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정 “소설 속 세계의 본질은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장편을 쓰는 동안 육신은 너무 힘들지만, 초반의 세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 내내 어떤 희열감에 젖어 있거든요. 이때만큼은 제가 세상에 좀 더 필요한 인간이 아닐까, 라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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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전혜정의 첫 장편소설 『첫번째 날』 이 출간됐다. 첫 소설집 『해협의 빛』 (문학동네, 2012)을 출간한 이후 장편 집필 작업에 매진하며 수없이 원고를 다듬어낸 결과물이다. “알레고리 판타지에서 정통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 모두에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올 라운드 플레이어다”라는 등단 당시의 심사평이 말해주듯, 전혜정은 소설이라는 영토 어느 한 부분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영역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딛는 작가다.

 

‘첫 장편’이라는 타이틀에서 오는 부담감이 있을 법한데도, 작가는 자신에게도 낯설 소재를 과감하게 택했다. 지구를 모행성으로 삼고 있는 ‘네이처’와 무인 행성 ‘루시아’가 바로 그것이다. 현실과 다른 새로운 가상의 시공간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킬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인간다움’의 의미를 탐색하는 데 걸맞은 장소가 마련된다.

 

『첫번째 날』 은 작가님의 첫 장편소설이지요. 첫 소설집 『해협의 빛』 을 출간하고 그간 장편소설 작업에 매진하신 거로 아는데요. 첫 장편소설을 출간하신 소감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요.

 

막연히 작가라는 직업을 꿈꿨던 시절부터, 저는 언젠가 꼭 장편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어요. 정말, 바라고 바랐죠. 단편으로는 담을 수 없는, 바로 ‘그 인물’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쓰고 싶다는 절박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긴 호흡의 이야기는 등단 후에도 쓰기가 쉽지 않았어요. 단편과 장편은,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다른 장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이 장편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매번 벽에 부딪혔고, 숱한 좌절감을 느끼며 재능의 본질에 대해서도 스스로 많은 의문을 던졌습니다. 세상에 선보인 장편으로는 『첫번째 날』 이 첫 작품이지만, 사실 이 장편을 쓰기 전에 네 편의 장편을 더 썼고, 이후에도 두 편을 더 완성했습니다. 장편은 작가의 모든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이고 드넓은 무대와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장편 중심의 창작을 하는 소설가로 남고 싶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는 지금 현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요. 지구가 거느리는 ‘네이처’라는 행성과,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이 추방당하게 되는 ‘루시아’라는 무인 행성이 무척 독특합니다. 어떤 구상 끝에 이런 설정을 떠올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부당한 현실을 떠올려보세요. 국가 간에도, 조직 간에도, 각 개인 간에도 어김없이 통용되는 ‘힘의 논리’를 말이죠. 소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상황들은 매 순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제 소설이 비록 외양은 가상의 시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구현된 소설 속 세계의 본질은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주인공이 살인죄를 저지르고 추방되는 루시아는 무인 행성이기에, 바로 이같은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없음’의 관계에서 모든 것들을 어쩌면 새롭게 시작해볼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 자유를 방종하게 누린 주인공에겐 재앙과도 같은 행성이 되죠. 루시아는 주인공 DH-194가 자신의 본질을 직접 마주하기 위해 설정된 극단적 생존의 공간입니다. 네이처가 나름의 논리와 체계로 구성된 정교한 이성의 행성이라면, 루시아는 당장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보다 직관적인 본능의 행성이에요. 이런 이유로 두 개의 대비되는 행성, 네이처와 루시아가 탄생하였습니다.

 

주인공은 루시아에서 멜(?)이라는 여성과도 만나게 되고, 자신의 분신과 같은 렘이라는 새끼 동물과도 만나게 되지요. 네이처 이야기에서도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가운데 작가님께서 가장 애정을 느끼는 인물은 누구인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을 갖는 인물은, 역시 주인공인 DH-194입니다. 저는 자신의 인생을 작정하고 망치는 듯한 그의 타고난 반항심과 결핍을 매우 좋아해요. 완벽하지 못하고, 결코 완벽할 수가 없고, 늘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수밖에 없는, 한없이 부족한, 연민이 느껴지는 인간형이죠. 주인공 외에 좋아하는 인물은 1부 후반에 짧게 등장하는 주인공의 입대 동기인 청년 반역자 GM-391이에요. 상위 계층인 2계급에 속하는 그에게 주인공이 묻는 장면이 있어요. 왜 네게 별반 이득 없는 혁명을 꾀하려 하느냐고요. 그때 GM-391이 한쪽 입술을 비죽이며 내뱉습니다. ‘이득 따윈 개나 줘버리라고 해’라고요. 왠지 저는 이 대사를 하는 그가 순수하게 느껴져서 매번 읽을 때마다 좋았습니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의 재판 장면이었어요. 조금이라도 형량을 감형하기 위해 애를 쓰는 변호사의 모습부터 주인공의 최후 변론까지, 그 둘의 목소리가 참 생생하게 느껴졌는데요. 재판 장면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거나 취재를 하시기도 했는지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셔요.

 

『첫번째 날』 이 가상의 시공간 네이처와 루시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는 소설이기 때문에 현실의 법정을 굳이 참고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그 장면에서 현실보다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주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죠. 저는 재판 장면을 쓸 때, 연극의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각각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하나씩 무대로 등장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관객을 향해 설득력 있는 독백을 하는 장면이죠. 변호사, 검사, 주인공의 최후 변론까지 단숨에 몰아치듯 썼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글을 쓸 때 저는 꽤나 예민한 편인데, 그 장면을 쓰던 날은 정말 집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주인공이 고아나 다름없는 자신을 아들처럼 보호해주던 관리자를 왜 죽일 수밖에 없었지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주인공의 마음 상태를 계속 써나가야 하는 게 힘들기도 하셨을 것 같아요. 작가님께서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쓰기 힘들었던 장면은 어떤 것인가요?

 

어떤 면에서 저는 글을 써나가는 제가 일종의 ‘마조히스트’와 같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장편을 쓰는 동안 육신은 너무 힘들지만, 초반의 세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 내내 어떤 희열감에 젖어 있거든요. 이때만큼은 제가 세상에 좀 더 필요한 인간이 아닐까, 라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매우 추상적인 답변일 수도 있지만, 모든 장면을 쓰는 것이 힘들었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좋았습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지요. “‘종(種)으로서의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다움이란 무엇이며,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첫 번째 날』 은 이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던지기 위한 진지하고 야심찬 시도이다.” 범위가 넓은 질문이기는 합니다만,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제 생각엔, 한 번쯤 내가 아닌 다른 인간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인간다움’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요. 사실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만, 진심으로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나’가 ‘내가 아닌 다른 이’를, ‘나를 생각하는 것만큼’ 헤아려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매우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제아무리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고 해도 그 이상으로 세상은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넘쳐나니까요. 적어도 작가가 인간에 대해 숙고해서 써내려간 문학작품에는, 우리의 경험을 대신해서 보여주는 캐릭터들이 등장해요. 우리의 선함과 악함, 어리석음과 현명함을 보여주는 인물들 말이죠.


이 인터뷰를 읽는 독자분들을 위해 작가님이 최근에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을 추천해주신다면요? 『첫번째 날』 을 쓰면서 참고했던 책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말씀해주셔도 좋겠습니다.


등단을 위해 매진하던 20대 문학 청년 시절에 존 쿳시의 전작을 찾아 읽었어요. 그리고 가끔 생각날 때마다 그의 작품을 책장에서 꺼내 듭니다. 정말 굉장한 작가예요. 아주 지적이며, 무엇보다 ‘작가적 양심’이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작가임을 판별하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죠. 『마이클 K』, 『추락』 ,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편애하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등등. 쿳시의 글은 독자를 끝없이 사유하게 해줍니다. 『첫번째 날』 을 쓰면서 특별히 참고한 책은 없습니다만, 수년간 쌓아온 독서의 이력 중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양질의 작품들이 있겠죠.

 

 

 


 

 

첫번째 날전혜정 저 | 문학동네
현실과 다른 새로운 가상의 시공간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킬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인간다움’의 의미를 탐색하는 데 걸맞은 장소가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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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