을 거스르고 자기 의지로 살고 싶어 했다. 그는 지금의 기쁨과 당장의 만족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이다.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 기쁨과 만족 안에 내가 포함되었다. 결혼 전 자녀 계획에 관해 대화할 때 그의 전제 조건은 하나였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는 임신과 출산에 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함을 알고 있었고,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 만큼 내 의지와 생각이 결정의 전부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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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그 말이 몹시 서운하고 외로웠다. 나 역시 일찌감치 아이를 내 인생에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해왔다. 아이를 통해 미래를 사는 게 두려웠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살아온 가난을 내 세대에서 끊어낼 방법이 비출산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가 살아야 할 미래를 예상할 때마다 몸을 떨었고, 내가 자라면서 경험한 고통을 그때마다 새롭게 곱씹었다. 더 공포스러운 일은 이 사회가 출산한 여성에게 ‘그 후’를 계획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일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출산과 육아를 이유로 결국엔 일을 포기한 재능 있는 여성을 너무 많이 보았다.
하지만 짝꿍이 온몸의 무게로 나를 지긋이 눌러올 때, 그 무게가 주는 기쁨과 행복이 있었다. 품에 코를 박고서 그의 동맥이 팔딱팔딱 움직이는 걸 감각할 때마다, 잠든 모습을 오래 바라보며 눈으로 그의 얼굴을 만질 때마다, 나는 가끔 아이를 원했다. 그러면서도 생리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손톱을 물어뜯었다. 관련한 모든 일이 온전히 나의 일이라는 게 부당하다고 날뛰었다. 피임을 해왔으니 당연한 일인데도, 임신테스트기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으면 실망했다. 갖고 싶고, 안 갖고 싶었다. 그 마음은 동시에, 또는 시간차를 두고 솟아났다. 내 마음에는 때때로 불기둥이 솟았다.
나의 ‘비합리’와 ‘비이성’으로 둘 다 고통 받던 즈음, 우리는 일정 기간을 정하고 임신을 우연에 맡겨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1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자주 조바심이 났다. 가져도 문제, 안 가져도 문제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에 자주 휘청였다. 통상 피임을 하지 않은 부부가 1년 이내 임신이 되지 않는 걸 불임이라고 한다. 아이를 ‘안’ 갖는 것과 ‘못’ 갖는 것은 달랐다. 키울 자신도 없으면서, 막상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니 손 안의 사탕을 뺏긴 느낌이었다.
이 감정의 폭풍을 이성적으로 다루고 싶었을 때 집어든 책이 있다. 가임기 여성이 수없이 맞닥뜨리는 질문 앞에서 『아이 없는 완전한 삶』 (푸른숲, 2016)의 저자인 엘런 L. 워커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녀가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모른다. ‘아이가 없어요’라고 대답하면 난감해한다.”(19쪽)
또래들이 하나둘 아이를 낳기 시작하는 시기를 그저 흘려보내고 있자니 저자 역시 처신하기 힘들고 어색했다. 아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족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현재 아이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정확히 보여주고 싶었다.”(12쪽)
저자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세 가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성인이 되면 으레 부모가 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길인 양 살아가던 세대를 지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피임약 덕분에 자녀를 가질지 말지 선택할 수 있게 됐고, 자녀 없이 사는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겼으며, 일부 부모들은 자녀를 낳은 일을 후회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언한다. 아이가 없는 사람들은 ‘준비가 안 된 사람’ 혹은 ‘일반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가 없는 인생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거라고. 자신을 상황의 희생자로 여기는 대신 지금처럼 아이가 없는 상태로 살게 되기까지 삶의 여정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우리 사회에는 아이를 낳지 않으면 자녀 양육에 따르는 귀중한 경험의 ‘기회를 놓친다’는 경고 메시지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인생이 제공하는 모든 경험을 전부 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경험을 선택하고, 놓친 경험에는 크게 마음 쓰지 않고 넘길 수 있어야 한다.” (94~95쪽)
취재하며 친구가 된 사람이 있다. 그도 우리처럼 아이가 없었다. 얼마 전 그와 만난 자리에서 나는 오랫동안 그의 ‘사적인 삶’에 관해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레 물었다. 술잔이 오가고, 그와 나 사이에 떡볶이가 끓고 있었다. 질문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는 일부러 갖지 않으셨나요?” 그는 주저 없이 답했다. “안 생겼다는 게 정확하죠. 같이 사는 친구랑 얘기를 해봤어요. ‘의학적인 조치를 취해서라도 아이를 갖고 싶은가.’ 근데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고요.”
나는 출산과 비출산 사이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가 가진 정답이 무엇이든 이유와 입장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내가 분명히 느끼는 슬픔과 상실은 충분히 설명이 안 됐다. 그래서 ‘당연히’ 중간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삶도 좀 더 가뿐해졌다. ‘그렇게까지는’ 원하지 않는다. 내 마음 역시 거기에 좀 더 가까웠으니까. 그제야 나는 현재 주어진 삶의 조건에 보다 집중하게 됐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복잡한 마음의 결을 나눌 필요를 느꼈다.
『엄마됨을 후회함』 (반니, 2016)은 『아이 없는 완전한 삶』 의 ‘짝꿍 책’이라 할 만하다. 책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다양한 사회 계층 여성들을 만나 이들이 엄마가 된 경로를 추적한다. 그리고 여성을 ‘엄마가 되는 길’로 몰고 있는 사회를 여성의 목소리로 폭로한다. 『엄마됨을 후회함』 의 저자 오나 도나스는 말한다. “고통당하지 않고자 기꺼이 논쟁에 휘말리는 여성과 엄마들은 언젠가, 어떻게든, 무언가를 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럴 만하다.”(25쪽) 중요한 건 이 문장을 기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여성에 의해 태어났다. 하지만 여성은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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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됨을 후회함오나 도나스 저/송소민 역 | 반니
여러 감정들처럼 후회 또한 가치나 욕구, 결정, 개인사가 반영된 주관적인 감정상태이지만 주변과 사회환경에 따라 형성되기도 한다. 따라서 후회가 표현되느냐 아니냐는 우리 사회에 대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일호(시사IN 기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주 ‘이상한 수치심’을 느낀다.
쭈꾸미
2019.01.24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