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문장(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나는 우리 사랑이 성공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헤어졌지마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요. (중략) 곁에 있다면 서로 보듬고 이야기하고 그런 재미도 있겄지만 떠오르기만 해도 괜히 웃음이 나오지는 않지 않겄서라우. 아, 곁에 있는디 뭐 하러 생각하고 보고 싶고 하겄소. 그러니 결혼해서 해로한 것만큼이나 우리 사랑도 성공한 것 아니겄소.
- 한창훈 『나는 여기가 좋다』 61쪽
1. 성공(成功)한 사랑
목적한 것을 이루었을 때 성공했다고 말한다.
목표한 몸무게로 감량하면 다이어트에 성공했다고 한다.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면 입시에 성공했다고 한다. 재력, 권력, 명예가 평균 이상이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이라고들 한다.
사랑에 관해서는 어떠할까? 우리는 무엇을 향해 성공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춘향이와 이도령은 성공한 사랑일까? 로미오와 쥴리엣은 성공하지 못한 사랑일까?
이것은 매우 애매한 물음이다. 사랑은 어떠한 도달점을 목표로 해서 정량적으로 계량화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법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라 해도 ‘ 성공한 사랑’ 이라는 말 자체가 용례적으로 어색하고 생경하다. ‘성공한’ 이라는 부사어가 사랑을 수식하면, 사랑이 가진 낭만성이 훼손당하는 기분도 든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완전한 사랑’ ‘ 이루어진 사랑’ 등으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성공한 사랑’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2. 몰래한 사랑
작년 늦여름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친한 성직자에게 전화가 왔다. 유럽 여행지에서 만난 이후 우리는 꽤 친하게 지냈다. 나이가 비슷했으므로 서로 스스럼없이 농담을 하기도 하고 삶의 고민거리를 같이 나누기도 했다. 칭얼거리는 쪽은 주로 나였고 , 들어주는 쪽은 대부분 저쪽이었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으면서도 휴일의 전화는 처음이었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예감했다. 역시나, 그분은 큰 일 났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고 했다.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벗어날 수가 없다고 했다.
언제나 자신이 성직자로 쓰여짐을 행복해 했고 종교적 규율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가 보이는 지금의 혼란애 더 공감했다.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 치뤄야 할 대가를 잘 알기에 마음은 더 복잡했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축하한다’는 것뿐 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 거나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라거나 하는 말은, 성인인 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나마 현실적인 조언이라고 한 것이, 사랑을 나눌 때 머무는 동네를 벗어나 꼭 KTX를 타고 멀리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소용없었다. 당장 보고 싶고, 잠시라도 손 한번 잡고 싶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지켜 온 종교인으로서의 금욕적 계율도 허물어버린 사람이, 언제 기차역을 달려가서, 언제 기차를 탄다는 말인가. 덕분에 그의 사랑은 그 동네에 다 알려졌고, 그는 성직자로서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때로 그 과정은 수모와 치욕과 고통이었음에도,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그 사람이 더 힘들까 봐, 그것만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침묵한 채 몸에 좋다는 도라지 즙이나 칡즙을 구해 택배로 부치는 일이었다.
3. 불륜의 사랑
인상적인 또 다른 사랑은 소설 속에서 만난다.
여수의 홍합공장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질펀한 남도의 이야기가 한 판 굿을 보는 느낌으로 펼쳐지는 한창훈의 『홍합』에서는 전라도의 끈적한 입담과 더불어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오물오물 찰떡을 씹는 맛으로 읽혀진다.
그 눙치고 살가운 인물의 서사 속에서도 단연 빛나는 장면은 도시에서 온 총각 문기사와 아이 있는 유부녀 석이네의 애절한 사랑이다. 속 썩이는 남편과 지긋지긋한 가난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면서도, 문기사를 향한 석이네의 마음은 이렇게 흘러간다.
"정말로 문기사와 데이트를 한다면 어떨까 싶어서 그녀는 불가에 쪼그리고 있지만 몸과 달리 마음이 멀리로 떠다녔다. 일에서 벗어나 극장 구경도 가고 제과점에 들어가 팥빙수도 사먹고 음악도 듣는다면, 한 삼 주, 아니 한 삼 일 그것도 아니, 한 세 시간만이라도 그와 단둘이서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듣기에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얼굴이나 한없이 들여다보고 손이나 한없이 만져 보고, 말이나 한없이 나눠 보고, 아, 한번쯤 뜨겁게 껴안아 봤으면 싶다. "(『홍합』 176쪽)
그러나 석이네는 이런 소박한 사랑조차 현실에 옮기지 못한다. 사랑이란 것이 알맹이는 쏙 빼먹고 빈 그릇에 수북이 쌓여지는 몰골 사나운 홍합처럼, 그렇게 남발되고 버려지는 세상임에도 석이네는 그저 마음으로만 문기사를 품는다.
『홍합』에서 석이네는 같은 작가의 소설집 『나는 여기가 좋다』의 ‘밤꽃’에서 술집 주모로 부활한다. 어느 눈 내리는 날, 선술집 주모가 화자를 대상으로 주절주절 늘어놓는 사랑의 이야기가 이 글의 전체를 채운다. 잠자리에서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주고, 무조건 당신이 좋아요로 시작되는 유행가를 불러주던 섬세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주모. 그러나 그 남자는 이미 가정이 있고, 그들은 시한부로 자신들 사랑의 유효기간을 정해버린다. 약속된 2년 반이 한참이 흐른 7년 후 어느 날, 남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주고, 그 남자도, 주모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자는 가슴 속 말을 꺼내지 않는다.
주모는 이렇게 말한다.
" 그 사람, 내가 사랑했던 사람. 나는 우리 사랑이 성공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헤어졌지마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요. 연애를 해봉께, 같이 사는 것이나 헤어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디다. 마음이 폭폭하다가도 그 사람을 생각하믄 너그러워지고 괜히 웃음이 싱끗싱끗 기어나온다 말이요.
곁에 있다면 서로 보듬고 이야기하고 그런 재미도 있겄지만 떠오르기만 해도 괜히 웃음이 나오지는 않지 않겄서라우. 아, 곁에 있는디 뭐 하러 생각하고 보고 싶고 하겄소. 그러니 결혼해서 해로한 것만큼이나 우리 사랑도 성공한 것 아니겄소."(『나는 여기가 좋다』, 61쪽)
4.성공한 사랑 판별법
누구나 다 자기만의 방식대로 사랑을 한다. 이만큼 까지 가기도 하고 저 만큼 까지 가기도 한다. 불꽃같이 타올라서 산화되기도 하고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처럼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상대방에게 사소한 풍경 정도로 자신의 사랑과 기다림을 지속하기도 한다. 독약을 먹고 죽음을 선택하는 연인이 있고 단지 첫 눈에 반했다는 이유로 혼수상태에 빠진 여인의 병상을 지극 적성으로 지키는 <그녀에게 Talk to Herm Hable con ella>와 같은 영화 속 사랑도 있다. 벼락같이 다가온 사랑을 위해 구도의 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성직자도 있고, 만지고 싶지만 만지지 않는 홍합공장 여자도 있으며, 살 부비고 사는 대신 그리움과 추억을 화분에 심어놓는 주모도 있다.
세상에는 불안한 사랑과 덜 불안한 사랑이 있을 수 있어도, 둘이 합의 하는 한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은 있을 수 없다. 합의의 지점에서 논란이 될 수 있었으나 역시 울림있는 영화. <그녀에게>
이제 처음에 던진 나의 애매한 질문에, 내가 스스로 답을 할 차례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성공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혼을 했던, 안 했던, 이혼을 했던, 이별을 했던, 사랑의 대상을 떠올릴 때, 자신이 아낌없이 다 줬다고 생각한다면, 그리하여 나는 참 착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랑이다. 나의 헌신, 나의 희생, 나의 양보, 나의 기다림, 나의 이타심, 이것만이 성공한 사랑을 만드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성공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가? 혹은 한 적이 있는가?
독후낙서(讀後落書)- 『홍합』, 『나는 여기가 좋다』
■ 책을 전혀 안 읽는데,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에게 추천했을 때 결과치가 가장 좋았던 소설. 특히 『나는 여기가 좋다』는 에피소드 중심이어서 짧은 글 선호하는 이에게는 완독의 뿌듯함까지.
■ 이문구의 향토소설을 읽는 듯한 구수한 홍합타임, 마지막 부분에 문기사가 운동권 학생의 고뇌 속에서 현장으로서의 여수 공장을 선택했음이 밝혀지면서, 『홍합』이 80년대 『고등어』로 변신하는 돌발감도 있었지만, 1998년 한겨레 문학상, 이게 고스톱 쳐서 딸리는 없을 터. 능히 상 받을 만한 수작.
■ 『나는 여기가 좋다』에서는 성석재의 입담까지 보이는구나
■ 섬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8편의 단편은 때로 이어지기도 하고, 어느 것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책을 다 읽고 나면 무척 배 타고 싶어진다. 마구 섬에 가고 싶어진다.
■ 삼도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빌 브라이슨도 울고 갈 최고의 기행문이다. 노인을 모시고 제주여행을 떠난 마을 청년회 늙은 회장의 2박3일 기간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이 여행기를 여행가던 비행기 안에서 읽었는데, 솔직히 여행 보다 이 여행기가 더 재미있었다.
■ 무엇보다 뻘 밭에서 막 잡아 온 세발낙지처럼 착착 감기는 이 한창훈 표 토속 문장들을 보라지.
● 그 시간이면 팔팔한 처녀가 염색약 사러 다니는 아줌마로 변하는 데 충분하다. 울컥 치솟는 열정 식혀 반듯하게 눕히고도 남을 시간이다. (11 쪽)
● 놀다 간게 정인가, 자고 가야 정이지(46쪽)
● 정이란 그런겁디다. 아무리 단속을 해도 모기장에 모기 들어오듯이, 세 벌 네 벌 진흙 처바른 벼락박에 물 새듯이 그렇게 생깁디다(49쪽)
● 사내란, 젊어서는 몸이 부드럽고 딱 한 군데만 단단하다가 나이 들고 나면 몸은 딱딱해지고 딱 한 군데만 부드러워진다고 하지 않던가요(223쪽)
● 헤어지면 보고 싶고 보고 나면 이 갈린다(225쪽)
● 말은 오줌 누는 것과 같아 시작은 그럭저럭 참을 수 있으나 한번 나오기 시작하면 도중에 끊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244쪽).
● 계집 팬 날 장모 온다더니(248쪽)
■ 끝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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