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사전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
자기가 쓰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말을 잘하고 생각을 잘하는 사람의 기본 중 기본이다. 나만의 사전을 두껍게 갖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마음이 부자다.
글ㆍ사진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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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둘다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짜증나요”


“짜증나요? 어떨 때 짜증이 나는데요?”

 

“그냥 짜증이 나요, 하루 종일요.”


“그래요? 그러면 그건 짜증하고는 다른 것일 수 있어요. 소연 씨가 생각하는 짜증이 뭐에요? 나한테 설명을 해줄래요?”

 

(한동안 침묵을 하다가) “기분 나쁜 상태? 누가 나를 괴롭혀서 화가 막 나는 거? 잘 모르겠어요.” (당황했는지 얼굴이 살짝 긴장이 되려는 것이 보인다)


“지금 제가 이렇게 갑자기 짜증이 뭐냐고 물어보는게 짜증 나는 건 아니고요?”

 

“하하.. 맞아요. 이런 상태?”


“그렇죠? 제가 생각하기에 짜증은 어떤 자극에 대해서 과도한 반응을 하는 것이에요. 물이 넘치기 직전의 상태라고 할까요?”

 

상담을 할 때 자주 맞닥뜨리는 상황이다.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서 말을 한다. 살면서 있었던 경험한 일들 중에 자신이 느끼는 억울함, 분노, 서운함, 두려움을 말하고 이를 명료화하고 객관화하는 과정은 정신치료의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막상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위의 “짜증난다”는 사실 기분이 나쁘다, 불쾌하다에 더 가까운 감정 상태였지, 진짜 짜증이 난 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관성적으로 짜증이 난다고 말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니 말을 하는 사람이 짜증과 듣는 사람이 생각하는 짜증은 그 정의가 다를 수 있고, 오해가 생기거나, 정확한 감정에 대한 이해나 소통이 일어나기 어려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제일 먼저 구입하는 것이 사전이다. 정확한 단어의 정의를 이해하는 것 비슷한 단어들 사이의 뉘앙스의 차이를 인식해 나가는 것이 외국어 학습의 제일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해 고민하고, 생각이 엉켜 하루 종일 고민하고, 마음을 졸이고, 관계 사이에서 방황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사용하는 감정을 현 상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적확하게 정의를 내린 단어를 쓰지 못하고 있다.

 

복잡하게 꼬여있는 마음의 문제를 푸는 첫 번째 과제는 엄청난 치료자를 만나는 것도, 대단한 책을 보면서 그 안에서 솔루션을 찾는 것도 아니라, 내 안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마음 상태를 정확히 정의하는 것이다. 꼭 정신분석, 심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를 외우라는 것이 아니다. 나만의 분명한 용례를 알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고, 최대한 분명하고 잘 구분해서 감정을 파악하고 인식한 상태에 잘 판단하고 표현할 줄만 알면 된다.

 

그래서 나만의 사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전을 만들 생각을 하면 막막하기 그지없다. 가장 빠르고 권할만한 방법은 좋은 사전을 모방해보는 것이다. 감정에 대해 잘 알고, 언어에 대해서도 잘 아는, 외국어로 된 책을 번역해서 뭔가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는 면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면 하는 그런 사전을 하나쯤 옆에 두고 내 사전을 만들어본다. 일단 한 글자부터 시작해보자.

 

너무 긴 단어까지 가지 말고.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 이다. 이 책은 2008년에 나온 『마음 사전』 의 후속편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은 문제의식이 있었길래 진지하게 한 때 감정 사전과 같은 글을 내보려고 구상을 한 적 있다. 그런데, 이미 『마음 사전』 이라는 훨씬 괜찮은 책이 나와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첫 자도 쓰기 전에 접어버린 바 있다. 반쯤 썼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면 이도저도 못한 상태가 되어버렸을 거라는 아찔한 두근거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출판사는 시인인 김소연 저자의 앞선 책 『마음 사전』 을 감성과 직관으로 헤아린 마음의 낱말들로, 마음의 감각을 일깨우게 하는 책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10년의 시간이 지나 ‘한 글자’로 되어있는 우리 말의 단어들을 시작으로 일깨워가는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생의 감촉’의 나만의 사전을 내놓게 된 것이다.

 

이 ‘감’으로 시작해서 ‘힝’으로 가나다 순으로 수많은 단어를 나열하고 수십 편의 시나 소설을 인용하거나, 시인만의 감각으로 다듬은 생각의 편린들로 각 단어를 설명하거나, 감각의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있다. 지금부터 김소연 시인이 쓴 몇 단어의 설명을 소개하고, 이에 대해 내가 나만의 생각으로 그 단어에 대해 연상을 해볼 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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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한 글자 사전:  ‘옆’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나와 옆, 그 사이의 영역. 그러므로 나 자신은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장소이자, 나 이외의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장소. 동료와 나는 서로 옆을 내어주는 것에 가깝고, 친구와 나는 곁을 내어준다에 가깝다. 저 사람의 친구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보는데 옆과 곁에 관한 거리감을 느껴보면 얼마간 보탬이 된다.

 

내 사전 : “저이가 내게 곁을 줬다”는 느낌을 받고 싶을 때는 세상을 얻은 것 같이 기쁘지만, “저런 놈에게 곁을 내줬다가는 큰일난다”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거리 두기가 인간관계의 갈망과 허기, 그리고 분노와 질투의 핵심이다. 누군가의 곁에 다가가서 머무르는 것과, 곁으로 오려는 이를 적절히 막아 내며 내 영역을 지켜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한 글자 사전 : 힘의 마지막 단계. 젖 먹던 힘은 배짱에서 악착으로, 그리고 오기로, 그 다음에 깡의 순서로 버전업 되어간다.


내 사전 : 상대가 안되는 걸 알면서도, 겁이 나는 걸 충분히 느끼면서도 그걸 억누르고 덤벼드는 태도. 벼랑 끝에 몰렸다는 위기의식이나 잃을 게 없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새우깡을 먹고 바리깡을 든다고 생기지 않는다.

 


한 글자 사전 : 1980년대 광고계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을 하던 아이템이었고, 1990년대까지는 교양인들이 가방 속에 소지하고 다닌 필수품 가운데 하나였고, 2000년대에는 식당이 후식으로 제공해주던 기호 식품. 지금은 껌같이 되어버린 껌.

 

내 사전 : 이 험한 세상에서 절대 되어서는 안되는 것. 남의 입안에 들어가 단물 다 빠지면 버림 받는다. 내가 껌이 되어 만만해 보여도 안된다. 오래 씹는다고 영양가도 없고, 뱃속에 집어넣어도 안되는 물건. 입밖으로 뱉어진 뒤 그의 신발에 달라붙는 것이 마지막 복수.

 

한 글자 사전 : 일요일 정오 ‘전국노래자랑’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출연자에게 들려주었던 한 음절.

 

내 사전: 이 소리가 나면 모든 게 분명해진다. 파블로프의 개는 먹이를 바라며 침을 흘리고, 즐거운 꿈을 꾸던 나는 현실로 소환된다. 너와 나의 사이도 이렇게 “땡”치며 끝이 난다. 미련은 없다.

 


한 글자 사전 : 삼킨 것들이 역류할 때 나는 소리. 욱하는 건 순간이지만 욱해서 쏟아진 것들의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내 사전 : 누가 그랬나, 분노는 꾹 참고 넘길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고. 욱하는 감정이 드는 걸 느끼는 데서 멈추면 중수, 느끼지도 못한 채 욱하는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면 하수, 욱을 뜨끔 하는 정도의 불쾌감으로 느끼고 웃으며 넘어가면 상수. 욱을 잘 느끼고 다룰 줄 아는 것은 내 마음속 압력솥의 김을 빼는 것이다.

 

어떤가? 한 글자 사전』을 놓고, 내 사전의 단어를 나 혼자 주저리주저리 쓰다 보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마구 떠오르면서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솟아올랐다. 그러면서 ‘내가 더 나은 것도 있는데?’라는 자뻑의 감정까지 생긴다. 이러면 안되는데. 여러분들도 나만의 사전을 만들어보자. 한 글자로 시작해서 점점 글자수를 늘려가면서 써보는 것이다. 그동안 막연하게 써온 감정, 생각의 조각들의 모양새가 아주 분명하고 또렷해 질 것이다. 자기가 쓰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말을 잘하고 생각을 잘하는 사람의 기본 중 기본이다. 나만의 사전을 두껍게 갖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마음이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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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자 사전 #마음사전 #나만의 사전 #말의 의미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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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

2018.03.20

네 해설은 짧을 수록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시인님께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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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go999

2018.03.19

죄송해요. 전 시인의 설명이 더 좋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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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