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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방식’이 아니라 ‘저탄수화물식’이 중요하다
TV에서 고지방 저탄수화물식에 대한 특집을 방송한 이래 관심이 뜨겁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엄청나게 열량이 높은 고지방식을 하면서도 살을 뺀 사람들이 나왔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식단을 몸소 실천하는 의사들까지 출연해서 체중 감량은 물론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 수치 등 건강지표가 개선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원자를 대상으로 4주간 체험을 통해서도 같은 결과를 얻었으니 믿을 만해 보입니다. 지독하게 빠지지 않는 살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는 입장에서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녀의 비만으로 고민하는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콜레스테롤 함량이 높은 음식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올리는 주범이 아니고, 고기를 피하는 것이 비만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오래 전에 알려졌습니다. 저도 부모님께 20년째 똑 같은 말씀을 드리는데 여전히 “살 찌니까 고기는 적게 먹는다”고 하십니다. 의사인 아들 말도 이렇게 받아들이기 힘든데 방송에 한번 나오니까 “얘야, 고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더라” 하십니다. 과연 방송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위험할 수는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지방식’이 아니라 ‘저탄수화물식’이 중요하다고 해야 합니다. 탄수화물 중에도 ‘당분’, 즉 설탕이 문제입니다. 설탕이 몸 속에 들어가면 피 속에서 당분, 즉 혈당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항상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죠. 혈당이 올라가면 낮추려고 합니다. 이때 이용하는 것이 인슐린입니다. 인슐린은 혈액 속에 있는 당을 세포 내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혈당은 낮아지고, 대신 세포 속에는 당이 높아지겠지요? 세포 안에 들어간 포도당은 운동을 하면 소모되지만 당장 쓸 일이 없다면 지방으로 바뀌어 쌓입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콜레스테롤이나 지방은 콜레스테롤이 많은 음식이나 기름기 많은 음식을 먹어서 생긴 것보다 탄수화물을 먹어서 생긴 것이 훨씬 많습니다. 사실상 콜레스테롤 수치는 콜레스테롤을 얼마나 먹느냐와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문제는 탄수화물입니다.
그런데 탄수화물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탄수화물 중에는 빨리 흡수되는 것과 천천히 흡수되는 것이 있습니다. 빨리 흡수되는 탄수화물을 먹으면 혈당이 급격히 올라갑니다. 그러면 혈당을 낮추려고 인슐린이 대량 분비됩니다. 피 속에 있던 당이 순식간에 세포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급격히 높아졌던 혈당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혈당이 떨어지면 우리 몸은 배가 고프다고 느낍니다.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먹게 됩니다. 비만이 되는 거죠. (사실 이 과정에는 당분 자체와 렙틴, 그렐린, NPY란 호르몬들이 작용하지만 복잡하니까 그냥 당분을 가지고 이해해 두셔도 됩니다). 인슐린은 췌장에서 만들어지는데 이런 일이 장기간 반복되면 췌장이 인슐린을 하루에도 몇 번씩 대량으로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지칩니다. 췌장이 지쳐 인슐린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상태가 곧 당뇨병입니다.
그러면 빨리 흡수되는 탄수화물에 뭐가 있을까요? 설탕이 대표적입니다만, 사실 가공된 탄수화물은 설탕과 똑같다고 보면 됩니다. 알기 쉽게 ‘흰색’이 해롭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흰밥, 흰빵, 국수, 라면, 과자 등은 설탕과 똑같습니다. 약간 과장하자면 흰밥 한 그릇을 먹는 것은 설탕 한 그릇을 먹는 거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천천히 흡수되는 탄수화물을 먹으면 혈당도 천천히 올라갑니다. 인슐린이 대량 분비될 필요가 없습니다. 당이 천천히 세포 속으로 들어가면서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쓰는 데 사용되고 남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지방이 덜 만들어집니다. 혈당이 갑자기 떨어지지 않으므로 허기도 덜 느낍니다. 이렇게 ‘착한’ 탄수화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공되지 않은 곡류, 과일, 야채 등입니다. 이런 식품에 들어있는 탄수화물도 본질적으로 ‘흰색’ 탄수화물과 동일한 물질이지만 여기에는 섬유소가 듬뿍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미밥을 먹으면 겉을 둘러싼 섬유소 때문에 장에서 소화가 천천히 일어나므로 혈당도 천천히 올라가는 것입니다. 과일주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그냥 먹으면 사과 속에 있는 섬유소 때문에 몸에 좋지만 사과 주스를 마시면 혈당이 급격히 올라갑니다. 100% 주스도 마찬가집니다.
계속 ‘착한’ 탄수화물을 먹을 수 있다면 굳이 고지방 저탄수화물식처럼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나쁜’ 탄수화물에 둘러싸여 있다는 겁니다. 외식산업, 식품산업에서 설탕을 엄청나게 씁니다. 케잌, 과자, 빵만 문제가 아닙니다. 매콤한 양념 치킨을 조리하는 양념, 삼겹살에 얹어 먹는 쌈장, 오후의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시는 한 잔의 모카 속에도 설탕이 엄청나게 들어있습니다. 음식점에서 현미밥을 주문하거나 통밀 파스타를 주문하기도 쉽지 않죠. 요리 프로그램의 레시피에서도 설탕을 너무 많이 쓴다고 비판을 받지만 산업계에서는 결코 설탕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값싸게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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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밥을 먹고 간식은 과일과 야채로
TV 프로그램의 공이라면 지방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점을 알려준 것입니다. 아침을 빵이나 설탕이 잔뜩 든 요구르트 등으로 먹을 수 없다면, 차라리 버터로 달걀을 프라이하고 삼겹살을 먹는 게 손쉬울 겁니다. 하지만 고지방식을 하면서 점심은 식당에서 사먹고, 저녁은 먹던 대로 먹고, 야식으로 라면을 먹으면 살이 더 찝니다. 결국 어린이에게 고지방식을 제공하려면 외식도 안 되고, 슈퍼에서 산 과자 등을 줘서도 안 되고 항상 부모가 조리를 해줘야 합니다. 그런 정성이 있다면 차라리 착한 탄수화물로 식단을 짜주세요. 현미밥을 먹고 간식은 과일과 야채로 하는 겁니다. 과자와 외식은 금지하고요. 그러지 못한다면 고지방식은 체중이란 면에서도 재앙이 될 겁니다.
사실 요즘은 너무나 새로운 정보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부모들이 헛갈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의사인 저도 헛갈립니다. 저희 소아청소년과에서는 오래된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새로운 방법이 나오면 가장 먼저 쓰는 의사가 되지 말고, 가장 나중에 쓰는 의사도 되지 말라”는 거죠. 프로그램을 보면 고지방식이 환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성장과 발달을 하는 어린이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당장 살이 빠져도 나중에 머리가 나빠진다든지 하면 곤란하겠지요. 잘 모르면 그냥 하던 대로 하면 최소한 손해는 안 봅니다. 기억하세요.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영양 섭취란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에게는 음식의 맛과 색깔을 보고, 질감을 느끼고, 조리 과정에서 변하는 모습을 보고, 음식을 생산한 분들과 장만한 부모님의 노고를 느끼고, 식탁 예절을 지키고, 적당한 선에서 그만 먹는 절제를 배우는 과정이 모두 삶의 공부입니다. 지방에 편중된 식사가 영양학적으로 어떻든 총체적인 면에서 어린이에게 좋을 것은 없겠지요. 뭐든 다양해야 하고, 지나치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 회에는 소아 비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강병철(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대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2005년 영국 왕립소아과학회의 ‘베이직 스페셜리스트Basic Specialist’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 살고 있다. 도서출판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의 대표이기도 하다. 옮긴 책으로 《원전, 죽음의 유혹》《살인단백질 이야기》《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 등이 있다.
책사랑
2016.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