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화 “명예훼손이라는 말에 떨지 않았으면 해요”
스스로 보기에 예쁘고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고, 다른 사람이 쓸 때 효용 가치가 높은 디자인을 하라는 거죠. 사회참여라고 굳이 하지 않아도, 디자인은 필요한 사람이 있고 필요한 사람한테 가면 좋을 것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글ㆍ사진 정의정
201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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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_내_성폭력, #미투, #갑질, #부당해고. 숨죽였던 과거를 떨쳐내고 가해자를 고발하는 단어가 늘어난다. 피해자들은 서로의 말 속에서 연대하고 힘을 얻지만,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역으로 가해자가 될까, 오히려 더 피해를 볼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부당한 일을 겪고 나서야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말할지, ‘누가’ ‘어디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지 찾는다. 사건의 바깥에서는 그러게 ‘왜’ ‘무엇을’ 위해 빌미를 제공했냐고 피해자에게 화살이 돌아간다. 피해 사실을 알리는 일은 용기 있고 공공선에 필요한 행동이지만, 되도록 피해자가 더는 고통받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알리면 더욱 좋을 것이다. 억울한 일을 알리기 전에 『알리기 전에 알면 좋은 사실들』 을 참조하기를 권하는 이유다.


『알리기 전에 알면 좋은 사실들』 에는 언론 제보 및 SNS 폭로 등 알리는 방식부터 시작해 도움을 주는 기관, 명예훼손과 모욕 등 가해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쓰는 형법과 관련 사례를 모았다.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제작비를 마련하는 모금을 시작해 ‘돈이 없어도 사야 하는 책’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모금액은 2천만 원에 육박했고, 목표액의 1987%를 달성하며 프로젝트가 마무리됐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후원과 출간을 요구하는 문의가 빗발쳐 기성 출판으로 다시 새 옷을 입고 나온 책이다.


홍태화 저자는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디자인이 필요한 정보와 서비스를 적합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라면, 『알리기 전에 알면 좋은 사실들』  역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디자인 작업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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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내 달라고 한 책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먼저 책 프로젝트를 시작했었죠.

 

작년 12월에 처음 프로젝트를 올렸었어요. 가을쯤부터 책으로 엮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죠. 김나연 디자이너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항상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주셨었거든요. 펀딩을 통해 디자인 만드는 걸 독려하는 편이었어요.


후원 금액이 2000만 원 정도 모였더라고요. 예상했었나요?


원래 예상은 80만 원 정도였어요. (웃음) 텀블벅에서 책 콘텐츠는 다른 예술 콘텐츠보다 인기가 없고 금액이 적게 모이는 편이라서, 목표는 100만 원이었는데 다 안 채워질 것 같았어요. 나머지 20만 원 정도는 제 돈을 넣어서 성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후원 시작하고 둘째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까 후원액이 뛰기 시작했어요.


당황했겠어요. 제작도 그만큼이나 하게 될 줄 몰랐을 텐데요.


많이 당황했죠. 디자인을 주로 하다 보니 조판이나 인쇄 방법은 알았는데, 그래도 소통 관계에서는 많이 인쇄소에 갔었어요. 네댓 번은 간 것 같아요. 초반에 발송할 때 유실된 분이 꽤 있어서 그분들 하나씩 확인해서 등기로 다시 발송했었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일도 하고, 발송도 해야 하고, 험난했었죠.


독립출판으로 냈다가 다시 한빛비즈에서 재출간했어요. 어떻게 나오게 됐나요?


책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도 책을 사고 싶다는 메시지가 계속 왔어요. 제가 통신판매업자도 아니고 판매를 계속 할수는 없어서 출판사에 연락을 드렸어요.


디자인이 일부 바뀌어서 나왔어요.


기본 틀은 비슷하게 갔어요. 표지가 많이 바뀌었죠. 내지도 조금 달라요.


처음 냈을 때도 예상하지 못했던 정도로 독자들의 반응이 있었어요. 기성출판으로 내는 감회는 또 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고요.


출판사에서 연락이 안 오면 POD(Print on Demand) 방식으로 사고 싶은 분들은 살 수 있게 내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막상 출판사에서 내겠다 하고 원고료를 받고 저자로 이름을 올리니까 기분이… 참 이상하네요. (웃음)

 

 

이렇게 도움을 받으면 되겠구나


‘안전하게’ 알리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정보를 책으로 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들었나요?


처음 실린 사례는 훨씬 예전에 봤던 뉴스였어요. 몇 년 전 한 기업의 사내 성추행 피해자가 자살을 시도했는데, 회사의 고소가 원인이었죠. 다행히 피해자는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요. 나중에 형법 310조를 알고 나서 왜 이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잘 보니까 형법을 알았다면 무죄일 수 있는 근거가 있는데, 피해자는 그걸 몰라서 고통받았던 거예요. 거기서 화가 났어요. 사람들이 평소에 잘 알 수 있도록 교육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런 장치가 없었어요. 그래서 부족하지만 제가 정보를 적어서 만든 거죠.

 

① 제307조 제1항의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에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공익을 달성할 목적으로 진실을 적시해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엔 위법성과 공익성을 저울질해서 공익성이 더 크다면 위법하지 않은 명예훼손이 성립한다. 이를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표현한다. (중략)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일 때만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이 꼭 유일한 동기일 필요는 없다. 공익성이 알림의 주된 이유면 충분하다.
- 89쪽, 형법 제310조 위법성의 조각 중

 

공분의 느낌이었을까요?


이해가 안 됐다는 게 제일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화도 나도 짜증도 나는데, 무엇보다 왜 형법이 이렇게 되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자료 조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을 모아야겠다 싶어서 로스쿨에 다니는 사촌 형한테 물어보고 그때부터 발로 뛰었죠. 대한법률구조공단, 법학 교수님들, 변호사님에게 물어보고요. 메일도 많이 보냈었어요. 반려도 많이 당했죠. 변호사분들도 사건 담당은 괜찮지만 이렇게 알려주는 건 힘들다고 하시기도 하고요.


뒷부분 ‘도움을 주신 분들’에 이은의 변호사와 채널예스 엄지혜 기자 이름이 올라가 있어요.


엄지혜 기자님의 <채널예스> 특집 기사 (SNS 폭로, 피해자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를 보면서 쓴 내용이 있어요. 이은의 변호사님도 내용을 한 번 봐주시고요. 나중에 책을 다 쓴 뒤 김석진 변호사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자문해주셨죠.


사람들은 법이 어렵다고 생각해요. 제작하면서도 법률 용어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법률 관련한 내용은 형법 제307조부터 311조, 정보통신망법 제70조만 본 거라서 단편적이었어요.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었는데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법이 이러니까 이렇게 하세요’라고 판단해서 말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인지 법 설명과 함께 판례는 적혀 있지만 가치 판단은 들어가지 않았어요.


사람마다 케이스가 다르잖아요. 매 상황이 다른데 비슷한 사례가 있었으니 이대로 하라고 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 전에 인터뷰하기가 저어된다고 말했어요. 어떤 우려였나요?


처음에는 책 제목으로 매뉴얼이나 지침서라는 단어를 썼었어요. 그런데 내용을 조사하다 보니까 절대 그런 표현을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시라도 이 책을 읽고 또 다른 종류의 피해자가 생기면 안 되니까요. 책을 읽고 ‘이렇게 하면 되겠네?’라고 생각하면 안 되거든요. 방법으로 접근하기보다 이런 게 있구나, 이렇게 도움을 받으면 되겠구나 받아들이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목에 방법이라는 단어를 안 썼어요.


그래서 ‘사실들’이 되었군요. (웃음)


알면 좋은 사실, 팁 같은 게 되는 거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아직 알리지 않은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썼나요?


애초에 제가 당한 사람이 아니라 당했던 사람의 입장을 대변해서 쓸 수는 없어요. 그분들을 위해 뭐가 필요한지도 혼자 가늠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실제로 당했고 일을 진행하는 분들에게 필요한 건 ‘알면 좋은 사실들’이 아니라 매뉴얼이에요. 그분들은 바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아야 하고, 그건 전문가에게 가야 하는 문제죠. 이 책에서 할 수 있는 건 그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 어디서 도움받으면 좋고 이렇게 하면 좋지 않다 정도의 의식을 미리 아는 것에 불과해요.


최근 이슈를 봤을 때 아무래도 알리는 일에는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먼저 떠오를 것 같아요.


미투 운동은 텀블벅 프로젝트가 끝나고 터진 거라 겨냥하고 만든 건 아니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이해 안 되는 상황에서 걱정 때문에 알리지도 못하는 게 화가 났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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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협박수단이 되는 게 문제


모욕죄보다는 명예훼손에 중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어요. 둘의 차이점은 뭔가요?


모욕죄는 일단 욕을 해야 해요.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나쁜 놈이다’라고 해야 모욕죄예요. 잘 들여다보면 명예훼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다고 적었을 때고, 모욕죄는 가해자를 욕해야 하더라고요. 피해를 호소하거나 알리는 일은 보통 전자에 해당하고, 모욕하면 법정에서도 용인되지 않는다고 해요. 모욕이나 허위사실은 일단 구제대상이 안 되고, 명예훼손 부분에서는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주로 적었어요.


무고죄로도 많이 걸리죠.


무고죄는 아예 안 다뤘어요. 결국에는 무고도 허위사실이기 때문에, 허위 사실로 위법성이 조각되지 않아요. 최근에 어떤 연예인이 난방비 문제를 폭로하다가 중간에 허위사실을 섞은 일이 있었어요. 판결문을 봐도 취지는 참작이 되지만 결국에는 허위사실로 명예를 훼손했기 때문에 위법이라고 하더라고요. 책에서 알리는 일을 정의할 때 허위사실을 알리거나 비방이나 모욕을 주기 위한 알림은 제외한다고 말한 이유도 그런 차원에서예요.


SNS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언급했어요.


이은의 변호사님도 결국에는 SNS로 폭로하지 않는 걸 권하는 입장이었어요. 역효과가 너무 큰 것 같아요. 물론 SNS로 폭로해도 잘 끝나는 경우도 많고 어떤 상황에서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는데, 후에 겪을 일을 생각하면 조심해야 하는 게 아무래도 본인을 위해 조금 더 나을 것 같아요. 감정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법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고 쓰게 되잖아요. 저도 일단은 언론사 제보 먼저 하고 안 되면 자문받으면서 폭로 내용을 다듬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지만, 이미 겪고 있는 분들에게는 이런 말이 도움이 되지 않죠. 지금 힘들고 죽겠는데 언제 기자를 찾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사전에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커요.


폭로하시는 분들은 워낙 답답한 마음이 있으니까 결국 SNS에라도 토로하는 거잖아요.


많이 이상한 일이죠. 쉽게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최근 ‘미투’가 터지면서 민주당에서도 그렇고 하나씩 법안을 발의했어요. 성폭력 관련 피해 호소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도 있었고요. 책 나오기 전에 상황이 좋아지고 책은 쓸모 없어지겠네 싶었는데, 아직 안 바뀌었어요.


마지막에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을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적었어요.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실제로 사실 적시에 의해 명예훼손을 당한 분들의 구제 방법이기도 하고, 법이 나쁘다고만 말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원래는 피해자를 보호하는 취지의 법이었다고 들었어요. 협박수단이 되는 게 문제인 거죠. 일단 민법으로도 명예훼손이 따로 있고, 구제를 받을 방법은 있는데 굳이 형법에서 다뤄야 할지는 조금 의심이 들어요. 범죄 당한 사실을 피해자가 스스로 밝히는 경우는 구제할 방법을 더 마련해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제가 법률을 다루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죠.

 

 

다른 사람을 바꾸는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식의 디자인을 생각하는 건가요?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메시지를 놓고 전달을 하는 방법을 배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책을 조판하는 것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이 책이 가진 메시지도 다르게 읽혔을 거예요. 사실들을 모아서 그걸 엮은 것도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어요.


사회 참여를 하는 디자인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김나연 디자이너님은 항상 ‘나의 디자인’이 아니라 ‘우리 디자인’을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스스로 보기에 예쁘고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고, 다른 사람이 쓸 때 효용 가치가 높은 디자인을 하라는 거죠. 사회참여라고 굳이 하지 않아도, 디자인은 필요한 사람이 있고 필요한 사람한테 가면 좋을 것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뭔가요?


디자인 외주를 가끔 하기도 하고, 지금은 언론사 입사 준비 하면서 언론 관련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어요.


앞으로도 활동을 한다면 디자인 쪽 일일까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라면 지금 받는 수업도 그렇고, 글이어도 저는 상관 없다고 봐요. 요새는 닷페이스 같은 영상을 기반으로 한 매체도 생기고 있어서 일반적인 인쇄물, 영상, 뉴스 등 디자인의 벽이 많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메시지를 가지고 전달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회 현상을 보는 데 디자인을 했던 눈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눈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따라가면서 왜 이해가 안 되는지 보는 자세였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가짐을 바꾸는 걸로 끝난다면, 저는 다른 사람도 바꾸게 하는 단계까지 가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알리기 전에 알면 좋은 사실들홍태화 저 | 한빛비즈
피해를 호소하는 구체적인 방식, 그것의 파급효과, 언론 및 SNS의 활용 방식, 다양한 법률자문 기관 소개, 그리고 이 모든 것과 관련된 법규 등이 간결하면서도 단단하게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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