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를 만났다!’라고 자각할 때, 독서가 즐거워요. 경험하지 못한, 경험하기 어려운 세계를 책을 통해 대리 체험했을 때 느끼는 짜릿함이 독서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물론 그것이 실제 세계든 내면의 여정이든 상관없이요. ‘아, 내가 이 책이 아니었으면 무슨 수로 이 세계의 존재를 알 수 있었을까?’ 하는 자문을 하며 책장을 넘길 때 제일 행복합니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사드 후작의 『미덕의 불운』 (이형식 옮김/열린책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컬트 영화제에서 우연하게 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소돔 120』이 퍼뜩 떠올라 얼른 찾아 읽었지요. 대학 시절에는 나름 사드와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해서 일독했다고 생각했는데, 『미덕의 불운』 이란 제목 자체가 생경해서 호기심이 일었거든요. 역시나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 참 후에 번역 출간된 책이라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책이었습니다. 자그마한 책을 단숨에 읽어 내리며 지금껏 제 자신을 단순 지배했던 선악에 대한 정의와 편견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민의 시간을 갖는 기회가 되더군요. 그래서 사드의 다른 저서들도 읽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첫 번째 선택은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철학에는 문외한인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읽어보려 마음먹고 있습니다.
최근 『굿바이 조선』을 펴냈습니다. 책과 관련하고 하고 싶은 얘기는 책 말미에 실은 「작가의 말」에 다 나와 있으니 여기서 얘기한들 중언부언이 될 뿐이겠지요. 다만, 21세기로 들어선 한국의 오늘이 백여 년 전 역사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저로 하여금 끊임없이 역사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이 되어 주는 듯합니다. 물론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집단도 개인도 없지요. 하지만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한 세기, 우리 한국인들은 불과 백여 년 전의 자화상을 너무도 낯선 이물처럼 취급합니다. 마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인 양 시치미를 떼는 것이지요. 과연 그것이 말쑥한 겉차림으로 분장했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오늘날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열등의식을 상쇄해 줄 수 있을까요? 식상하지만 제게는 무시 못 할 진리로 다가오는 한마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한마디를 되새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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