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될까? ……싶었다. 막연하게 ‘합체! 크로스!’ 같은 분위기로 시인과 만화가를 의기투합시키면 될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그러다가도 더더욱 ‘아, 이건 안 될 것 같다’라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자칫 오락가락하는 예감에 휩쓸려 의욕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윤후 시인과의 만남은 나를 호기롭게 만들었다. 이 좋은 글노래꾼은 아직 뭐가 될지 모를 그것을 조심스럽게 ‘같이’ 상상해주었다. 태초에, 그의 첫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을 키로 삼아 시작된 상상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펼쳐졌을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한 소년이 우주 공간에서 유영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이윽고 소년은 헬멧을 벗고 진공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상쾌한 듯. 진동을 전달하는 매질이 없어 전혀 들릴 리 없는 음악과 말소리도 들린다. 이제 소년은 우주복을 모두 벗는다. 러닝셔츠와 트렁크 팬티 차림이다. 소년은 자기 얼굴이 흐릿하게 비치는 황금빛 헬멧 유리에 무언가 글을 적는다. 어쩌면 시를. 다 적은 소년은 헬멧을 쓰고서 다시 우주복을 입으려 하지만 어느새 자란 탓에, 통으로 된 우주복에는 한쪽 다리만 겨우 들어갈 뿐이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상쾌한 진공도 헬멧 선바이저의 부끄러운 낙서도 조잡한 무중력도 모두 사라지기 전에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 진짜 막연했다.
이즈음 나타난 구원의 사람이 바로 노키드 만화가였다. 이 좋은 그림이야기꾼은 저 괴이쩍고 의뭉스러운 편집자의 상상에 별가루를 뿌려줄 수 있는 우주의 절대 ‘무언가’였다. 평소 시를 읽은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편집자의 머릿속을 넘어 시인의 머릿속까지 들어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공감/표현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그린 소년은 그냥 남자아이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시어 ‘소년’이 변한 모습이어서 무척 좋았다. 누구라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시인은 만화가의 그림을 좋아했고, 만화가는 시인의 글을 좋아했다. 얼마 전에 진행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인은 『구체적 소년』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 만화가의 것이라 여긴다고 말했고, 만화가는 『구체적 소년』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시인의 것이라 여긴다고 말했다. 작업하면서 사실 긴 시간 같이 보낸 적이 없는 두 사람인데 왜 이렇게 사이가 좋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곧 책에 실린 시인의 코멘터리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기 구상으로는 이 책에 만화만 실릴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만화가에게 모든 짐을 떠안겨버릴 수는 없기에 (대한민국 사상 초유의 작업을 맡게 된) 만화가에게 시인은 상냥한 편지를 보내고 말았다. 그 글은 내가 볼 때 ‘좋아요’와 ‘하트’를 수조 개는 받을 만큼 좋았다. 덜컥, 책에 싣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어쩌면 사적인 영역이 담긴 섬세한 글이기도 해서 서윤후 시인이 책에 싣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혼자 끙끙거렸다. 다행히 노키드 만화가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작업이 거의 끝날 무렵, 표지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시인에게 책에 코멘터리를 넣자고 말했다.
결과는? 그렇다. 바로 훨씬 더 좋은 『구체적 소년』이다. 그리고 이로써, 앞으로 이어질 만화시편 시리즈의 기본 구성이 완성되었다. 편집자로서 두 저자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서윤후 시인의 시구를 변용한 이 말을 또 남기고 글을 마칠까 한다.
“만화시편은 내일도 독자를 구직하겠습니다.”
이책(네오카툰 편집자)
네오카툰 팀장
jijiopop
2017.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