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은행 입사 시험에 합격했고 그녀가 발령받은 첫 지점은 고향집, 우리 가족이 20년이 넘도록 산 동네 초입에 있었다. 첫 사회생활을 박작대는 소도시에서 시작하게 된 여동생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엄마는 신이 났다. 점심시간이 되면 은행 직원들을 집으로 불러다 밥상을 차려주기도 했고 짬이 날 때마다 간식을 싸들고 은행에 들러 직원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해물탕 냄비를 들고 은행으로 간 적도 있었다 하면 말 다한 거지.
마침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친구들도 모여 앉기만 하면 이제 곧 받을 퇴직금을 어떻게 굴리느냐, 하는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3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만 해온 그들은 사업도, 장사도 딴 세상 일일 뿐이어서 아버지들은 결국 은행에 묵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모두들 여동생네 지점으로 몰려갔다. 친구의 막내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신입 주제에 여동생은 은행에서 실적이 가장 높아졌고 은행 전 지점을 통틀어서도 몇 년간 탑랭커를 유지했다. 은행은 합병을 앞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명예퇴직을 했고 정리해고를 당했지만 여동생은 지점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VIP 담당 과장으로 여전히 은행에서 일하는 중이다.
엄마는 한 달에 한두 번쯤 계모임을 하는데 그럴 때면 여동생은 은행 자리를 잠깐 비우고서라도 꼭 그 자리엘 찾아간다.
“네가 거길 왜 가? 아줌마들 바글바글한 자리엘?”
내 질문에 여동생은 세상 물정 모르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10분만 시간을 내면 되는 일이야. 가서 제일 목소리 큰 아줌마를 찾는 거야. 그리고 아줌마한 테 슬그머니 봉투 하나 내미는 거지. 십만 원쯤. 아줌마, 오늘 다들 노래방 가세요. 그러면 게임 끝.”
역시 여동생은 수완이 좋았다. 제일 목소리 큰 아줌마는 여동생이 준 봉투를 손에 들고 “아이고야, 이 집은 딸내미를 어찌 이리 잘 낳아놨나!”부터 시작해 엄마의 기분을 한껏 추어주고 “가시나, 저거 어릴 때 공부는 딸 셋 중에서 젤 못하더니만 젤로 효도를 하네!”라는 아줌마들의 칭찬 세례와 함께 여동생은 맥주도 한 잔 받아마셨다. 여동생의 아이 둘을 키워주는 엄마는 걸핏하면 “니 새끼들, 니가 다 데리고 가!” 성질을 부리곤 했지만 그렇게 계모임에 봉투를 한 번 찔러주고 나면 한동안은 구몬 학습지 비용도 내주고 피아노 레슨비도 내주면서 잔소리 따위 입을 닫았다. 여동생으로서는 정말이지 남는 장사였다.
10분만 시간을 내면 되는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 자리에 꽤나 오래 앉아있곤 했다.
“진짜 재밌어. 별의별 얘길 다 들어. 아저씨 바람피운 얘기도, 조카딸 이혼한 얘기도 막 나온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 얘긴데도 얼마나 웃긴지 몰라. 언니도 한 번 가봐.”
그러면서 종알종알 제가 들은 이야기들을 전해주는데, 나 역시 베개를 껴안고 침대를 데굴데굴 구르기 일쑤였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승전결도 없고 그 어떤 개연성도 없지만 나무 한 가득 주렁주렁 달린 흔해빠진 꽃사과처럼 달큼하고 싱싱한 이야기. 사우나 안에서 등이 빨갛게 익어도 낯선 아줌마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느라 일어서지 못하는 그런 기분.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이 딱 그랬다. 75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까지 미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의 그림을 보면, 한적한 어느 시골마을의 계모임 같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그림.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찬찬히 훑으며 그림 속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하나하나 다 보아야만 그림이 읽혔다. 어느 마을의 결혼식과 시장, 그리고 파티날 풍경을 채우고 있는 작은 존재들, 그들의 삶, 그들의 이야기.
『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 는 그녀의 그림을 읽어주는 책이다.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지만 모두가 주인공인 자잘한 삶이다. 나 혼자 주인공이 아니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쫀득한 즐거움이 설탕처럼 녹아 있다. 다음 달엔 정말 엄마의 계모임에 따라가볼까 봐. 십만 원만 봉투에 넣어서.
-
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이소영 저 | 홍익출판사
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국민들에게 응원의 노래가 되었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가득한 그림들은 그 어느 유명화가의 작품보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안이 되었다.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mscho11
2018.02.05
조만간 모지스 할머니의 책도 구입해서 읽어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