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만 잘 춘다고 무용을 한다 할 수 있을까? 무용가의 정체성과 철학과 개성이 담기지 않은 작품도 작품인가? 대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는 안무가 장현희는 2002년 장 댄스 프로젝트를 창단, 올해 6월 17일 웃는 얼굴 아트센터의 청룡홀에서 10회째 개인 공연을 한다. 그를 무용가 탐구 인물로 선정했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까지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구에서 활동해도 집이 수원에 있어요. 부지런하고 궁금한 것 못 참는 게 제 성격이라 여기저기 보고 다니는 것도 좋아해요.
공연도 자주 관람하시나요?
2002년부터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해 방학 때 해외 페스티발 참관을 가곤 했어요. 이제는 웬만한 작품들을 서울에서도 만나볼 수 있으니 우리 무용공연 환경도 많이 좋아졌지만 다양한 예술 ? 문화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있어요.
최근 어떤 해외공연작품을 관람하셨나요?
지난 3월 LG아트센터에서 피나 바우쉬의 2008년 작 <스위트맘보>를 봤습니다. 시대가 지나면 과거라는 사실을 눈으로 마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국 가디언지에 언급된 것처럼 “그녀의 육체는 그곳에 없지만 정신은 그곳에 있었다.”가 맞는 것 같았어요. 공연을 보면서 그 시대에 마주할 수 있는 작품들은 놓치지 말고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극에도 관심이 많으시다고요?
러닝 타임 4시간의 반 호프 연출 <파운틴 헤드>는 공연 시간 내내 나에게 수많은 질문과 답을 요구하더군요. 좋았다는 말보다는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공연 후에는 인터넷으로 책까지 구매 했으니까요. 연극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텍스트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읽고 있습니다.
2017년 상반기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신년에 오페라하우스에서 <오페라타 박쥐>를 공연했고요. 이후 연극 극단 안무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작년엔 뮤지컬과 오페라에 집중했다면 올해는 서커스와 연극작업에 관심이 있어요. 집 앞 대구미술관 견학을 자주 하는데요. 저는 주변에 있는 다른 예술과 만나는 시간을 즐기며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구시립무용단원으로 활동을 하셨잖아요.
대구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의 김소라 교수의 제자로, 1995년도에 시립무용단에 입단, 5년간 활동했습니다. 입단 2년 차에 차석단원으로 진급하게 되었는데 수, 차석 무용수보다 나이가 어려 군무 역할과 수, 차석이 무용수들에게 주어지는 듀엣 등의 역할까지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굉장히 많았어요.
첫 안무는 언제 했나요?
대구시립 단원 창작공연을 통해 안무가로 데뷔했습니다. 당시에는 독특한 움직임에 관한 새로운 것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였고, 그 시기를 지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유를 만들고 연관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왜 몸으로만 움직이려 드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많은 움직임을 만들고 작업해 나가도 움직임에서 새로운 움직임이란 나에게는 그냥 답답함의 연속으로 느껴졌어요. 몸으로만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나 자신에게 답답함을 넘어 한계를 느끼던 중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학원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준비과정을 통해 1기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실기과 전문사(석사)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전문사 과정에서 자신이 얻고자 한 것을 얻었나요?
대학원 수업은 일주일에 한 두 번 뿐이었습니다. 무용단에서 시간 허락을 해주었지만 29세의 나이에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습니다. 대학원 과정 2년간 답답했던 나로부터 탈출하고 무엇에 집중해 비어있던 나를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거든요. 수업이 없을 때 음악을 들으러 음반사에 가고, 연극, 미술전시장을 찾고 책을 보러 서점에 가는 동기생들의 일면에서 지방에서 제가 하던 것에서 탈피하는 일상을 발견했던 것이지요. 공부 또한 국내외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다양하게 받았어요.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지방 서울 간 문화적 괴리감을 많이 느꼈나 보군요.
네. 예술적 차원이 다르더군요. 처음 입학한 후 대구와 서울 간의 괴리감은 5년 정도였다고 생각했는데 한 달이 지나서는 10년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늦은 나이에 알게 된 무용의 전반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울고 다녔습니다. 시립무용단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서울 출신들이 대구에 와서 무용수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안무자는 서울 출신들을 보면서 칭찬을 하는 거예요. 스스로 춤은 내가 더 잘 춘다고 생각하는데 그때는 몰랐던 것을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그때야 알겠더군요. 무언가 다름이 있습니다.
외국 공연 관람 가서는 더 큰 충격이었겠어요.
맞아요. 또 방학 때 외국의 페스티발에 참가를 하는 것 또한 저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해외는 여행을 가는 거로만 인식했던 저에겐 정말 놀라운 일이었죠. 분위기가 그러하니 배낭을 메고 저도 페스티발을 다니고 영어를 모르지만 영어로 된 책을 사고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음악들을 사 모으면서 감각을 하나씩 키우게 된 것 같습니다.
스위스 코칭 프로젝트에도 참여를 하셨나 봅니다.
졸업 후 한국안무가페스티발에서 작품
서울에서 활동하지 않고 대구로 가신 이유는요?
전문사 진학은 제가 서울에서 활동하기 위함이 아니었어요. 내가 너무 늦은 나이에 깨달았던 그 지나간 귀한 시간을 후배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단축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 제가 배운 것을 다 알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13회 전국무용제에서 최우수연기상과 우수상을 받았는데요. 스위스에서 돌아온 후 출품한 것인가요?
네 맞습니다. 2004년 대구무용제에 <피할수 없는...>으로 참가를 했고 대상을 받아 전국무용제에 출전했습니다. 작품은 연극적인 성향에 가까운 오브제와 의상 등으로 무대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움직임에서도 피지컬적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작품은 무거웠고 추상적이었죠. 음악 또한 장르의 경계를 허물어 바흐, 모차르트, 몬테베르니, 일렉트로, 싱어송라이터 곡들 등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로 춤과 연결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좀 파격적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때 이인수가 연기상을 받기도 했죠.
매년 개인 공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요.
무용제 이후 작품에 대한 평가가 좋았어요. 지원금을 받게 되면 지원금으로 혹은 자비를 털어서 공연을 올리고 있어요.
효성여대, 한예종 전문사, 단국대학까지 참 다양한 학업 과정을 거쳤어요.
공부하고 싶은데 어느 학교를 지망할까를 고민할 때 단국대학교를 추천하더라고요. 스스로 필요로 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지 좋은 간판을 따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거든요. 작품 활동을 하면서 인간의 심리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심리학을 공부할까도 생각을 했었는데 잠시 보류를 했습니다. 대구무용협회 이사로 있다 보니 협회의 행사 중 하나인 ‘차세대안무가전’을 맡아 하면서 예술경영에 대한 마인드가 전무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여러 가지 시스템을 알지 못하니 자꾸 남들에게 의존하는 것 같고 예술경영 공부가 지금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국대학교 박사를 수료하셨는데요. 이후 작품 스타일이 바뀌었나요?
학교로 인해 바뀌기보다는 작업을 통해 연구하면서 바뀌는 것 같습니다. 사회와 예술이 결합한 인간 본연에 대한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안무작들도 사회적, 정치적인 면이 강한 성향으로 나타나고 인간 본연에 대한 물음으로 작품스토리가 전개되는데요.
장현희 공연의 주 관객층은요?
사실 제 작품을 전공자나 비전공자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압니다. 3년 전 우리 누구나 갖고 있고 또 일상적으로 부르는 이름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본 작품
요즘은 자신의 안무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나요?
현재 관심사는 여전히 사회, 예술, 인간, 구조, 분열, 심리 등입니다. 2016년 안무는 스스로 탈피에 따른 개념을 만드는 작업으로 진행했습니다. 기존에 해 왔던 안무작업과 공연의 전반적인 기획, 연출 등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풀어나가려 했어요.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또 다른 개념으로 무용에 접근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결합과 융합인 컨템포러리 아트 & 모던 소사이어티 컴바이너입니다. 현재성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예술 속에서 현대 사회와 결합하고 융합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인데요. 무용수에서 안무자로 거듭나고 있고 이제는 안무자이지만 결합자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무용 안의 무용의 또 다른 변화, 하나의 예술에서 다른 예술의 결합, 그 결합은 곧 사회와 결부시키고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죠. 한 무대에 다양한 장르의 연출로서의 융합이 아닌 새로운 결합으로의 융합을 생각하며 표현의 방식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표현의 한계를 넘어선,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는 예술의 표현 한계에 대한 모험을 하고자 합니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예술에 따른 복합적인 작업을 구상 중입니다.
무용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처음 미술을 배웠으나 움직이기 좋아하는 제게 정적인 미술은 고문이었습니다. 음악 또한 콩쿠르에 나가 상도 받았지만 음악적 감각이 없었고요. 중3때 무용반 선생님 덕분에 조미숙 선생에게서 춤을 배워 효성여대에 입학을 했습니다.
아직도 무용수로서 무대에 오르는지요?
작년 <아버지의 이름으로> 라는 작품으로 PAF에서 안무상을 받았습니다. 본래는 출연 생각이 없었어요. 무용수에게서 내가 원하는 막춤을 끌어내지 못해 제가 춤을 추었죠. 작품 안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아 아련함과 그리움이 담겨있어요. 이 작품은 올해 다시 무대에 올릴 계획을 하고 있고요.
6월 공연되는 작품 <닭_쳐, 소음>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올해 개인공연 10회를 맞이하는데요. 다행히 대구문화 재단 예술진흥지원사업기금을 받아 6월 17일 웃는얼굴 아트센터 청룡홀에서 공연합니다. 작품 내용은 인간의 존엄과 삶에 대한 질문으로 작품을 만들었는데요. 결론적인 해답보다는 존엄한 삶에 대해 들여다보며 생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글 이수연(yeonemail@gmail.com)
http://ch.yes24.com/Article/View/33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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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사람들
월간 <춤과사람들>은 무용계 이슈와 무용계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전문잡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