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이자 책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글을 읽는 행위를 즐기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의 상태를 되짚어보면서 정리하거나 복기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지금도 지식욕이나 재미를 위한 독서보다는, 진료 중 인간에 대한 느낌이나 제 생각을 정리하고 보완하고 싶은 욕구에서 책을 읽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주로 정신치료, 심리학, 인류학, 역사물, 문화예술 관련 서적 쪽이 취향인데, 독서 중에 인간에 대한 제 생각들이 재확인되거나, 내가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참신한 아이디어를 읽게 되면 상당한 쾌감을 얻게 됩니다. 자신 내면 속의 수많은 심상을 구체화시키는 데에는 남의 시선이 필수이듯이, 책도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의 의견이 있어야 자신의 의견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법이죠.
최근에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었습니다. 수많은 역사들을 논하지만 그의 인간에 대한 의견은 일관되어 있습니다. 최근 들어 가장 즐겁게 읽은 책입니다.
또 프로파일러로 활동했던 서종한의 『심리 부검』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평소 저는 직업적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주 만나지만, 자살한 사람은 만나질 못했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소중하게 읽힙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많은 수 있는 책입니다. 스웨덴의 환경과 한국의 차이도 분명해 보이고요. 하지만, 인간의 회복력과 자율성을 믿지 못하는 현재의 부모들과 전문가들의 강박적 태도에 대한 지적은 정당합니다.
명사의 추천
행복의 조건
조지 베일런트 저/이덕남 역/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정신과 의사에게 조지 베일런트라는 이름은 거대한 장기 전향적 연구의 대명사 같은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보던 인물이 자신의 연구의 최종 결과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죠. 어떤 사람은 그냥 가볍게 읽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굉장한 권위로 선언하는 듯이 읽게 되는 행복의 조건들입니다.
새로운 무의식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저/김명남 역 | 까치(까치글방)
프로이드가 자신의 이론은 이후 신경학적 연구에 의하여 완성될 것이라 얘기했었죠. 현대의 뇌과학의 발달은 정신 세계에 대한 많은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신경학적 이론들과 기존의 정신분석 이론들과의 통합을 시도하는 훌륭한 서적입니다.
유리가면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 | 대원
너무 유명한 만화라 따로 추천할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모든 미디어를 통틀어 사춘기 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책 이어서, 어느 정도는 정신과 의사를 선택하는 데에도 영향을 많이 미쳤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이라거나, 천재 혹은 재능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끔 영감을 주었던 만화입니다.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오기 오가스,사이 가담 공저/왕수민 역 | 웅진지식하우스
오기 오가스 사이 가담 - 남녀의 성욕의 차이가 수많은 갈등을 일으키지만 정작 그게 어떠한 것인지 제대로 설명한 책은 없었습니다. 간단한 아이디어에서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이면을 분명하게 드러낸 재미있는 책.
괴물의 심연
제임스 팰런 저/김미선 역 | 더퀘스트(길벗)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입니다. 의사로서 신경과학자가 fRMI, PET, EEG, 가족력, 대인관계를 분석하여 자신을 사이코패스의 뇌로 진단하는 이 책은, 단순히 흥미로운 주제뿐만 아니라 근 미래에 정신과학이 사람을 어떻게 분석하고 진단할지 미리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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