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강단에서 일본어와 일본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가 풀어내는 일본은 참으로 흥미롭다. 수박 겉핥기식의 일본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한 관점이 투영된 일본이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에 뿌리내린 저자의 독특한 이력이 일본의 신화, 역사, 정치, 경제, 생활 문화와 교육 등을 만나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좀 더 진솔한 일본이 담겨 있다. 시기와 질시의 대상도,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도 아닌,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서의 일본이 따뜻하고 잔잔하게 그려진다.
일본어 번역서를 60종 넘게 내신 잘 알려진 일본어 번역가이신데요. 이번엔 직접 에세이를 쓰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나만의 도쿄』 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일만에 읽는 일본사』가 제 이름을 달고 처음 선보인 번역서입니다. 그게 2000년도의 일입니다.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했다고 맡겨진 일이었고, 이 책을 시작으로 많은 책을 번역했습니다. 번역은 아이를 키우고 논문을 준비하며 할 수 있는 참 좋은 일이었습니다. 번역서이기는 하지만 책이 출간되는 순간의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히노하라 시게아키의 『삶이 즐거워지는 15가지 습관』을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책을 우리말로 옮기며 감동이 있어 그에게 연하장을 보냈더니 백 세 노인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와 새로 출간한 책을 뽁뽁이 봉투에 담아 보내주셨습니다. 그 뽁뽁이 봉투는 재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제 입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런 글들이 모여 책이 되었습니다. 누구의 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글을 내보인다는 것은 두려움과 동시에 커다란 기쁨입니다. 번역가가 아니라 ‘글쟁이’라고 불리는 기쁨입니다.
『나만의 도쿄』 라는 책 제목이 참 예쁜 것 같습니다. 도쿄에서 오래 사셨고 선생님의 어머니는 지금도 도쿄에서 사시는데요. 이 책의 독자들이 도쿄를 찾았을 때 둘러보면 좋을 만한 ‘도쿄의 어딘가’를 듣고 싶습니다.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도쿄는 많은 사람들의 여행지입니다. 깃발을 든 가이드의 안내를 받기도 했을 것이고, 지도만 하나 들고 여기저기 기웃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일본에 가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고, 지금도 어머니와 동생이 사는 곳이니 도쿄는 여행지가 아니라 생활의 공간입니다. 그러니 어떤 여행지를 말하라면 아는 것이 없습니다. 도쿄타워에조차 올라가 본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무 역에나 내려 안으로 한 블록 들어와 걸으시기 바랍니다. 거리는 의외로 지저분하고 또 의외로 깨끗합니다. 도저히 운영될 것 같지 않은 가게들이 띄엄띄엄 있을 겁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일본의 에너지가 느껴진다면 도쿄 여행은 ‘성공’입니다. 굳이 한 곳을 꼽자면 신주쿠에서 전철을 타고 서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무사시노를 소개합니다. “무사시노 들녘을 오늘은 태우지 마시오. 푸릇푸릇한 젊은 남자도 나도 숨어 있으니.”천 년 전 여인이 이런 시가를 읊은 동네이자 영화 <4월 이야기>에서의 따뜻함과 한적함이 담긴 동네입니다. 역시 그냥 걸으시면 됩니다.
선생님은 도쿄에서 초중고교를 마치고 대학은 서울에서 다니셨어요. 반대로 선생님 따님은 한국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대학은 일본으로 가셨고요. 고3 수험생과 고3 엄마를 모두 겪은 입장에서 한국과 일본의 수험생활을 비교하면 어떤가요?
저는 일본에서 입시 고교가 아닌 평범한 공립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나이의 누구나 그러하듯 제 친구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입시는 커다란 그림 속의 작은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입시’의 커다람에 파묻혀 자신의 진정한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일본에서도 대학 진학은 중요합니다. 단, 모든 학생이 아니라 대학을 가고자 하는 학생들에 한해 그렇습니다. 우리와 다른 것은 그 차이입니다.
일찍 그림 공부를 시작한 딸아이가 일본으로 유학 가기로 결심하고, 일본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의 일입니다. 일본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제 딸의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이리 잘 그리는데 왜 굳이 대학을 가야 하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한두 사람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로 입시 이야기를 대신하겠습니다.
정말로 잊지 못할 일본 생활 에피소드가 있다면 한두 개 말씀해주세요.
이건 좀 옛날이야기인데……. 1970~1980년대 예쁘지도 않은 여자아이가 ‘고?선?윤’이라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을 고집하며 일본 학교를 다녔지요. 누구나 다 아는 ‘외국인 학생’이었습니다. 하루는 청소 시간에 한 아이가 저에게 “너 조센진이라면서”라는 말을 해서, “조센은 대한민국의 옛 이름이고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야”라고 친절하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우리나라에서 교육받은 저는 우리나라에 대한 자긍심으로 무장되어 있어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날 그 친구는 상담실로 불려갔고, 다음 날 저 역시 상담실에서 학교생활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누가 우연히 이 장면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선생님들 사이에서 행여 이 작은 여자아이가 ‘왕따’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지식인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한낱 ‘일본 지식인의 위선’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최근에는 ‘유학생 엄마’로 일본을 찾는 일이 많습니다. 고슴도치 어미가 자랑을 하자면 우리 딸은 장학금도 받으며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전기를 아낀다며 싱크대 위의 전구 두 개 중의 하나를 살짝 돌려 불이 들어오지 않게 한 것을 보니 기특할 따름입니다. 옆방의 일본인 친구가 알려준 노하우랍니다. 21세기의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조센’이 아니라 ‘한류’로 기억되는 멋진 나라입니다.
선생님의 일본어 실력은 일본인도 감탄할 만한 수준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으로 건너가 외국어를 배우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선생님의 ‘나만의 일본어 공부법’이 있다면 살짝 귀띔해주세요.
저는 대구 출신입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정작 우리말은 서툴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쿄 부근에 살아 표준어를 쓰다 보니, 『나만의 도쿄』 추천사를 써주신 요네무라 고이치 『마이니치신문』 특파원께서 “정확한 일본어로 말을 걸어 왔고, 나는 그 발음의 아름다움에 놀랐다”라는 찬사를 남겨주셨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으로 갔고 동경한국학교를 다녔는데, 사실 당시에는 누구보다 일본어 습득이 느린 아이였습니다. 저보다 나중에 전학을 온 외교관 자녀들이 훨씬 빨리 일본어를 습득해 기가 죽기도 했습니다. 제가 원래 배우는 게 느립니다. 그래도 느린 만큼 확실하게 익히고 가는 편입니다. 공부는 천천히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비단 일본어 공부만이 아닙니다. 모든 공부가 그렇습니다.
특히 말은 ‘사람들과 수다’를 잘해야 합니다. 저는 사람 만나는 것도 느립니다. 느린 만큼 한번 만난 인연은 소중히 생각합니다. 수다를 나누며 천천히 그 사람을 알아가고, 일본어도 알아갑니다. 이것이 저의 공부법이었다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니와 남동생, 아들과 딸과의 소소한 이야기가 책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책이 나온 뒤에 가족분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글의 소재는 항상 주변에 있고,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게 되는데 이게 흉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나만의 도쿄』 중에는 광화문 K문고가 아니라 강남 K문고에서 저를 찾는 제 남편 이야기를 하며 소통이 안 된다고 투정을 부린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남들은 다 재미있다고 하는데 우리 딸한테는 혼났습니다. “아빠한테 허락받은 거야?” 우리 집 야당입니다. 아이고, 이 글 역시 또 혼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장 자랑하고 싶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가족입니다. 책의 마지막 교정은 꼭 남편한테 부탁합니다. 책 제목은 역시 젊은 사람의 감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고민을 부탁합니다.
남들과 다른 공간에서의 특별한 시간과 기억은 좋은 추억일 수도 있지만, 일본과 한국의 언저리에서 제 자리를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자이니치라고 불렀고, 누구는 조센진이라 불렀습니다. 그랬던 제가 아들을 대한민국의 군대에 보내면서 ‘대한민국의 엄마’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든든한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만의 도쿄』 독자 여러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만의 도쿄』 는 2년 전 ‘고선윤의 일본 이야기’ 그 첫 번째 책 『토끼가 새라고?』를 발간하고 나서 두 번째로 내는 책입니다. 일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우리가 외면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일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알아야 하는 나라라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고 하찮은 나라라고 얕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저의 눈으로 일본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살았던 동네를 통해, 제 친구들을 통해 ‘일본’을 감히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이웃을 이야기하며 이웃 나라 일본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보고 일본이 조금 가깝게 느껴진다면 더 바랄 바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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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도쿄고선윤 저/이성호 사진 | 한울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좀 더 진솔한 일본이 담겨 있다. 시기와 질시의 대상도,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도 아닌,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서의 일본이 따뜻하고 잔잔하게 그려진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