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2월 17일, 스페인의 시인이자 화가인 카를로스 카사헤마스는 몽마르트르 근처의 깔끔한 새 카페 리포드롬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말고 총을 꺼내어 정수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그의 친구들은 정신이 나갈 정도로 슬퍼했는데, 특히 파블로 피카소의 증세가 가장 심했다. 그는 6년 전 동생이 디프테리아로 죽어가는 과정을 목도한 슬픔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 탓에 몇 년 동안 그의 작품에서는 슬픔이 배어 나왔다. 슬픔과 상실을 표현하기 위해 피카소는 단 한 가지의 색, 파란색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렸다.
파란색이 영적인 영역의 표현에 쓰인 건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지구의 평화를 위해 UN이 창립되었는데, 회색이 도는 세룰리안으로 그려진 올리브 가지에 둘러싸인 세계 지도를 상징으로 삼았다. 디자인을 맡은 건축가 올리버 룬더퀘이스트는 ‘전쟁의 색인 빨간색과 반대’이므로 이 색을 골랐다고 밝혔다.
세룰리안은 영적이면서도 평화로운 색이다. 크리슈나, 시바, 라마를 포함한 힌두교 신들의 피부색은 영원과의 친밀함을 상징하기 위한 파란색이다. 프랑스에서는 ‘ bleu c?leste’, 즉 천상의 파란색이라 일컫는다. 그런가 하면 사이언톨로지도 캘리포니아에 있는 골드 베이스(사이언톨로지의 국제 본부―옮긴이)의 많은 건물들을 세룰리안으로 칠해서 혼란스럽다. 창립자 L. 론 허버드의 환생을 기다리는 대저택도 예외 없이 세룰리안으로 칠해놓았다(그가 사이언톨로지를 설립하며 동료에게 ‘하늘색의 평화로움을 팔자’고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팬톤은 소비자가 ‘새천년에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충만을 찾을 것이다’라고 예상해 연한 물망초의 색을 새 천년의 색이라 이름 붙였다.
코발트 계열의 일부인 진짜 세룰리안 안료를 화가가 쓸 수 있게 된 건 1860년대였는데, 그나마도 수채화에만 가능했다. 코발트와 코발트 주석산염이라 알려진 산화양철을 섞어 만드는 세룰리안은 유화에 쓰이기 시작한 1870년대에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채화와 달리 유화에서는 세룰리안이 지닌 초크의 성질을 잃지 않아서 당시 화가들에게 인기를 끈 덕분이었다. 코발트 블루와 카드뮴 옐로 약간, 그리고 흰색을 세심하게 섞어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 쓴 반 고흐를 제외한 나머지 화가들은 딱히 이 색을 세심하게 사용하진 않았다. 부유하는 듯한 점묘법으로 유명한 폴 시냐크는 모네를 비롯한 많은 동료 화가들처럼 셀 수 없이 많은 튜브를 끝까지 짜서 썼다. 사진가이자 작가인 브라사이는 1943년 11월 파리에서 피카소의 물감 공급상을 만나서 흰 종이에 쓰인 피카소의 친필 서한을 건네받았다. 브라사이가 기록에 남겼듯 ‘처음에는 시인 줄 알았’지만, 그는 곧 피카소의 마지막 물감 주문서임을 알아차렸다. ‘퍼머넌트 화이트’과 ‘실버 화이트’ 바로 밑의 세 번째 색이 바로 ‘세룰리안 블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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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말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저/이용재 역 | 윌북(willbook)
매일 색을 다뤄야 하는 사람이라면 색에 대한 깊은 영감을, 색과 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색을 제대로 이해하는 안목을 안겨줄 것이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기자, 작가. 2007년 브리스톨 대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에서 18세기 여성 복식사와 무도회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코노미스트>에서 ‘책과 미술’ 담당 편집자로 일하며, <텔레그래프>, <쿼츠>, <뉴 스테이트먼> 등에 글을 기고했다. 2013년 <엘르 데코레이션>에서 연재했던 칼럼을 정리한 책 <컬러의 말>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