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는 “모든 예술가에게는 시대의 각인이 찍혀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현 시대의 미술가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어떻게 비추고 있을까? 1997년 외환위기와 정권 교체 이후 시대정신들은 이전의 한국 미술과는 다른 변화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신간 『한국 동시대 미술 1998-2009』 는 이때의 미술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 책의 저자 반이정 미술 평론가를 만나 우리가 왜 동시대 미술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현장 비평가의 감각으로 풀어낸 동시대 미술
책 제목에 쓰인 ‘동시대 미술’은 ‘현대 미술’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두 용어는 거의 같은 의미로 혼용되어 쓰이지만, 여전히 세간에선 ‘현대미술’이 입에 붙어선지 ‘동시대 미술’이란 용어의 사용엔 인색한 편이죠. 그런데 미술 전공자들은 의미를 분명한 동시대 미술을 더 자주 씁니다. 사전적으로 현대 미술modern art은 인상주의 미술이 등장한 1860년대부터 팝아트와 개념미술이 출현한 1970년대까지로 봅니다. 반면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는 현대 미술 이후의 흐름, 그 용어가 뜻하는 것처럼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미술이에요. 자주 쓰는 호칭의 차이는 미술을 이해하는 진도의 차이까지 결정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동시대 미술’을 제목에 넣었어요. 그게 더 정확한 표현이기도 했고요. 현대 미술이라는 친숙한 호칭이 역설적으로 일반인에게 현재 진행 중인 미술의 실상을 가리는 진입장벽이 되고 있거든요.
동시대 미술을 읽고 이해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비엔날레가 전국에서 5개 이상 개최될 만큼 동시대 미술 전시가 양적으로 팽창된 상태인데, 실상 자발적으로 동시대 미술을 향유하는 인구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 동시대 미술을 소개하는 책이 태부족한 점도 한 이유라고 봅니다. 대형 서점에서 예술/대중문화의 베스트 랭킹에 미술책이 드물게 올라오거든요. 자세히 보세요. 죄다 반 고흐, 피카소, 뒤샹, 앤디 워홀처럼 이미 귀에 익은 서양 현대미술 작가들만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그 후로 전개된 미술의 흐름을 다룬 책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려워요.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다보니 진도가 나가지 않는 거죠. 하지만 보세요. 앤디 워홀은 20세기 중반 전성기를 누린 미국 미술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2018년 한국에서 살고 있잖아요. 동시대인이 동시대미술을 안다는 게 자연스럽죠. 교양의 진도를 자꾸 20세기에 묶어두지 마세요.
책 제목 『한국 동시대 미술 1998-2009』 에서 또 다른 특이점은 1998~2009까지 딱 12년만 다뤘다는 점인데, 어떤 이유에서죠?
목차의 시작점인 1998년의 한 해 전인 1997년, 우리나라는 외환위기와 헌정 사상 첫 정권 교체를 체험합니다. 그 후 우리나라는 전 분야에서 구조조정이 일어나는데, 이 무렵 미술계의 세대교체도 함께 진행됐습니다. 진정한 한국 동시대 미술의 상징적인 출발은 외환위기 이후라고 봤기에 1998년부터 다뤘습니다. 또 목차가 다루는 12년을 독립된 12개의 주제와 연결해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1998년은 정권교체와 새로운 동양화의 출현, 1999년은 대안공간이라는 새로운 전시장의 출현, 2000년은 ‘일상’을 예술의 소재로 다루는 무수한 미술의 출현, 2001년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검열의 문제점, 2002년은 네티즌의 유용한 플랫폼으로 쓰인 디지털 사진의 전성기, 2003년은 대중문화의 영향력에 가장 쉽게 호응하는 팝 아트의 강세, 2004년은 중요한 미술상을 휩쓰는 미디어 아트의 전면화, 2005년은 사진의 정확성을 능가하는 극사실주의 회화와 회화의 자의식이 담긴 메타회화의 관계, 2006년은 관객참여 미술의 유행, 2007년은 미술이 인구에 회자되는 특별한 순간, 즉 미술이 스캔들과 연루되거나 미술시장에서 고가에 낙찰되는 순간, 2008년은 선배 페미니즘 미술과는 달리 개인의 욕구에 집중한 차세대 여성 미술가의 출현, 끝으로 2009년은 미술 비평의 속사정을 다룹니다. 이렇게 12개의 독립된 주제로 우리나라 동시대 미술의 전체 지형도를 ‘지도’ 보듯 조망하게 꾸몄습니다.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2009년 어느 미술대학의 수업 때, 한국 동시대 미술을 주제별로 이해시킬 방법을 궁리했으나 마땅한 교재가 시중에 나와 있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존하는 국내 유명 미술가들을 비평한 작가론 묶음은 많은데, 2000년 전후의 한국 동시대 미술사, 혹은 그 무렵의 한국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짚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직접 강의안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요. 마침 대학교 강의는 보통 12강으로 편성되거든요. 그때의 강의안을 원고로 다듬어서 『월간미술』 이라는 미술잡지에 2년간 연재했고, 그 글이 이 책의 초벌이 되었어요. 그런데 막상 당시 연재 원고를 보니 마감에 맞춰 글을 보내느라 부끄러운 글이었어요. 그래서 4년여의 수정작업,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목차만 같을 뿐 원고를 새로 다시 썼죠. 그래서 완성된 책이 이번 신간입니다.
이번 책이 시중에 풀린 다른 한국 동시대 미술책들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먼저 서점가에서 만나는 한국 동시대 미술책은 대부분 작가론 묶음이 거의 전부입니다. 더구나 여전히 일반인도 익히 아는 작가들만 다루는 경우가 많고요. ‘동시대성’이 부족하다고 생각이 돼요.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연대기로 전개되는 미술사 책이지만, 각 장마다 독립된 주제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동시대 미술의 전체 지형도를 지도 보듯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자부합니다. 주제 중심으로 구성되어 매 장마다 많은 작가와 작품 도판이 동원됩니다.
12개의 장마다 각각 시대상이 요약되어 있는 것도 특이한 구성 같았어요.
동시대 미술도 한 시대의 일부이기에 각 장 도입부에 해당 연도의 시대상을 요약했습니다. 아마 그 시절을 기억하시는 분은 묘한 친근감을 느끼시리라 기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기왕이면 각 장의 주제와 연관 있는 시대상을 골랐습니다. 예를 들면 첫 장인 1998년은 헌정사상 첫 정권교체를 시대상으로 소개하는데, 그해에 동양화의 세대교체도 이뤄지거든요. 또 팝 아트가 나오는 2003년의 시대상엔 팝페라 테너 임형주가 애국가를 부른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식이 소개되는데, 설마 임형주와 노무현 대통령이 팝 아트와 연관 있는 인물일 리 없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격식 파괴나 팝페라 가수에게 대통령 취임 때 애국가를 요청하는 파격은 팝 아트의 속성과 통하며, 저는 그것을 당대의 시대정신으로 봤습니다.
『한국 동시대 미술 1998-2009』 의 차별점을 압축해서 말한다면?
현대 미술/동시대 미술 책은 흔히 이론에 의존한 난해한 용어로 기술되곤 하고, 그 같은 구성이 미술과 대중 사이에 진입장벽을 세운다고 봅니다. 이 책은 제가 활동했던 시기를 다루기도 하거니와, 현장 비평가의 감각과 기억으로 풀어 쓰려 했고,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도록 모든 문장을 간결하게 다듬었어요. 또 비평을 다룬 마지막 장을 제외한 나머지 11개의 장마다 각 장의 대표 미술인을 2명 정해서 그들의 인물사진을 한 면에 수록하고 짧은 인상평도 적었습니다. 대중은 상징적인 인물이라면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거든요. 이 책은 2000년대 한국 동시대 미술의 전체 지형도를 지도처럼 조망하도록 구성하느라 560쪽 분량입니다. 하지만, 콤팩트한 사이즈에 가벼운 중량으로 제작되어 부담이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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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시대 미술 1998-2009반이정 저 | 미메시스
미술 시장/미술계 스캔들, 여성 미술 등 각각 독립된 12개의 주제를 연결시켰고, 각각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시대상과도 연관지음으로써 미술과 현실의 유기적인 관계를 설득하고 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