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를 꿈꾸는 소년
시인 권혁웅을 본 적이 있거나 알고 있는 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믿지만, 그는 맑고 반듯한 모범생의 이미지와 장난기와 호기심 많은 악동의 이미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시인이 되기에 앞서, 꾸준함과 탐구심, 그리고 지적 열정과 반항심 등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비평 작업을 먼저 선행했다는 사실은, 그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과 그의 욕망이 보기 좋게 일치하는 것을 드러내주는 실례일 것이다.
그는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오규원을 다룬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공식적으로 문학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단에는 이듬해 <문예중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데뷔했다. 그의 비평적 작업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의 압도적인 독서량과 섬세한 감식안을 바탕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인상적으로 분화하는 우리 시단의 풍경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읽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다음 2000년대 비평 현장을 돌아볼 때, 권혁웅이라는 이름을 지우면 시비평의 목록은 말할 수 없이 빈약하고 왜소해질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시업도 활발해서, 2001년 첫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를 시작으로 시집을 묶어내기 시작해 지금까지 다섯 권의 개인시집을 상재했다. 그의 열정은 이것에 그치지 않고 전공분야의 연구서와 신화를 다룬 인문서, 자연과학이나 영화 등을 아우르는 독특한 관점이 반영된 산문집 등으로 자신의 저술 목록을 확장시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의 지적 관심의 영역을 한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일이다. 그런데, 그가 글쓰기를 ‘전업’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앞에 이르면 그의 저술 작업이 보여준 성취는 불가사의한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는 현재 한 대학의 문창과에 적을 두고 13년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말하자면 그것이 그의 생업인 셈이다. 직장이 요구하는 행정과 사무, 강의, 연구를 수행하면서, 시를 쓰고 비평하고 주제에 의한 산문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특별한 성실함과 열정,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재능이 지금의 권혁웅이라는 매력적인 브랜드를 만든 것일 테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인상적인 ‘입지전’이라고 생각한다. 유력한 시인, 비평가, 대학교수라는 그의 현세적 지위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그는 서울 변두리 산동네 골목길의 ‘사철 발벗은’ 소년이었다.
그의 약력을 보면 “충북 충주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랐다”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어떤 진중한 의미를 생각할 때 이 한 줄은 턱없이 불친절하고 조악하다. 그가 서울에서 자랐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번지 앞에 ‘산’이 붙는 서울의 산동네에서 자랐다는 것은 영민한 한 시인의 심층에 매우 선명하고 복잡한 무늬를 새겼으니 말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지워지지 않는 한 장의 음화 같은 것이다. 그는 평생 노동을 해온 ‘천사 같은’ 어머니와 성정은 선하고 곧으나 주사가 있던 아버지, 그리고 누나와 형, 할머니 등과 함께, 결코 넉넉하다고 할 수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 술만 마시면 성정이 돌변했던 아버지 때문에 일이 년에 한번은 이사를 다녀야 했던 (그것도 윗골목과 아랫골목을 전전하는 것이지만) 그곳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탈출기’를 꿈꿨는데, 그것은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신만의 방을 갖길 원했던 조숙하고 영민한 소년이 최초로 가져본 욕망이었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그는 또래 집단으로부터 곧잘 자신을 유배 보냈는데, 그가 주로 하는 일은 골방에서 책을 보는 것이었다. 다이제스트판 『일리아드』와 『삼국지』의 장중하고 환상적인 텍스트에 일찍이 심취했던 것. 책을 덮고 골방을 나오면 도시 서민들의 속세가 펼쳐졌다. 그는 그것에 몸과 마음을 붙들렸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에게 서정은 산과 강변 같은 것이 아닌, 도시의 가난한 골목에서 볼 수 있는 세속의 지표들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멘트 담과 축대, 높낮이 심한 계단과 벌레가 자주 나왔던 작은 방들이 그의 심상에 깊은 음영을 드리우고 감수성의 원형이 되었다는 것. 이제 그는 그곳을 떠나왔다. 탈출기를 쓰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탈출은 그 시절에 대한 부정이나 부인이 아니라 그곳을 있는 그대로 다시 볼 수 있는 거리를 갖는 것이리라. 내 짐작이 맞는지 그에게 물었다.
김도언 : 유년체험에 대한 각별한 심리적 태도가 있으신 것 같아요. 탈출기라는 인상적인 표현을 쓰기도 하셨는데, 선생님 시를 읽다 보면 특히 「마징가 계보학」과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를 보면 세속이라는 개념을 만나게 되거든요. 선생님은 자신의 시가 세속이 스스로 들려지는 지극한 지경이길 바란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저는 그것이 세속이 가지고 있는 남루함이나 비루함 같은 걸 거르는, 마치 흙탕물이 모래알을 통과해서 깨끗하게 걸러지는 것처럼 정화하는 걸 의미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권혁웅 : 유년기의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건 맞아요. 형과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고, 동네는 시끄럽고, 아버지는 매일 술을 드시고. 그런 상황에서 혼자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빨리 벗어나고 싶었죠. 하지만, 그게 극복이나 부정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지금 남루하고 비루한 것 자체가 성스럽다고 보거든요. 씻어내거나 부정하고 잘라내는 것이 아니고요. 잘라내면, 몸이 사라지니까. 그러니까 세속이 세속 그 자체로 성스러운 거죠. 이를테면 우리 삶에는 권력과 지배하는 이들이 대상으로 삼는 질료로서의 민중이 있어요. 권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민중이 필요하죠. 그 반대가 아니라. 그러니 그 몸으로서의 세속은 항구적인 것이에요.
물론 수탈당하는 걸 깨닫지 못하면서 여전히 지배자들에게 지지를 보내는 어르신들도 있죠. 하지만 그분들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에요. 모든 것들을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걸 인위적으로 잘라내면서 교화하거나 계몽하거나 냉소하는 건 제가 생각할 때 삶의 대한 사랑의 태도가 아니에요. 저는 그런 것들마저 잘라내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되 그 삶 속에서 얻어지는 근원적인 느낌들을 이야기할 때 우리 삶에서 중요한 사랑이나 좋은 가치가 실현된다고 생각해요.
김도언 : 선생님은 골목에 놓여있는 것들, 서민적인 풍경들이 서정의 바탕이라고 하셨는데요. 그걸 통해서 보건대 선생님한테는 민중지향적인 정서 같은 것이 있는 것도 같아요. 가난한 것들에 대한 동경과 향수 같은 것일까요?
권혁웅 : 네, 민중까지는 거창하고, 서민들,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에 제 삶이 속해 있었기 때문에 원래 있는 본성 같은 거죠. 감성의 바탕이 되는 본성. 그때는 너무 지겹고 힘들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거기에 내 첫사랑도 있었고, 철이 들면서 느낀 여러 감정이 있으니까 그걸 그냥 인정하자는 생각이죠. 시를 쓰겠다고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을 보면, 다 저처럼 뭔가 아픈 체험들이 있고, 아무래도 그게 문학을 만드는 욕망이 되잖아요. 저는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너희들이 그걸 잘 들여다보고 인정해라. 도망가거나 그러면 안 된다. 이런 말을 많이 해요. 저희 누나는 저랑 여덟 살 차이인데, 제가 고등학교 때 누나는 벌써 이십대 후반이었는데, 그때가 기억이 안 난대요. 누나 입장에서는 글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 아팠던 기억들을 다 잊어버린 거죠.
다양한 글쓰기의 기원
상처와 고통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인정하는 것, 달아나거나 부인하지 않는 것, 그것이 글을 쓰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라면, 권혁웅은 그 좋은 태도를 부단히 경계하고 견지함으로써 지금의 단단하고 견고한 저력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권혁웅이 보여주고 있는 시인으로서의 다양한 보법은, 그가 사는 동안 부딪쳤던 수많은 문제에 반응하고 또 응전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학습되고 체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다양한 형태의 모험과 실험을 감행하게 하면서 그만의 고유한 문학적 개성과 목소리를 낳게 한 것이리라. 개인적으로 나는 권혁웅이 매우 희유한 개성을 가진 시인이라고 확신하는데, 그것은 다른 시인들의 여일한 인상이나 초상과 비교할 때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대부분의 시인들은 규정이 가능한 것을 허락한다. 가시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개성을 노출하면서 어떤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심지어는 스스로 자기규정을 하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시인들에게서 관찰되는 스타일은 평면적이고 단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십 년째 키워드 하나에 갇힌 시인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권혁웅은 규정이 되지 않는, 규정을 거부하는 시인으로 보인다. 그의 다층적인 포지션과 다성적인 목소리는 어느 한 방향으로 유형화하거나 계열화하는 걸 방해한다. 그가 거느린 세계에는 유물론자로서의 직관도 있고 낭만주의자의 감상도 있으며 현실주의자의 효율성과 리얼리스트로서의 현실비판도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 「봄밤」은 이를테면 낭만의 리얼리티, 리얼리티의 낭만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그가 한겨레에 정기적으로 쓰는 글은 또 얼마나 시의적이고 현실 비판적인가. 다양한 글쓰기에 투사되는 그의 욕망이 궁금했다.
김도언 : 1997년도에 시인으로 등단하시고, 문학연구자로서 연구서도 내시고, 평론집도 내시고, 최근에는 산문쓰기에 상당히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우리 문학판 안에서 이렇게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이 흔한 사례는 아닌 것 같아요. 다양한 글쓰기를 하시게 된 자연적인 계기랄까요 그걸 들어보고 싶습니다.
권혁웅 : 저는 어렸을 때부터 늘 꿈이 시인이었어요. 그런데 우연치 않게 등단은 평론으로 먼저 했죠. 시인이 되고서는 시와 평론을 병행했는데, 청탁은 평론 쪽이 더 오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평론의 한계에 부딪혔어요. 어느 순간부터 재미가 없어지더라고요.
아시겠지만 글쓰기 유형이나 범위, 구사하는 문체 같은 데서 제약이 많아요. 논문이나 평론은 한계가 분명한 글쓰기니까. 그 벽에 부딪히고 나니까 조금 자유롭게 쓰고 싶어졌죠. 어차피 내 안에서 글로 나와야 할 무엇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말의 질서를 통해서 표출되어야 할 어떤 것인데요, 그걸 에너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고. 그러니까 시나 평론, 논문으로는 안 나오던 게 있었던 거죠. 제가 그 형식을 계속 찾았거든요. 편하게 말할 수 있는 형식이 뭐가 있을까 하면서. 그러면서 다양한 형태의 글을 쓰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사실 기웃거리길 잘하는데, 기웃대다보니까 이쪽 분야와 저쪽 분야가 만날 때, 특별한 아이디어가 많이 생기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서 동물 얘기가 정치와 만나거나, 신화가 철학과 만나면 굉장히 엉뚱한 생각이 튀어나와요. 그게 재미있었어요. 문학 이외의 글들을 읽다보면 글들이 뒤섞여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죠.
김도언 : 그렇게 다양한 방식의 글을 계속 쓰시려면 그만큼 시간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할 텐데, 학교에서 강의를 하시잖아요. 평소에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하세요? 일상이 어떤 것들로 채워지는지 궁금합니다. 마치 칸트처럼 1분 1초를 정확하게 쓰실 것 같기도 하고.
권혁웅 : 그런 건 아니고요. 술도 좋아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 마셔요. 친한 사람들과 술 마시면서 얘기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지금은 꼬맹이가 있어서 그런 처지가 아니지만, 그 전에는 강의하는 시간 외에는 사실 저한테 다 주어진 시간이었어요. 글과 무관한 일을 안 하는 건 필요해요. 제 경우에는 학교에서 보직 같은 거, 안 맡았죠. 저는 제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즐겁거든요. 예전부터 문학이 아닌 잡다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어요. 재미있게 읽는 건 다 놀이니까. 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고 관심 가는 게 있으면 혼자 앉아서 그것에 푹 빠져서 하는 편이에요.
김도언 : 저는 선생님의 문학적 개성이 규정되지 않는 것,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는 어떤 태도 속에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시인들은 가시적으로 캐릭터가 보이는데, 선생님은 매우 복합적이고 혼종적인.
권혁웅 : 좋은 말이 아닌 것 같은데(웃음)
김도언 : 제가 볼 때, 지금 시단에서 그런 다자적인 풍경을 자기 시 속에 녹여내는 시인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그걸 긍정적으로 보고 있거든요. 시인이 어느 좌표에 갇혀 있지 않고, 어떤 계보학으로도 잘 안 잡히는 매우 독특한 포지션이라는 거죠.
권혁웅 : 시를 쓸 때마다 한 가지 의식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방금 말씀하신 것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똑같은 시집은 안 내겠다. 이런 걸 오랫동안 의식했어요. 같은 이야기를 또 할 필요는 없다고. 그건 의미 없는 작업이니 매번 시적 관심을 갱신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엔 그것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시에서 지향하는 건, 그게 『마징가 계보학』에서 시도한 방법인 것도 같은데, 웃음과 슬픔이에요. 감동에는 그 두 가지가 다 원천이잖아요? 이걸 동시에 발생시킬 수는 없을까, 생각했죠. 누구는 제 시를 읽고 웃고 또 다른 누구는 슬픔을 체험했으면 좋겠다는 것. 둘이 만나면, 웃어도 시원하게 안 웃고 쓸쓸하게 웃고, 슬퍼도 카타르시스 같은 센 정념이 아니라 실소를 하는 것 같은 거요. 저한테 주어진 삶과 이것이 맞는 것 같아요.
세 번째 시집(『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에 묶인 연애시들은 그 나이에 맞는 이야기였던 거 같고, 『소문들』은 MB 정부 때 그 시대가 너무 끔찍해서 패러디 형식에 관심을 가졌던 것인데, 요즘 세상이 끔찍해져서 다시 그런 시를 쓰고 있어요. 다음 시집은 좀 더 풍자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김도언 : 선생님의 글을 보면, 시든 산문이든, 다른 형식이든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획이나 콘셉트 개념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죠. 사실 시인이 어떤 글을 의도를 갖고 쓴다는 것에 저항감을 가진 분들도 있잖아요. 시는 받아 적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런 것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세요?
권혁웅 : 제가 주제나 성격이 독특한 책을 몇 권 내긴 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분명하게 주제나 성격을 정했던 건 아니에요. 신화에 대해 쓴 책도 그런 것인데, 제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읽다보니까 명확하게 신화로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발전시켜 글을 쓰게 됐죠. 전문가가 아니다보니까 연구서가 아니라 에세이 형식을 가지게 됐고요. 『감성사전』이라고, 몸과 사물, 동물에 대한 글을 모은 책들도 있는데요. 첫 권을 2008년에 냈는데, 이때 시도해보았던 스타일이 제 마음에 꽤 들더라고요. 그래서 두 권 더 썼죠. 그런데 세 권째 썼더니 다시 지겹더라고요. 스타일의 자기복제도 복제는 복제니까. 그래서 네 권째는 다른 형식의 감성사전을 준비 중이에요.
자기 세대를 정확히 읽어낸다는 것
남다른 성실함과 열정, 그리고 재능을 끝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데 쓸 줄 아는 시인 권혁웅은 누가 뭐라 해도 현재 한국 시단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시인 중 한 명이다. 그는 2000년대 시단에 일대 화제를 일으킨 컬렉션 ‘문예중앙 시인선’을 주도한 기획자인 동시에 유력한 편집위원이었고(그는 여러 시전문지의 편집위원을 거쳐 지금은 월간 <현대시학>의 편집위원으로 있다.) 현재도 다양하고 유효한 발언을 통해 시의 현장을 자극하고 환기시키는 한국시단의 중요한 자원이다.
비평가로 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가 황병승, 김경주, 이민하 등 또래 시인들에게 ‘미래파’라는 매우 치명적인 레토릭을 선사한 것이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벽두에 등장한 일군의 개성적인 젊은 시인들을 미래파로 규정하고 그들의 시적 개성과 시사적 의의를 노골적으로 상찬했던 것. 이에 대한 시인과 평론가들의 반박과 재반박이 이어졌고, 시단에 오랜만에 활기 있는 생산적 논쟁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그에 의해 미래파로 묶인 시인들은 (그의 예지를 저버리지 않고) 성큼 성장해 현재 우리 시단의 중심을 장악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중요하고 특별했던 ‘문학적 사건’에 대해, 그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김도언 : 선생님은 소위 말하는 ‘미래파 논쟁’의 단초를 제공하셨고, 미래파로 묶여 있는 시인들은 지금 문단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 그렇게 일군의 젊은 시인들, 자기만의 문법을 가지고 있는 젊은 시인들을 미래파라고 묶어서 소개할 만한 당위가 있었나요? 어느덧 10년 전쯤의 일이네요.
권혁웅 : 네 있었죠. 제가 1997년에 등단을 해서 어느 정도 문단에 동료와 친구들이 생겼을 때, 비평가로서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쓰는데, 제 시는 빼고서도, 이 시들 꽤 괜찮은데, 왜 여전히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죠. 항상 윗세대 분들은 아랫세대 시인들에게 비판적이잖아요. 제가 보기엔 텍스트를 제대로 못 읽는 거였는데요. 이미 감수성이 달라졌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감수성으로 우리의 감수성을 재단하려고 했던 거죠. 그때는 이미 우리들도 스펙트럼이 넓어서 같은 방식으로 얘기될 수 없을 만큼 뿔뿔이 뻗어 있었거든요. 김행숙, 이장욱, 진은영 뿐만 아니라 이영광, 유종인, 손택수 등도 저희 세대거든요. 그런데 우리끼리는 잘 통하고 서로 다 읽거든요. 그런데 비평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읽으려고 하지 않아요. 게다가 그분들이 주요 시집 시리즈에서 출간을 결정하는 분들이니까, 답답했죠. 김경주, 황병승, 유형진, 안현미, 조연호, 이런 좋은 시인들이 시집 원고 출판을 거절당한 경험이 있어요. 그래서 그 시절에 시집을 내면서 세게 광고한 거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들에겐 자기고민이 있고, 그걸 말하는 새로운 감각이 있다’였어요. 그 말이 논쟁으로 번져서 진영이나 세대 간의 싸움처럼 돼버렸죠. 제 의도와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저는 지금도 제 말을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반대 진영에 있던 사람들은 지금 어르신 몇 분 빼고는 거의 다 사라졌잖아요. 이들 시인이 다음 세상에는 표준 텍스트로 인정받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죠.
김도언 : 선생님께서 방금 ‘표준텍스트’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때 미래파라고 이야기했던 시인들이 10년이 지나서, 거의 표준이 되어서 지금 시를 배우는 친구들도 그걸 텍스트로 보고 공부하고 있다는 건데요. 그럼 2000년대 초반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 시인들의 작업이, 우리 시사에서 어떤 분명한 터닝 포인트랄까, 그런 게 될 수 있을까요? 제가 왜 이런 질문을 드리냐면, 약간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얼마 전에 뵈었던 이문재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7,80년대 이후에 시가 새롭게 쓰여진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이 선생님은 우리 시가 폭발했던 게 두 번인데, 3,40년대랑 7,80년대이고, 이성복, 황지우 이후에는 없었다는 거죠. 이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권혁웅 :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제가 이성복 세대인데, 이성복 세대는 김수영 세대한테 빚을 졌어요. 실제 김수영 시 읽어보면, 거기에 이성복, 최승자, 황지우, 김혜순 다 있어요. 그 세계가 만개한 게 7,80년대 세대라고 생각해요. 정치적 상황과도 맞물려서요. 그리고서 다시 터진 게 90년대 넘어가면서 기형도거든요. 이성복의 마지막 후계자인 셈이죠. 그 다음은 이제 우리 세대가 되는 건데. 우리도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이성복 세대라고 이성복 시처럼 써서는 안 되잖아요. 이성복 시인이 이미 다 썼는데. 그래서 다르게 쓰는 방법을 모색했던 거죠.
그런 얘기를 오래 했던 친구들이 같은 학교 다녔던 이장욱, 김행숙 같은 시인들이었고요. 우리 세대의 가능성을 더 강렬하게 실현한 시인들이 황병승이나 김경주 같은 시인들이겠죠. 그리고 지금 시를 공부하는 친구들은 이를테면 황병승, 김행숙 세대가 되는 거죠. 제가 미래파 얘길 한 건, 제 세대의 감수성이 그걸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제 자신이 속한 세대니까. 그런데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제가 제 윗세대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르치려드는 비평밖에 할 수 없을 거예요. 꼰대가 되는 거죠. 저는 그 감수성의 밖에 있으니까요. 지금 2015년에도 지금 세대가 시를 이렇게 쓰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대의 사람이 필요해요. 다른 세대에게 자기 세대의 시가 이렇다고 말하는 사람이요.
시인, 문학교육과 권력을 말하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미래파에 대한 그의 옹호는, 같은 세대 감싸기나 또래에 대한 사랑고백이 아니고 자신의 비평적 소임을 이해하는 자로서, 그리고 자기세대의 감수성과 그들만의 세계를 정밀하게 읽어낸 시인으로서,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했던 것뿐인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시사(詩史)가 오랫동안 기억해야 할 모험이리라. 그리고 그 모험은 계속 계승되어야 하리라.
권혁웅은 지금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친다. 그게 그의 업(業)이다. 그런데, 문학과 시를 가르친다는 것은, 종종 오해를 양산한다. 문학이란 것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많다. 두어 달 전 소설가 황석영 선생이 ‘한국문학을 망친 건 대학의 문예창작과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던 적이 있다. 술자리 객담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은 공식 강연장에서 행해진 말이었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문창과 출신의 수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문단 원로의 말에 발끈했다. 거의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현직 문예창작과 교수로서 권혁웅 역시 매우 적극적인 반론을 폈다. 반박의 요지는 "참 쉬운 결론이다. … 문창과 아이들을 영혼 없는 기술자로 보는 거 아닌가. … 그들이 취업도 포기하고 돈도 포기하고 이곳을 지원하는 건 보이지 않나 … 애들이 한 번 글 쓰려면 하얗게 날밤 새운다. 그 퀭하지만 맑은 눈을 저렇게 모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에게 이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김도언 : 선생님, 지금 대학에서 학생들한테 시를 가르치고 계시고, 또 선생님도 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셨는데, 문학이라는 게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황석영 선생의 말에 대한 반박도 있으셨는데, 이와 관련된 생각들을 솔직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권혁웅 : 문학교육이라는 게, 저는 정확하게 말하면 ‘만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글을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무한하게 품고 있는 어떤 영혼을 만나는 거죠. 저도 학생들에게서 많이 배워요. 제일 많이 배우는 순간은 최초에 글을 쓰게 만든 그 사람의 자리를 상상할 때죠. 저 이는 왜 글을 쓰려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지? 그 답을 들을 때에는 숙연해져요. 제가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잘하고 있다는 격려, 그리고 이 길이 잘못될 때, 겉멋이 들거나 기술에 빠지거나 할 때, 그 최초의 믿음을 상기시켜 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자꾸 문학을 기술로 생각해서 문창과가 기술 가르치는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건 문창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에요. 글 쓰는 분들은 아마 대부분 저랑 같은 생각일 거예요. 글을 써서 성공을 하겠다, 이런 세속적인 욕망이 있으면 여기에 못 있죠. 시나 소설을 쓰는 건 가난을 자초하는 일인데. 문창과에 들어오는 친구들은 글을 안 쓰면 죽을 애들이에요. 힘든 삶을 문학에서 위로를 받고 구원을 받아서 견디는 애들인데, 내가 만난 학생들은 거의 다 그런 경우에요. 그런 아이들에게는 문창과가 단순히 직업훈련소나 소개소가 아니라는 거죠. 저는 아이들에게 삶과 사회, 역사를 정확하고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철학에서 과학까지 폭넓은 시야를 확보해주려고 애쓰죠. 시 잘 쓰는 기술이 어디 있겠어요? 저부터 배우면 좋겠네요. 그런데 기술을 가르친다고 하니까 좀 황당했죠.
김도언 : 황석영 선생 발언도, 당신 세대의 어떤 상실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생각에서 나온 것 같은데요. 좀 고약한 질문인데, 문학을 둘러싼 권력과 관련해서 선생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선생님이 꾸준히 시단 주류에서 활동했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비판의 대상이 되시는 거죠. 주류 제도권 안에서 쭉 활동해오시면서 느낀 바깥에서의 비판이나 이런 것에 대한 나름의 대응이랄까 해명이 궁금해요.
권혁웅 : 개인적인 답변부터 드리면, 저는 진짜 먹고 사는 데 허덕여요. 우리 집이 원래도 가난했는데, 형이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낸 바람에, 나이 마흔이 넘어서 정말로 0원에서 시작했어요. 미친 듯이 일을 했어요. 그런데 문학 바깥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편집위원도 하고, 원고료 있는 청탁은 다 받고, 특강도 많이 다녔어요. 지금도 세 살고 있고 빚이 많아요. 이 사소한 답변을 이어붙이면 바깥에서는 저를 주류로 보는 것 같은데, 사실 제가 문단에 영향력을 미치거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위치는 전혀 아니에요. 문단권력과 관련되는 얘기지만, 문학의 허약성을 낳은 제도적인 약점은 편중된 인적구성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편집위원은 거의 다 서울대 출신, 조금 넓혀봐야 연고대 출신입니다.
또 하나는 20년 정도 된 현상인데, 거의 다 국문과 출신이에요. 이렇게 편중되면 시야가 아주 좁아져요. 예전에도 서울대 중심은 여전했지만, 출신과의 경우에는 편집자들이 불문과, 중문과, 독문과, 영문과 이랬잖아요. 지금은 다 국문과에, 몇몇 학교 출신이에요. 그러니까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 거죠. 그러니 생각도 비슷하고, 참고하는 텍스트도 비슷하고, 문체도 비슷하고, 안목도 비슷해져요. 저도 고대에 국문과 출신이니까,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죠. 이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모든 문학권력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해요. 문학권력은, 잘못 행사되는 권력과 잘 행사되는 권력이 거의 붙어 있어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어떤 문화예술 분야든 그 분야의 생태계 내에서는 문학성 혹은 예술성에 따라서 어떤 힘의 중심이 생겨요. 중요한 잡지나 문학상, 단체가 생겨나죠. 외국도 마찬가지죠. 창작자들이 그런 곳과 관계를 맺으려고 줄서는 것도 당연한 것이죠. 그게 잘못 행사되는 것은 문제지만, 그런 힘의 유무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는 거죠.
더구나 그런 생태계 바깥은 자비출판으로 먹고사는 복마전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문학권력이라고 비판받는 사람들은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을 거예요. 생태계의 질서로서 자연스럽게 행사되고 있는 힘을 권력이라고 비판하는 셈이니까요. 저는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에도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독자와 수요자를 설득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해보는 거죠. 최근 문학실험실이나 악스트, 너머 같은 잡지들이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고무적이에요.
‘시인공화국’이라는 말이 있다. 박두진 선생이 1957년 발표한 당신의 136행짜리 시에 붙인 제목이다. 이때부터 시인공화국이라는 말은 시인들의 세계를 비유하는 매력적인 조어가 됐다. 바야흐로 지금 우리나라는 시인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시인 숫자가 3만 명을 헤아린다는 통계도 있거니와 수많은 이들이 시를 쓰고 읽는다. 곳곳에서 시를 가르치고, 배우고 새로운 시인들이 탄생한다. 시집이 출간되고, 시낭송회가 열린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독특한 질서와 풍습이 생기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과 제도가 고안된다. 시인이라면 무엇보다 열심히 시를 써야 하겠지만, 누군가는 이 시스템과 제도를 정비하고 유지시켜야 한다. 생태계란 누군가의 의도적인 열정과 헌신이 있을 때 보존되는 것일 테니까. 삼선동의 가난한 골목집 골방에 자신을 유배시킨 채 책을 읽은, 일찍이 시인을 꿈꿨던 한 소년은 시끄럽고 복잡한 골목의 생태계가 아닌, 젖과 꿀이 흐르는 평화로운 생태계를 몽상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수많은 텍스트가 펼쳐주는 세계를 유영하면서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풍속을 창조했던 것이겠지. 그래서 그는 어른이 되어 자기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 부여된 다양하고 고단한 책무를 흔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혼종적인 글쓰기가 어떤 첨단의 모험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래서다. 그의 왼쪽엔 유물론이 있고 오른쪽엔 현실이 있다.
시인 권혁웅은 1967년 충주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199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황금나무 아래서』,『마징가 계보학』,『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소문들』이 있으며, 평론집 『미래파』, 이론서 『시론』, 산문집 『두근두근』, 『꼬리 치는 당신』, 『생각하는 연필』등이 있으며, 전 세계의 신화를 정신분석의 논리로 읽은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신화에 숨은 열여섯가지 사랑의 코드』, 『몬스터 멜랑콜리아』, 시선집 『당신을 읽는 시간』『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등을 펴냈다.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이다. 2012년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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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언 | 이흥렬(사진)
김도언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여섯 권의 소설책과 세 권의 산문집, 한 권의 평전을 펴냈다. 지금은 문학적 관점을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 시각적 이미지 작업과 연계해 세계와 타자를 읽어내는 실험을 하고 있다. 좋은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통찰과 아울러 삶의 총체성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https://www.facebook.com/doeon.kim.58
이흥렬(사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밀라노 IED 사진학과 졸업.
인물사진과 나무사진을 주로 찍고 있으며 최근의 작업은 '푸른 나무(Blue Tree) 시리즈이다.
https://www.facebook.com/yoll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