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창훈은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를 펴내며, 서문에 “왜 쓰는가, 이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니다”라고 썼다. 이어 “옳기는 하겠지만 좋지는 않다. 짧은 질문은 긴 대답을 요구한다”고 했다. 어렸을 때 글 잘 쓴다는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했다는 한창훈은 “소설을 쓰고 싶다기보다는 소설가란 직업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고 실토한다. 작가는 왜 수많은 직업 중, 고독하기 짝이 없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택했을까. 작가의 글 쓰는 이유가 궁금해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기 시작했다면, 서문만 읽어도 궁금증은 해소가 된다.
작가의 말마따나 짧은 질문은 긴 대답을 요구한다. “나는 왜 쓰는가”로 시작한 자문자답이 11페이지의 이야기로 확장된 것도 다르지 않다. 한창훈은 브레히트의 시 「책 읽는 어느 노동자의 질문」으로 대답을 끝맺는다. 시는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지었을까? / 책 속에는 왕들의 이름만 나와 있네”로 시작한다. 작가가 변방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이야기되지 않는 존재들을 늘 떠올리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예전에 <아침마당>에서 출연자가 어렸을 때 헤어진 가족 찾는 것을 수요일마다 했다. 진행 맡고 있던 이금희씨를 어쩌다 만난 자리에서 그 프로그램 관련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말하기를 ‘재수없게 아침부터 눈물바람이다’라며 불만을 표시한 시청자가 제법 있었단다. 나는 그 따위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보고 싶었다. 얼마나 인생이 평안하고 즐거우면 타인의 아픔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왜 아침에는 울어서는 안 되는가 말이다. 내가 쓰는 이유는 그들이 애써 알고 싶어하지 않는 당대 이야기로 그런 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13~14쪽)
글쓰기는 삶을 궁리하는 방법
오늘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북 콘서트가 열린다. 서울에는 자주 오는 편인가.
한 달 반 만에 왔나? 평균적으로도 그렇다.
현재 거문도에서 살고 있는데 서울에 오면 어떤가.
이제 어디를 간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건 없다. 느낌이 새롭진 않은데, 답을 하자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게 소음이다. 워낙 조용한 데 있다가 오니까. 소음이 나를 엄청나게 괴롭히는 건 아닌데, ‘아 사람들이 참 많은 소리를 내면서 살고 있구나’ 라는 걸 의외로 자주 느낀다. 사람이 사는 데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건데, 물리적인 특징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 외에는 다 똑같다.
『한창훈의 향연』 개정판을 펴내면서 새롭게 제목을 지었다.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다. 저자가 “왜 쓰는가?”에 답한다는 게, 민망할 수도 있지 않나.
사실 이 제목이 내 의지와는 상관 없었다. 출판사에서 제안한 제목인데, 괜찮겠다 싶어서 수긍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어색하고 민망했다. ‘나는 왜 쓰는가’를 제목으로 하면, 뭔가 구체적으로 작가로서의 대단한 이야기를 일부러 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줄 것 같아서. 서문에 쓴 것처럼, 질문이 거창하면 답이 초라해진다. 뻔한 답이 나오고 볼품 없어진다. 왜 쓰는가? 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쓰는가? 쓰게 되는 과정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자극해서 쓰게 하는가? 이런 디테일한 질문으로 가면 괜찮은 답이 나올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제목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출판사 의견에 따랐다.
글쓰기는 ‘삶을 궁리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가장 완벽한 미래 사회에는 예술가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회가 불행할수록 예술은 흥하기 마련이다. 거창한 비유라고 생각해서 쓰는 것도 아니다. 책을 내고 초기 때, 선배 작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 안에 뭔가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인 명제로 축소된 건데, 나한테는 이게 굳이 답이 아니다. 내가 글을 쓰는 건, 세상의 불행 때문도 아니고 내 안의 뭔가가 궁금해서 쓰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 안 풀린 건 사실이다. 인생이 정말 잘 풀리고 고민 없이 살아도 됐더라면 굳이 이 쪽 세계로 올 이유가 없었을 거다. 왜 이렇게 지난하고 힘든 일을 하겠나. 인생이 안 풀린다는 표현이 진부하긴 하지만, “세상이 이 따위인데 왜 계속 살아야 하지?” 이 질문을 자신한테 계속해서 던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게 나의 현재이기 때문이 다. 이를 테면 내가 작업선도 탔고 현장 일을 많이 했다. 일을 나가면 되게 고단하다. 자연스럽게 ‘언제까지 내가 이런 일을 하면서 살게 될까’를 생각하게 된다. 이게 삶에 대한 궁리다. 물론 답을 못 찾는다는 짐작은 한다. 글쓰기가 마치 그 행위 같은 거다.
소설을 택할 수도, 시를 택할 수도 있었을 거다.
시인은 주로 안테나가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다. 자신을 탐색하고 들여다보고 자신을 통해서 세상을 읽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은 안테나가 타인을 향해 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세상을 읽어보려고 한다. 타고난 기질 차이인 것 같기도 한데,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보는 걸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다. 궁금한 게, 나보다는 타인의 삶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지? 그래서 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물어보고 지켜보고 듣고, 그걸 기록한 게 내 글쓰기다.
책에 소개한 일과가 무척 단순하다. “새벽 기상.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가늠하기. 담배 피우면서 그냥 있기. 원고 쓰기. 낚거나 뜯어온 것으로 국 끓여 밥 먹기. 책 읽기. 산책이나 생계형 낚시하기. 그리고 사람들 이야기 듣고 있기.” (109쪽) 한창훈 소설의 가장 큰 원동력은 마지막 일과 ‘사람들 이야기 듣고 있기’가 아닌가 싶다.
내가 살고 있는 섬, 거문도 주민이 1천 3백 명쯤 되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한 명만 들여다보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1980년대에 나온 초기 팝페라 가수 루이스 터커는 영국의 왕실 오페라단에 있다가 나와서 대중음악을 했다. 내가 한창 여수에서 DJ 생활을 했을 때 「미드나잇 블루」라는 노래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때 루이스 터커의 인터뷰 기사를 봤다. 누가 ‘미래에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가’를 질문했는데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정도 가수 생활을 한 다음에 고향 시골마을에 가서 동네 카페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고 싶다. 마을 사람들 지나가는 거 구경하고 이야기하는 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이 기사를 읽었을 때가 내가 고작 20대 초반이었을 땐데, ‘나도 저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그러고 있는 셈이긴 하다. 맨날 동네 슈퍼 앞에 앉아서 사람들하고 이야기하고, 마을 돌아가는 모습 또는 꼬라지도 보고, 그러고 있으니까.
만나는 사람들이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할 텐데.
소재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는 건 아니고, 어느 순간 소재가 온다. 굳이 소재를 찾아 헤매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다. 인터넷 검색 같은 것도 잘 안 한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어떤 소재가 오면 그걸 그냥 쓴다. 나에게 온 것을 쓰는 거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한창훈의 작품 색이 달랐을 것 같기도 하다. 서울이란 대도시에서 쭉 살았더라도 글을 계속 썼을까.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작가가 된다는 전제를 깐다면 나는 똑같았을 것 같다. 책에도 썼지만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가 섬에서 얻은 언어와 변방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과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특히 외가 쪽 사람들의 삶을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막연히 나이가 들면 고향에 돌아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차피 10살 때까지는 여수에서 살고 광주, 대전 등에서도 살았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었을 것 같다. 똑같이 글을 썼을 거다.
작가 되려면 비문학적인 것을 함께 해라
독한 시간대를 보내는 최고의 방법은 ‘독서’와 ‘걷기’라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니체는 “걷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의심하라”고 했다. 굳이 그 말 때문은 아니지만, 걷기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서를 물론 하긴 하지만, 다른 작가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다독은 잘 안 한다. 새로운 책들을 일부러 찾아서 읽는 것보다 신뢰하는 책을 한 번 더 읽는 스타일이다. 책을 읽고 책과 관련된 것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것보다 내가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걸으면서 더 생각해보는 걸 좀 더 신뢰한다. 걸을 때 생각이 제일 많이 떠오른다. 섬이 좁으니까 계속 같은 길을 걷고 있다.
20년 넘게 전업작가 생활을 하고 있는데, 원고를 쓰다가 날밤을 샌 적이 없다. 마감 펑크는 딱 한 번 있었다고 책에 썼더라.
그것도 날짜 계산을 잘못한 거다. 달을 착각했다. 나는 약속 지키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이라서, 마감이 있으면 언제든 준비를 하고 있다. 원고를 일찌감치 쓰고 최대한 볼 수 있을 때까지 본다. 하여간 볼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읽어보고 정확히 마감날에 맞춰서 원고를 준다.
무작정 글 쓰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나.
질문 정도에 따라서 답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일단, 막연히 쓰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안 써도 되면 쓰지 않고 살아라”라고 한다. 대개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글쓰기의 좌표나 지점이 어느 정도인지. 그냥 글쓰기의 생활화처럼 당신의 삶을 기록해가고 그것을 정리하는 정도의 글쓰기라고 생각하는지, 작가를 목표로 하는지. 그것에 따라 답이 많이 달라진다.
작가를 목표로 하는 사람의 경우는 어떤가.
일단 프로페셔널이 중요하다. 거기에 맞춰서 혹독하게 연습을 해야 한다. 독서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책에도 썼지만 비문학적인 것을 같이 할 필요가 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소설만 읽고 문학 관련 책만 읽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반대의 것을 해야 한다. 나는 천체물리학을 추천한다. 씨름선수 이만기 씨가 계속 씨름판을 평정했을 때 어느 인터뷰에서 “저녁 시간에는 주로 뭐하시나요?”라는 질문에 “탁구를 친다”고 했다. 100kg 이상을 들어올리는 씨름선수가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공, 2.7g에 불과한 탁구공을 친다는 거다. 이 기사를 보고 ‘이 사람 정말 똑똑하구나’ 감탄했다. 요즘 컴퓨터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컴퓨터 앞에 8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면 남은 시간에는 뒷산을 천천히 걷는 게 좋다. 반대되는 일을 해야 너무 외골수에 빠지지 않고 중화할 수 있다.
작가지망생들에게 또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필사를 많이 하라는 거다. 가장 닮고 싶은 작가의 작품들을 필사하고, “왜 이 작가는 이렇게 썼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왜 이 작가가 이 정도에서 문장을 끝내고 그 다음에 이런 길이의 문장을 넣었는지. 이게 눈에 확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렵다. 그 전까지는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보는 눈도 있어야 하지 않나.
전반적으로 작가들은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에는 눈이 안 가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눈길이 간다. 그런 디테일을 보는 눈은 물론 있어야 한다. 작가들은 보통 “넌 어떻게 그런 걸 기억하고 있니?” 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어릴 때는 엉뚱하다는 말도 많이 듣고. 예술가적 기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러더라.
중요한 것은 진심보다 태도
소설 쓸 때의 원칙을 기대했는데, 책에 언급한 것은 ‘이야기할 때’의 원칙이다. “새로운 의미나 정보, 웃음. 그 외는 다물고 있자.” (297쪽)고 했는데, 이거 쉽지 않은 일 아닌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의 원칙이라고 여길 정도다. 많이 질린 거다. 내가 술꾼이다 보니 사람들하고 많이 어울리고 술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장면을 엄청 많이 경험했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가. 사람을 가장 많이 괴롭히는 일이 나도 알고 있는 말로 나를 가르치려 하는 거다. 그거 너무 괴롭다. 그래서 원칙을 세웠다. 새로운 정보나 의미가 있을 때만 말을 하는데, 그게 자주 있지는 않지 않은가. 또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면 입을 다물자. 백 퍼센트 다 지키진 못하지만 그걸 원칙으로 한다.
동네에서 한창훈 작가를 많이 찾겠다.
겨울이 되면 많이들 찾는다. (웃음) 자기들이 떠들고 싶은데, 자기들끼리는 안 들으니까. 나는 잘 들어주는 편이니까 많이 찾는다.
또 인상적이었던 것 하나가 “중요한 것은 진심보다 태도”라는 말이다. 특별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이 있나.
살면서 계속 해왔던 것 같다. 우리는 진심, 진실이라는 것에 굉장히 많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데. 약간 예외의 예가 될 수 있겠지만, “너를 정말 사랑해”라고 말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긴 하는데,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거나 연습이 돼있지 않았을 때 벌어진다. 질투가 생기면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해놓고 다음 날 비는 사람들도 있다. “진짜 내 진심은 이 거야”라면서 무릎 꿇고 비는 게, 정상적이라고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진심이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 관계에서 더 필요한 건 태도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다. 나도 오랫동안 친밀했던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다 보면, 생각나는 게 그 사람의 진심보다 나를 대했던 태도다. 그 태도가 기억에 남는 거다. 태도는 진심을 읽어내는 가장 중요한 거울이다. 좋은 태도가 나오면, 반응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쓴 말이다.
스마트폰은 쓰지 않는 걸로 들었는데, TV는 보나?
본다. 뉴스도 보고 다큐멘터리도 보고 프로야구도 좋아한다. 다만 이해가 안 가는 건, 남들이 뛰어 노는 걸 왜 TV로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젊은 애들이 자기네들이 나가서 뛰어 놀아야 하는데, 다른 애들이 뛰어 노는 걸 보고 있다. 지금 사회의 가장 어색한 부분 중 하나다.
아름답게 늙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했다. 지금의 고민인가?
결국 내 인생에서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나, 그것을 많이 고민했다. 20대 후반 때부터였을 거다. 우리나라가 지금 처음으로 노령화 사회가 됐는데, 인류사회에서 한 번도 경험을 못 해본 거라 모두들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해 하고 있다. 그래서 건강 염려증 환자들만 많이 생겼는데. 사실 솔직히 말하면 아름다운 노인을 못 만나봤다. ‘저 사람처럼 나이 들고 싶다’ 싶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지금은 더 세상을 살아오면서 모델들이 생기긴 했지만, 그 시절만해도 못 찾았다고 할까. 이를테면 미래의 목표를 한 줄로 표현한다면 ‘아름답게 늙어야겠구나. 최소한 그렇게 노력해야겠구나’다. 그래서 자꾸 늙음을 기웃거린다고 할까. 난 어릴 때도 얼른 청년이 되고 싶었다.
청춘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청년 때는 얼른 장년이 되고 싶었다. 마흔이 되기를 기다렸다. 마흔이 된 첫 날, 기분이 좋아서 ‘나는 오늘부로 장년이 됐다’라면서 소주를 마셨다. (웃음) 어떤 사주쟁이가 나를 보고 “마흔까지는 죽도록 고생한다”고 해서 그런지, 고생을 죽싸게 했다. 그런데 그 사주쟁이가 나중에는 나이를 오십으로 옮기더라. (웃음) 젊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한다. 부럽다는 생각도 없고. 더 나이 드는 게 좋고, 단지 ‘아름답게 늙을 수 있을까’를 여전히 숙제로 붙들고 있다. 요즘 젊은 아이들이 사건 사고로 죽어가는 걸 보거나 교육 시스템 때문에 항상 기가 죽어서 다니는 걸 보면 마음이 걸린다. 씩씩함이 없어진 것 같다.
“세상을 앞당겨 살아버리는 게 소설가의 팔자”라고 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게 뭘까, 하고 싶어 하는 게 뭘까를 생각해보면. 나이를 더 먹어서 세상을 더 깊이 있게 보고 싶은 거다. 자꾸 더 미래로 가고 싶은 거다. 더 미래가 되면 세상을 더 깊이 있게 읽을 수 있겠지?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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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한창훈 저 | 교유서가
이 책은 소설가 한창훈의 글쓰기가 어디에서 출항하여 어디에 닻을 내리는지 그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산문집이다. 한창훈의 작품을 두고 바다와 섬, 항구 사람들의 질펀한 삶의 애환을 빼면 설명하기 어렵듯이, 이번 산문집 역시 한창훈 문학의 시원인 거문도와 여수, 부산 등지에서 작가가 고락을 함께했던 사람들과 친척들, 그리고 선후배 문인들과의 진하고 짠한 추억을 생생하게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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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umji01@naver.com
달팽이
2015.06.03
일반 독자뿐 아니라 문창과 학생들도 좀 많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강 잘 챙기셔서 좋은 글 계속 써주세요~^.^
서유당
2015.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