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須用君法, 吾自達吾生.
허균, 《성소부부고》 2권 중 〈문파관작〉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거창 고등학교의 직업 십계명 가운데 하나이다. 세상의 가치와 반대로 살라는 역설을 담고 있다. 보통은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에 맞춰 유행을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간혹 세상의 틀에 갇히길 거부하고 반대로 살기를 자처하는 이도 있다. 교산 허균(1569~1618)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허균은 허난설헌의 동생이자 『홍길동전』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최고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에 이미 시와 글을 짓고 열두 살에 『자치통감』과 『논어』를 깨우친 문재였다.
스물여섯에 문과에 급제했으니, 규범대로 살기만 해도 앞길은 창창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소외된 사람들과 어울렸다. 허균이 교유한 사람들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서얼이나 승려, 화가들이었다. 심지어 기생들과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그런 행동은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균은 <통곡헌기>라는 글에서, “나는 세상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로 하는 사람이다余背時嗜而違俗好者.”라고 밝혔다. 세상 사람들이 즐거움을 누리므로 자신은 근심을 즐거워하며, 세상은 부귀영화를 얻으면 기뻐하지만 자신은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 내팽개친다고 했다. 가난하고 궁색한 삶을 본받겠다고 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과 반대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지식 계층의 위선과 허위에 저항하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네 번이나 파면을 당해야 했다. 서른아홉 나이에 삼척부사로 부임하였지만 부임한 지 13일 만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 말았다. 이단인 불교를 숭상한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실제로 허균은 불교 경전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빠져들지는 않았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 파직 소식을 들은 허균은 소회를 시에 담았다.
예교가 어찌 자유를 구속하겠는가禮敎寧拘放
인생의 부침을 다만 정에 맡기노라浮沈只任情
그대는 그대의 법을 따르라君須用君法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吾自達吾生
사회의 법이 이단으로 내몰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자신의 방식대로 살겠다고 천명했다. 사대부들이 아무리 자신을 비난하고 옭아매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겠다고 밝혔다. 그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자신을 밀어 넣지 않았다. 그 울타리를 넘어 자유롭게 스스로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자유분방하게 주유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뜻을 품었으며 『홍길동전』을 지어 이상 사회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역모 혐의에 걸려들어 죽음을 당했다. 조선 사회에서 그는 ‘천지 사이의 한 괴물’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헐뜯은들 본래의 자기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천 원짜리 종이를 아무리 구겨도 천 원의 가치는 그대로 있다. 남이 무어라 해도 개의치 말고 뚜벅뚜벅 나아가면 된다. 나의 삶은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한다. 나는 나만의 삶의 방식이 있고 너는 너의 삶의 방식이 있는 것이니,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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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밀
한양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연암 박지원의 문예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옛사람들의 문학에 나타난 심미적이고 실천적인 문제 의식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음미하고, 인문적 관점으로 재사유하는 데 천착해 왔다.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새기고 싶은 명문장》,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연암 산문집》, 《살아 있는 한자교과서》(공저) 등의 책을 썼다. 현재 한양대학교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