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잊어버릴 만하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경우
복통, 즉 배가 아픈 것은 어린이에게 아주 흔한 증상입니다. 원인이 뚜렷하고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병은 치료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토하고 설사를 한다면 장염이지요? 장염에서 배가 아픈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장염에는 절대반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충분한 수분 공급입니다. 그러니 수분을 섭취하도록 하고, 푹 쉬고, 배를 따뜻하게 해주면 장염이 나으면서 복통도 사라집니다. 흔히 맹장염이라고 하는 충수돌기염도 배가 아픈 병입니다. 염증이 생긴 충수돌기를 수술로 떼어 내면 복통도 사라집니다. 아이들은 감기나 중이염 등 흔한 병으로 열이 나거나 어디엔가 염증이 생기면 배도 같이 아픈 수가 많습니다. 역시 원인 질환을 치료해주면 해결됩니다. 여기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멀쩡하게 잘 지내다가 잊어버릴 만하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경우입니다.
초등 2학년짜리가 학교에서 돌아와 잘 노는가 했더니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얼굴이 핼쑥해 보이는 것이 많이 아픈 모양입니다. 열도 없고, 점심도 잘 먹었고, 대변도 잘 봤고, 며칠 새 어디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평소에도 활발하게 잘 놀고, 키나 몸무게도 또래와 비슷합니다. 어쨌거나 고통스러워 하니 눕히고, 배에 따뜻한 것을 올려주니 스르르 잠이 듭니다.
배 아프다고 한 것이 처음은 아닙니다. 가끔 그랬는데 조금 지나면 가라앉곤 했지요. 학원에 다녀오거나, 옆집 아이와 놀 때는 너무 멀쩡해서 꾀병이 아닐까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2, 3주 전에도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다녀왔네요. 의사 선생님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며,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많은 “반복성 복통”이니 안심하고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어르신들도 아이들이 클 때는 다 그런다고 걱정 말라고 하시지만 이웃 부모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보고 들은 것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건강해 보여도 속으로 기가 허약한 것이니 보약을 먹여야 한다는 둥, 그건 장삿속이고 유산균제를 먹여야 한다는 둥, 우유가 사실은 독이라는 둥, 두유는 더 나쁘다는 둥, 환경호르몬이나 납 때문이라는 둥, 수많은 둥둥둥이 북소리처럼 시끄럽게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그때, 아이가 방에서 나옵니다. 볼에 발그레하게 혈색이 도는 것이 다른 아이 같습니다.
대부분의 반복성 복통은 복부 중앙, 배꼽 부위가 아프다
“왜 더 누워 있지 않고?” “이제 안 아파요. 옆집 슬기랑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기로 했어요!” 전형적인 스토리입니다. 이렇게 다른 문제 없이 건강하고 활발한 아이가 때때로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를 “반복성 복통”이라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3개월간 3번 이상, 일상 활동을 못 할 정도로 배가 아픈 일이 반복되는 경우라고 정의합니다. 대개 1시간 이내로 가라앉고, 가라앉으면 멀쩡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비슷한 일이 자꾸 반복되면 부모 입장에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반복성 복통은 아주 흔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의 10-20%에서 관찰된다고 합니다. 한 반에 서너 명은 겪는다는 뜻입니다. 배가 아프다는 아이들은 많은데, 검사를 아무리 해봐도 별 이상이 없고, 몇 년간 전혀 치료하지 않고 지켜봐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게 자라더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70년 전쯤입니다. 의사들은 멋지게 들리지는 않지만 “반복성 복통”이란 병명을 붙였습니다. 치료 원칙은 ‘부모와 어린이를 안심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었던 시절에는 의사가 설명해주면 부모들도 별 의심 없이 믿고 따랐습니다. 물론 절대 다수의 어린이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자랐지요.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온갖 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별의별 이상한 소문들이 떠돌아다닙니다.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이라거나, “의사들은 모르는” 이란 수식어를 달면 더 잘 퍼집니다. 세상에 의심만큼 무서운 건 없지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일단 안심했던 사람도 이런 소리를 자꾸 들으면 서서히 의심이 생겨납니다. 다시 의사를 찾아 갔더니 역시 아무런 치료도 해주지 않고 기다리라고만 합니다. 답답하죠. 화도 납니다. ‘아니 약이라도 좀 주면서 기다리라고 할 것이지!’ 분노한 마음 속에 다시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의사들은 모르는” 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역시 그랬군!’ 애석하게도 이렇게 되면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물론 이 병이 처음 알려졌던 70년 전에 비하면 의학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그간 몰랐던 병들, 알았지만 검사하기 까다로웠던 병들도 간단히 진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린이에게도 헬리코박터 감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글루텐 불내성이나 호산구성 위장관염 등도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반복성 복통은 대부분 원인을 모르며,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의사들이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자고 하지는 않습니다. 큰 병을 놓치면 안 되므로 진찰할 때 몇 가지를 눈 여겨 봅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반복성 복통은 복부 중앙, 배꼽 부위가 아픕니다. 배꼽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뭔가 원인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요. 아이가 창백해 보이거나,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체중이 줄거나, 열이 동반되거나, 밤에 자다 깰 정도로 복통이 심한 경우에도 다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전신을 진찰하여 배 속에 장기가 커져있거나, 덩어리가 만져지지 않는지, 항문 주위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관절이 붓거나 아파하지는 않는지, 기타 다른 병의 징후가 없는지도 유심히 살핍니다.
그래도 부모가 걱정이 가라앉지 않거나, 진찰상 검사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피검사, 소변검사, X-선 검사, 초음파 등을 시행합니다. 이때 중요한 건 처음부터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검사를 해서 미심쩍은 부분이 없도록 하는 겁니다. 피검사, 소변검사를 조금 해봤는데 이상이 없어서 좀더 지켜보니 아이가 또 아프다고 합니다. 그래서 X-선을 찍어보니 이상이 없고, 또 몇 주 뒤에 아프다고 해서 이번에는 초음파를 봅니다. 이런 식으로 찔끔찔끔 검사를 하면 부모는 점점 더 의심이 커집니다. 의심만큼 무서운 건 없다고 했지요? 아예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시원하게 검사하고 “이제 이만큼 했으니 안심하고 지켜봅시다!”하는 편이 낫다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심각한 이상이 없고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복통이 꾀병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는 진짜로 배가 아픕니다. 따뜻한 관심과 친절한 설명은 의사가 환자를 볼 때뿐만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대할 때도 가장 좋은 치료약입니다.
-
서민과 닥터 강이 똑똑한 처방전을 드립니다서민, 강병철 저 | 알마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흔하게 맞닥뜨리는 고민 중 열네 가지를 뽑아 정답에 가장 가까운 해답과 함께, 잘못된 건강 염려증을 유발시킨 사회를 향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강병철(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대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2005년 영국 왕립소아과학회의 ‘베이직 스페셜리스트Basic Specialist’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 살고 있다. 도서출판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의 대표이기도 하다. 옮긴 책으로 《원전, 죽음의 유혹》《살인단백질 이야기》《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