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표현이지만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인상은 그와 가진 관계의 시간 전체를 관통하는 첫 단추다. 나 역시 진료실에서 만나는 수많은 환자에게 공정하게 대한다 해도, 어딘지 모르게 '나와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인데, 나중에 돌이켜보면 초진을 보던 날에도 뭔가 삐걱거림을 느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확인할 수 없지만 그들도 분명 내게 좋은 인상을 받지는 않은 것 같다. 다시는 나의 진료실을 찾지 않았으니까.
다행히 한국에는 정신과의사가 수천 명이 된다. 그 덕분이라고 결론을 맺지만, 반성도 한다. 반면, 여러 이유로 지속적인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와는 첫인상의 오해를 푸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첫인상이 맞다'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갈수록 '첫인상, 첫 만남이 중요하다'는 믿음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나름 전문적 훈련을 받은 정신과의사도 첫인상이 오래가고, 한 번 생긴 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데, 보통 사람들은 더 심하지 않을까. 더욱이 나이가 들고, 사회경험이 많을수록 좋게 말해서 직관, 나쁘게 말해서 선입견은 강해진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쌓인 데이터베이스가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 적용되면서 "최대한 빨리 사람을 파악해서 분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위험하거나 앞으로도 계속 꼬일 문제만 던질 사람을 초장에 차단한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애꿎은 선입견이 사실은 좋은 사람을 미리 차단해버리는 실수가 될 수도 있다. 내게도 좋지 않은 일이지만 나 또한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나쁜 인상을 줄 행위는 특히나 첫 만남에서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행동을 조심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혹시 상대방에게 "별로야, 또 만나기 싫다"는 인상을 주고 있지는 않을까? 두려운 일이다. 일본의 만화가 마스다 미리는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에서 편집자를 처음 만날 때의 상황을 연작만화로 그리면서 우리에게 생생한 반면교사를 준다.
소소한 일상의 생각과 고민을 만화로 그려내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마스다 미리는 지방의 미대를 나와 회사에 다니다가 동경으로 와서, 무작정 일러스트레이션 삽화를 투고하고, 반응을 얻고 우연히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온 과정을 이 책에 담았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편집자와의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디테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관찰력이 뛰어나다.
상황 1.
편집자와 처음 만났다. 작가는 만화도 그리고 에세이도 쓰는데, 에세이는 읽어본 적 없다고 하면서 작가가 선물한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팔꿈치로 책을 괴고 얘기하는 것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작가는 편집자의 무신경함을 "하하하" 웃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상황 2.
편집자가 자기가 만든 책을 건넨다. 작가는 그걸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어서 기쁜 마음을 갖는데 편집자가 "그거 별로 재미있는 책도 아니고요, 안 읽으셔도 돼요"라고 말한다. 물론 겸손한 표현일 수 있지만 이에 대해서 작가는 '내 책도 이런 식으로 말하려나'하는 생각을 하며 겸손도 쉽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상황 3.
처음 만난 편집자가 "이 에세이 좋던데요. 다만, 뒷부분은 없는 게 낫겠어요. 에세이는 직접 쓰시나요? 대필작가를 쓰시나 했어요."라고 말한다. 직접 쓴다고 하자 "어휴.. 00 작가는 글이 엉망이에요"라고 대뜸 다른 작가 흠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같이 책을 내자고 제안한다.
타인에 대한 작은 무신경과 배려심 결여, 지나친 겸손으로 자신을 어필해야 할 자리에 하지 못하고 자칫 능력 결여로 보이는 것, 반대로 자신감 과잉으로 처음 만난 사람을 자기식으로 평가하고, 제 3자에 대한 험담이 일상화하는 것은 모두 나쁜 예다.
나도 위의 세 가지 유형과 유사한 편집자들을 만나보았다. 어떤 편집자는 처음 만나서 바로 내 책의 그동안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면서 아픈 상처를 헤집었다. (이미 나도 잘 알고 있는 내용들 부관참시인가!) 이런 식으로 저자의 기를 죽여 무장해제를 시킨 다음에, 비로소 가방에서 준비해온 기획안을 내밀면서 조목조목 설명을 했다. 그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바보천치임을 자인하는 프레임이 만들어지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런 편집자들일수록 다른 작가 뒷담화에 능한 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같아서 놀라웠다.
그렇다면,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상황 4. 처음 만난 편집자가 자기가 작업한 책을 선물하면서 "아주 좋은 책입니다. 특히 이 부분이랑 여기도 재미있습니다"라면서 책에 대한 애정을 분명히 한다. 다른 책 한 권도 주면서 "이건 별로 팔리지 않은 책이지만 저는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답니다"라고 말을 한다.
상황 5. 편집자와의 대화가 주제를 바꿔도 막히지 않고 술술 풀린다. 종종 깊은 교양을 엿보는 순간도 있고, 원고의 문제점을 말할 때도 "이 표현도 나쁘지 않지만 이런 표현이 더 와 닿을지 모르는데 어떠세요"라는 식으로 작가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러나 글의 큰 흐름과 작가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더 나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작가가 자책하면 그는 "생각나는 대로 일을 해나가시면 그 이외의 일은 제가 할 일이니까요."라고 얘기한다.
상황 4와 같이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이 비록 괴롭고 힘든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이 일을 좋아하고 애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자신의 능력치를 보여주고, 업계에 대한 이해도와 위치를 보여주는 것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기본은 '나는 이 일을 좋아합니다'라는 마음이다. 또 함께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 서로의 역할을 분명히 하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마스다 미리는 "서로 존경함으로써 사람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 "자신이 못하는 것을 인정하고 남이 잘하는 것을 존경하는 마음, 그런 단순함이 실은 같이 일을 하면서 중요한 게 아닐까"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첫 만남을 기선을 제압하는 자리로 여긴다.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해왔고, 네트워크가 대단한지 보여줘서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라는 도장을 찍고 이후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 있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마스다 미리가 얘기했듯이 오래 잘 지속되는 관계는 자신이 하는 일에 애착이 있음을 보이고, 자신이 못하는 것을 인정하고 남이 잘하는 것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상대를 대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누군가와 처음 만날 때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승리가 아니라 애정과 존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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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마스다 미리 글,그림/권남희 역 | 이봄
기본적으로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그녀가 작가로 일하면서 겪었던 상황들이 유머러스하게 묘사되어 있다. 출판사 편집자들과 만나는 에피소드도 많이 포함하고 있는데, 일본의 몇몇 출판사에서 이 책을 신입사원 연수에 사용한다고 할 만큼 그 내용이 구체적이며 솔직하다. 만화 곳곳에 배치된, 그녀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마스다 미리의 팬들이라면 가장 반가워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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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