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연극 <아트>가 올해 초 10년 만의 공연에 이어 다시 무대에 올랐습니다. 토니 어워드 베스트 연극상, 로렌스 올리비에 뉴 코미디상 등을 휩쓴 <아트>는 ‘하얀 판때기’를 2억 원을 주고 살 만큼 예술의 가치를 볼 줄 아는 피부과 의사 세르주와 그런 세르주의 허세가 보기 싫어 비아냥거리는 항공 엔지니어 마크, 두 사람이 모두 이해되는 또는 이해되지 않는 문구 도매업자 이반의 우정을 통해 인간 내면의 솔직한 모습을 꼬집는데요. 세르주에 엄기준, 최재웅, 최영준, 마크에 김재범, 박은석, 정상훈, 이반에 박정복, 장격수, 김지철 등 쟁쟁한 배우들이 이름을 올려 더욱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맡은 인물과 참 어울리지 않는 배우가 눈에 띄지 않나요? 바로 박정복 씨인데요. 왜 하필 이반인지, 공연 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박정복 씨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형들과 작업하게 됐는데, 어떤 인물이 가장 재밌을까 고민했어요. 이반이 끌리더라고요. 저와 성격이 비슷한 부분도 있고.”
성격은 마크와 비슷하지 않나요(웃음)?
“그렇죠, 실제 성격은 마크와 비슷하죠(웃음). 공격적이고 주관도 뚜렷하고. 그래서 처음 일주일간 리딩할 때는 마크를 했는데, 인물을 이해하는 면에서는 어려움이 없지만 정이 가지 않았다고 할까요. 앞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는 이반처럼 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너의 생각도 존중하고, 또 너의 생각도 존중해!’ 정말 아끼는 사람들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이반 같은 태도가 좋은 선택이 아닐까 싶어요.”
성격이 마크에 가까운 만큼 박정복 씨가 만들어내는 이반은 좀 다른 모습일 것 같습니다.
“대본에 충실하지만 처음 접근할 때 이반이 바보스러운 인물로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배려를 많이 하고 양보를 많이 하는 사람이 줏대 없고 바보처럼 보이는 게 이상한 거잖아요. ‘우유부단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연습 때부터 많이 얘기했는데, 대사로 표현되지만 원 텍스트에는 없는 단어거든요. 누군가를 많이 배려하는 게 우유부단한 건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캐릭터를 담백하게 잡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한 작품으로 모이기 쉽지 않은 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있는데, 어떤가요?
“연습 때부터 재밌었어요. 다들 베테랑이라서 무대 메커니즘을 잘 아니까 의견 조율하는 것도 원활했고, 오히려 연출진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의 개성을 한 작품 안에서 컨트롤하느라. 개성이 뚜렷해서 캐릭터 해석 자체도 중심은 지키되 각자 다양하거든요. 그래서 저도 무대 오르기 전날부터 캐스팅을 확인하면서 각 배우의 특성을 감안하려고 노력해요. 실제로 어떤 조합이 만났을 때는 러닝타임이 1시간 40분을 넘기는데, 다른 조합은 1시간 23분이 나오더라고요. 애드리브가 많지도 않고, 무대 위에서 속도감이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는데 리듬이 확연히 다른 것 같아요. 관객들은 조합마다 색다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연극에서 러닝타임이 10분 이상 차이나기 쉽지 않는데, 각 조합을 비교해서 보고 싶네요. 그런데 만약 친구가 2억짜리 그림을 사면 어떨 것 같아요? 그것도 그냥 흰색 그림(웃음).
“정말 아끼는 친구면 존중했을 것 같아요. 내가 모르는 분야니까. 그 친구가 행복하다면 된 거죠. 저와 이반이 가장 다른 점은 마크가 세르주에 대해 뒷얘기를 하더라도 두루뭉술하게 받아주지 않고 세르주 선택을 존중했을 거예요.”
보통 남자들의 우정이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이 작품을 보면 별 거 아니구나 싶어요(웃음).
“야스미나 레자가 그 부분을 꼬집고 싶었대요. 남자들이 자랑하는 우정, 의리가 정말 유치한 것에서 시작하고, 어떤 인간관계가 깨지는 것도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고요. 아마도 작가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중반의 이야기를 써놓은 것 같은데, 저도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사소한 것에 티격태격할 수 있고, 사소한 것에서 다시 서로를 인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요. 사람 냄새 나는 작품인 것 같아요.”
<아트>의 세 사람도 굉장히 끈끈하고 좋은 사이였지만, 어떤 계기로 과거의 사소한 일들까지 다 언급하며 다투는 거잖아요. 그런 일은 아직 없었나 봐요?
“있었죠. 어릴 때 친구들은 제가 예술 계통에 있다 보니 리듬적으로 안 맞는 부분이 생겨서 연락을 안 하다가 작은 계기로 다시 만나기도 하고. 지금 가장 끈끈한 친구들은 대학 때부터 만나는 12명이에요. (강)필석이 형도 있고, 오대환 형도 있는데, 다들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아서 저희는 카페나 밥집, 당구장, 볼링장에 주로 가요. 그런데 이 모임도 쉽지만은 않았어요. 10여 명이 화합한다는 게 어렵거든요. 또 그냥 웃고 떠들 거면 왜 만나느냐며 모임을 없애자는 얘기도 있었는데, 유지했던 이유는 한두 시간이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이 가면 갈수록 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만나요. 무엇보다 상을 치를 때면 12명이 다 참여하는데 든든하죠.”
그럼 박정복 씨는 <아트>의 세 사람이 예전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네, 제 생각은 그래요. 작품 마지막에 보면 세르주와 마크가 스스로 망쳐 놓은 관계를 회복기간을 거쳐 재정립한다고 얘기하는데, 사실 그 회복기간 전후를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각자의 성향이 바뀌지는 않거든요. 결국 서로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양보하느냐의 문제죠. 그러면서 좀 담담해지고요. 친구관계는 내가 원치 않으면 안 만나면 되는 거잖아요. 만남을 유지하려면 서로 어느 정도 양보와 희생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도 이번 작품을 하면서 ‘나는 어떤 우정을 나누고 있고, 친구들에게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친구들이 저를 많이 배려해준 것 같아요.”
친구들은 (실제로는 마크에 가까운) 박정복 씨의 어떤 점을 가장 배려해줄까요?
영상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죠!
3년 전 <올드 위키드 송>으로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선 거였잖아요. 이후 꾸준히 연극에 참여하고 있는데,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그때는 무대예술을 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넘쳤다면 지금은 연극이라는 매체의 매력이 뭘까, 나는 배우로서 어떤 걸 더 보여드려야 할까 많은 고민을 하고 있어요. 저는 좋은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연극을 하다 다른 매체로 가서 안 돌아오잖아요. 왜 그럴까,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연극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고, 프로덕션도 힘들고 배우도 힘들고. 나이가 들수록 경제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좀 더 일찍, 열정만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을 나이에 나만의 예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았나 아쉬움이 남아요. 30대 중반이 넘어가니까 ‘연극무대를 평생 사랑하면 나중에 만족한 삶, 행복한 삶, 내 예술을 펼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이 생기는 것 같아요. 나는 어떻게 변할까, 어떤 것을 쫒아갈 것인가. 연극 무대가 하나의 관문이 되는 게 너무 서글퍼요.”
공연 쪽에서 일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공연을 좋아하고 취재하는 사람들도 다들 느끼는 서글픔이죠.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요?
“무엇보다 제가 좋은 연기를 보여드려야겠죠. 그리고 잘 돼서 좋은 극단을 만들고 싶어요.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자기 예술을 어떻게 연구하고 보여주느냐에 대한 도전이니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극단을 해보고 싶어요. 아직은 겁쟁이라서 도전에 망설여지지만, 그 여유가 언제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꼭 도전해보고 싶어요.”
오랜만에 만난 박정복 씨와 연극 <아트> 얘기를 한참 하다, 어느 순간 공연예술의 시스템에 대해, 연극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또 한참 얘기를 나눴습니다. 공연, 특히 연극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자세히 언급하지 않아도 다들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겠죠? 쉽게 바뀌지 않을 시스템이지만, 덜어지지 않을 나이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연극을 사랑하는 박정복 씨가 걱정 없이 무대에 설 수 있는 환경이 서둘러 마련됐으면 좋겠네요. 일단 그가 의외의 캐릭터로 무대에 서는 연극 <아트>부터 챙겨볼까요? 연극 <아트>는 11월 4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공연됩니다.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