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인공이 아닌 세상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이 딱 그랬다. 75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까지 미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의 그림을 보면, 한적한 어느 시골마을의 계모임 같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그림.
글ㆍ사진 김서령(소설가)
201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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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은행 입사 시험에 합격했고 그녀가 발령받은 첫 지점은 고향집, 우리 가족이 20년이 넘도록 산 동네 초입에 있었다. 첫 사회생활을 박작대는 소도시에서 시작하게 된 여동생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엄마는 신이 났다. 점심시간이 되면 은행 직원들을 집으로 불러다 밥상을 차려주기도 했고 짬이 날 때마다 간식을 싸들고 은행에 들러 직원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해물탕 냄비를 들고 은행으로 간 적도 있었다 하면 말 다한 거지.

 

마침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친구들도 모여 앉기만 하면 이제 곧 받을 퇴직금을 어떻게 굴리느냐, 하는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3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만 해온 그들은 사업도, 장사도 딴 세상 일일 뿐이어서 아버지들은 결국 은행에 묵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모두들 여동생네 지점으로 몰려갔다. 친구의 막내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신입 주제에 여동생은 은행에서 실적이 가장 높아졌고 은행 전 지점을 통틀어서도 몇 년간 탑랭커를 유지했다. 은행은 합병을 앞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명예퇴직을 했고 정리해고를 당했지만 여동생은 지점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VIP 담당 과장으로 여전히 은행에서 일하는 중이다.

 

엄마는 한 달에 한두 번쯤 계모임을 하는데 그럴 때면 여동생은 은행 자리를 잠깐 비우고서라도 꼭 그 자리엘 찾아간다.

 

“네가 거길 왜 가? 아줌마들 바글바글한 자리엘?”

 

내 질문에 여동생은 세상 물정 모르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10분만 시간을 내면 되는 일이야. 가서 제일 목소리 큰 아줌마를 찾는 거야. 그리고 아줌마한 테 슬그머니 봉투 하나 내미는 거지. 십만 원쯤. 아줌마, 오늘 다들 노래방 가세요. 그러면 게임 끝.”

 

역시 여동생은 수완이 좋았다. 제일 목소리 큰 아줌마는 여동생이 준 봉투를 손에 들고 “아이고야, 이 집은 딸내미를 어찌 이리 잘 낳아놨나!”부터 시작해 엄마의 기분을 한껏 추어주고 “가시나, 저거 어릴 때 공부는 딸 셋 중에서 젤 못하더니만 젤로 효도를 하네!”라는 아줌마들의 칭찬 세례와 함께 여동생은 맥주도 한 잔 받아마셨다. 여동생의 아이 둘을 키워주는 엄마는 걸핏하면 “니 새끼들, 니가 다 데리고 가!” 성질을 부리곤 했지만 그렇게 계모임에 봉투를 한 번 찔러주고 나면 한동안은 구몬 학습지 비용도 내주고 피아노 레슨비도 내주면서 잔소리 따위 입을 닫았다. 여동생으로서는 정말이지 남는 장사였다.

 

10분만 시간을 내면 되는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 자리에 꽤나 오래 앉아있곤 했다.

 

“진짜 재밌어. 별의별 얘길 다 들어. 아저씨 바람피운 얘기도, 조카딸 이혼한 얘기도 막 나온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 얘긴데도 얼마나 웃긴지 몰라. 언니도 한 번 가봐.”

 

그러면서 종알종알 제가 들은 이야기들을 전해주는데, 나 역시 베개를 껴안고 침대를 데굴데굴 구르기 일쑤였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승전결도 없고 그 어떤 개연성도 없지만 나무 한 가득 주렁주렁 달린 흔해빠진 꽃사과처럼 달큼하고 싱싱한 이야기. 사우나 안에서 등이 빨갛게 익어도 낯선 아줌마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느라 일어서지 못하는 그런 기분.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이 딱 그랬다. 75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까지 미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의 그림을 보면, 한적한 어느 시골마을의 계모임 같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그림.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찬찬히 훑으며 그림 속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하나하나 다 보아야만 그림이 읽혔다. 어느 마을의 결혼식과 시장, 그리고 파티날 풍경을 채우고 있는 작은 존재들, 그들의 삶, 그들의 이야기.

 

『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 는 그녀의 그림을 읽어주는 책이다.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지만 모두가 주인공인 자잘한 삶이다. 나 혼자 주인공이 아니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쫀득한 즐거움이 설탕처럼 녹아 있다. 다음 달엔 정말 엄마의 계모임에 따라가볼까 봐. 십만 원만 봉투에 넣어서.

 


 


 

 

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이소영 저 | 홍익출판사
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국민들에게 응원의 노래가 되었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가득한 그림들은 그 어느 유명화가의 작품보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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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 #모지스 할머니 #주인공 #평범한 삶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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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cho11

2018.02.05

간결하고 재미있는 글은 발견하기 어려운데, 오늘 이 수필? 딱 간결하고 찰지게 재미있네요!
조만간 모지스 할머니의 책도 구입해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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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