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 주름잡던 대륙성 고기압세력이 쇠퇴한다. 뒤이어 이동성고기압과 기압골이 한반도를 주기적으로 통과한다. 극동에 자리한 한반도에는 한난(寒暖)이 반복되고 기온은 상승한다. 마침내 한낮 평균온도가 17도 사이를 넘나든다. 평균 습도는 50퍼센트까지 낮아진다. 이런 날이 계속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봄이구나!”
혹시나 싶으면 역시나였다. 10대라는, 다시는 불릴 일 없는 인칭대명사로 불리기 시작할 무렵, 나는 봄 바람에 마음이 살랑거리는 대신 열병을 앓았다. 사랑의 열병, 이런 게 아니라 40도에 육박하는 진짜 열병이었다. 그것도 매해 어김 없었다. 그러나 나의 첫사랑, 중학교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어도 학교에 와서 죽어.”
대책이 필요했다. 아버지께서 방법을 찾으셨다.
“편도선 수술을 하면 감기에 잘 안 걸린다던데….”
수술 상담을 한 의사가 결정타를 날렸다.
“그럼요, 아버지. 편도선만 떼어내면 됩니다.”
‘이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간단히 수술 날짜가 잡혔다. 이윽고 수술실에 들어섰다. 마스크를 쓰고 숫자를 셌다.
“하나, 두울, 세….”
소주 네 병 마시고 필름이 끊기듯 기억이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는 병실이었다. 목구멍이 아파서 말을 할 수 없었다. 물 마시는 것도 힘들었다. 가만히 누워서 눈만 뜨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구경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병실에는 긴 생머리 찰랑거리며 가슴 봉긋한 여학생이 없었다(당연히). 대신 입원한 지 꽤 된 교통사고 환자, 어떤 할머니와 할아버지 등 여섯 명이 한 병실을 썼다. 볼 거라고는 동전을 넣어야 나오는 작은 TV와 동생이 '꼭 필요할 것'이라며 잔뜩 빌려온 만화책 밖에 없었다.
수십 권의 만화책을 탐독하며 교양을 쌓았다. 무료함은 해결됐다. 문제는 배고픔. 목구멍은 생선가시라도 걸린 듯이 아팠다. 게다가 병원밥은 익히 들은 명성대로 맛 대가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굶을 수도 없었다. 나는 중학생, 털이 무성해지고 키가 무섭게 클 무렵, 호르몬은 밥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입원한지 사흘 째, 드디어 일반식이 허용 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생이 뭔가를 사왔다. 충무김밥이었다. 새빨간 섞박지와 오징어 초무침, 그리고 손가락만한 새끼 김밥이 있었다.
“목구멍 아프다고 했잖아! 어떻게 이런 매운 걸 어떻게 먹냐? 엉?”
“그래도 먹어 보라구!”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배는 고프고, 못 이긴 척 하나씩 억지로 먹었다. 하나는 힘들었다. 둘은…뭐 괜찮았다. 셋은 맛있었다. 먹기보다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그것 봐. 맛있지?”라고 다그치는 동생 앞에서 “먹을 만 하네. 그래도 아파”라고 딴청을 부렸다. 충무김밥이 처음은 아니었다. 부산에서는 김밥천국 야채김밥처럼 흔한 게 충무김밥이었다. 하다못해 편의점에서도 충무김밥을 팔았다. 내 돈 주고 사먹는 음식은 아니었다. 반전이었다.
나는 병실에서 첫 휴가 나온 이등병이 새삼 엄마 밥에 열광하듯, 충무김밥을 재발견했다. 성의 없다 싶을 정도로 심심한 김밥은 순결했다. 순결한 김밥을 더럽히는 매콤새콤한 섞박지는 강렬했다. 본분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해 쫀득거렸던 오징어초무침은 ‘제발 비법을 알려주세요’라고 빌고 싶을 만큼 절묘하게 맵고 고소했다. 집중해야 했다. 왜냐면 김밥과 섞박지, 오징어초무침 갯수를 맞춰가며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 입 크기가 아니라 넓다랗게 큰 섞박지가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중학생, 도형의 넓이와 삼각함수를 이용해 최적의 섞박지 표면적(X=한 입)을 계산해가며 충무김밥을 멋지게 먹 어치웠다. 동생에게 물었다.
“하나 더 없냐?”
그러나 충무김밥을 더 먹을 수는 없었다. 왜냐면 최적의 섞박지 표면적을 계산하느라 충무김밥에 쳐 박았던 고개를 수평선 너머로 뜨는 붉은 해 마냥 찬찬히 들어올렸을 때, 병실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휴, 맛있게 묵네. 저렇게 냄새 나는 걸 가져오면 어떡하노.”
수술을 마치고 회복식만 먹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뒤이어지는 말.
“내는 묵고 싶어도 못 묵는데..."
나 평생 그렇게 강렬한 시선은 처음이었다. 다들 물끄러미, 부러움과 원망 섞인 눈빛이었다.
그때, 내가 부러움을 살 정도로 맛있게 먹던 충무김밥의 유래는 길지 않다. 아낙들이 어부 남편 먹기 편하라고 속 없는 작은 김밥에 쉬이 상하지 않는 새큼한 반찬을 따로 낸 것이 충무 김밥의 시작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정론인 양 퍼져 있지만 사실 관계와 증언을 살펴보면 글쎄다. 실제 통영의 여객터미널 부근 충무 김밥을 50년 째 팔고 있다는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충무 김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나서다. 우선 그 가난하던 시절에 흰 쌀밥을 도시락으로 싸갔다는 것이 말이 안 되거니와 그 김밥이란 음식 자체가 일본 유래다. 그러나 충무 김밥이 이 유구한 한반도의 ‘토종’ 것이 아니라고 분노하지 말자. 엄연히 곁들이는 섞박지와 오징어 무침은 우리네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보다 지금 어떻게 발전시키고 즐기고 있느냐가 아닐까?
김밥이란 음식은 그런 면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충무’라는 접두사가 붙지는 않지만 서양에서도 김밥은 흔하다. 이름은 서양식으로 ’롤(Roll)’, 길이는 충무김밥처럼 엄지 손가락 크기, 속으로는 참치나 연어, 아보카도, 새우가 보통이다. 먹기 편하고(작으니까) 맛있고, 게다가 건강식이라는 평판 덕분에 아시안인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도 잘들 사먹는다. 먹는 방법은 편하다 못해 없어 보이기까지 하다. 길거리 벤치에 앉아서 먹거나, 이도 아니면 길을 걸으면서 룰을 입 안에 욱여 넣는다. 물고기 모양 튜브에 넣어주는 간장을 쪽쪽 빨며 말이다.
나도 꽤 자주 먹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이틀에 한 번 꼴, 자정 근처 늦은 밤, 주방에서 일을 마친 다음이었다. 주방에서 일하면 많이 먹을 것 같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남 밥 해주느라 바빠서 나는 밥 먹을 시간이 없다. 쫄쫄 굶는 게 다반사다. 배는 고프고 당은 떨어지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아닌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먹을 것을 찾다 보면 주유소 옆에 딸린 편의점에 있는 나를 발견하기 일쑤. 김유신의 백마도 아니고 또 여기라니, 절망감은 잠깐, 손에 든 것은 캔 참치를 마요네즈에 버무려 넣은 ‘참치롤’. 포장지를 뜯고, 롤에 튜브 간장을 뿌려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길을 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 또 쓰레기를 입에 넣는구나.’ 공장표 ‘참치롤’을 팔던 편의점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인도인이나 중국인 종업원이 밤새 서 있었다.
이제 이국이 아닌 한반도, ‘롤’이 아니라 충무김밥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열차에 몸을 싣는다. 2시간 남짓 달려 부산에 가면 나를 반기는 것은 예전 어릴 때 숨쉬던 바닷내 나는 짠 공기, 그 공기를 들이 마시며 국제 시장에 가면 몇 십 년 동안 충무 김밥을 팔던 아지매들이 있다. 아무리 춥고 날이 험해도 꼬박 꼬박 은색 양재기에 가득 김밥을 쌓아두고 손님을 맞는 그녀들 앞에 나는 오래전 까까머리 꼬마처럼 쭈그려 앉아 어묵 국물을 마시며 이쑤시개로 충무김밥을 콕콕 찍어 먹는다. 그러면 병실에 만화책을 들고 오던 동생과 나를 부럽게 쳐다보던 다른 환자들, 그리고 이국의 밤에 혼자 김밥을 씹던,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괜히 목이 메인다.
정동현(셰프)
<셰프의 빨간 노트>의 저자. 신세계그룹 F&B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 핫한 먹거리를 찾아다니면서 혀를 단련 중이다. <조선일보> 주말 매거진과 페이스북을 통해 새로운 맛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감귤
2015.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