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총명(聰귀밝을 총, 明밝을 명)! 그것은 귀와 눈이 밝다는 뜻이다. ‘총명’이란 단어의 한자 뜻을 들여다 본 뒤 탄식했다. 아, 나는 총명하기는 글렀구나! 나는 눈도 나쁘고 귀도 나쁘다. 눈이야 안경을 쓰면 되지만 귀는 골칫덩이다. 보청기를 낄 필요는 없지만 사오정이란 게 문제다. 나는 종종 상대의 말을 못 알아 듣는다. 그러니 눈치가 빤하고 행동이 잰 사람을 보면 부럽다. 사오정이라 내가 들은 숱한 핀잔들! 가령 이런 식이다. 지방 강연에서 돌아온 남편이 현관문을 열며 내게 말했다.
남편 : 주차장에 당나귀가 있어. 내려가서 같이 가져오자.
나 : 뭐라고? 당나귀? 웬 당나귀? (말할 기회도 안 주고, 혼자 펄쩍 뛰며) 우리 주차장 에? 당신 미쳤어? 어떻게 키우려고?
남편 : 안마기! 안마기! 당나귀가 아니라.
‘안마기’를 ‘당나귀’로 잘못 알아 들은 스스로가 웃겨서, 기특할 정도로 웃겨서, 나는 발을 구르며 웃었다. 한참이나! 괜히 나 혼자 주차장에 묶인 당나귀를 상상했잖아! 저 양반은 휴게소에서 싸구려 안마기는 왜 사온담(차라리 당나귀가 낫지). 귀와 눈뿐 아니라 사실 입도 문제다. 말실수 때문이다. 말실수는 몇 년 사이에 부쩍 잦아졌다. 나는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닌데(정말입니다, 여러분!) 좀 맹할 때가 있고, 딴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많아 그렇다. 한번은 생선가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나 :아저씨. 동태 있어요?
주인 : (냉동실에서 꽝꽝 언 동태를 꺼내며) 여기 있지요.
나 : (인상을 쓰며) 얼지 않은 건 없어요?
주인 : 네? 그럼 생태를 사셔야지!
나 : (무안해서 과장하며)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저 미쳤나 봐요!
오해가 있을까봐 말해두는데, 동태가 ‘얼린 명태’란 사실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꽝꽝 얼어붙은 동태를 보는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다. 정말 왜 이러는 걸까. 그뿐 아니다. 카페에서 드립커피 ‘안티구아’를 시킨다면서 “이구아나 주세요”라고 당당히 말하고(그런데 카페 주인이 찰떡 같이 알아들었다), 어느 때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라고 태연하게 주문한다. 친구와 얘기하다 ‘아시아나 항공’을 ‘코리아나 항공’이라고 하고, 벚꽃 흩날리는 풍경 앞에서 “정말 가관이네!”라고 한 후 눈을 끔뻑이다 “장관!”, 황급히 고쳐 말한 적도 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웃겨 죽는단다. 원래 남의 실수가 기쁨의 원천인 법이니까. 말실수는 틀린 것을 알고 바로 고치는데, 나는 눈도 나쁘지 않은가(시력과 센스 포함). 스포츠 경기를 볼 때면 같이 보는 사람을 틀림없이 성가시게 만든다. 방금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왜 반칙이야? 휘슬 불었어? 옐로카드 나왔어? (유도에서)방금 한판 됐어? (수영선수)어느 줄에 있어? 저 사람 왜 넘어졌어?
여기까지 쓰고 보니 불현듯, 쓸쓸하다.
내가 헬렌 켈러도 아니고. 왜 못 보고 못 듣고 말을 못하니, 왜! 왜! 왜!
아는 사람이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엄청나게 큰 귀지를 파주더란다. 그 후 아주 잘 듣게 되었다나. 새해엔 나도 이비인후과에 가야지, 가서 엄청나게 큰 귀지를 발견해 자랑스럽게(?) 집으로 들고 오겠다, 호언장담해보지만… 사실 나는 크게 불편한 게 없다. 내 곁의 사람들에게 미안할 뿐. 나는 스스로가 좀 재미있어서, 좋기도 하다. 잘못 듣기나 말실수는 ‘웃음’을 유발하지 않는가!
“모든 잘못 듣기는 ‘신기한 칵테일’과 같아서, 100번째의 잘못 듣기라 하더라도 첫 번째만큼이나 신선하고 놀랍다.”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 137쪽
그래, 나는 남들보다 “신기한 칵테일”을 좀 잘 만드는 거야. 그게 뭐가 나빠? 게다가 내겐 특별한 장기가 있다. 아주 작은 소리, 혹은 균질하게 들리는 소리 가운데 ‘성질이 다른 소리’가 나면 기막히게 알아챈다! 가령 수도꼭지에서 아주 작게 새는 물소리를 꽤 멀리에서 감지하고, 아무도 듣지 못하는 전화벨소리를 들으며, 연주자의 음 이탈을 기가 막히게 감지해 “틀렸어. 삑사리야!”라고 외친다. 그럴 때 내 귀는 쫑긋, 두 배는 커지는 기분이다.
무언가를 잘 보고, 옳게 말하고, 정확히 듣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보다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알아’보고, 말을 오해 없이 전달하고, 힘들다고 말하는 자의 소리를 향해 귀를 여는 게 더 중요하다. 나는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귀가 순하게 열리는 편이다. 당신 쪽으로, 활짝! 그러니 새해에 이비인후과에 갈지 말지, 조금 더 고민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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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강올리버 색스 저/김현정 그림/양병찬 역 | 알마
인간의 불가사의한 행동을 끊임없이 연구했던 프로이트, 시간, 기억, 창의력에 관한 경험적 특이성에 주목했던 윌리엄 제임스 등 그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업적과 비화를 소개한다.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