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야 사람이다』는 제목이 나타내듯 이 책은 이명수 저자가 지금 이 공간에서 어떻게 해야 사람일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심오한 문제이지만 그는 간단하게 답한다. 함께 살아야 사람이라고. 우리 사회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일까? 불행히도 용산 참사, 쌍용차 해고 사태, 한진중공업 해고 사태 그리고 작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까지 대한민국 사회는 함께 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사건을 계속해서 겪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이명수 정혜신 부부는 적극적으로 현장에서 고통을 함께하고 나누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의 삶을 오롯이 담아냈다. 정부, 국가, 일상에 존재하는 한국사회의 권위주의를 냉철하게 비판하면서도 사회 전반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함께한다는 점이 그의 글이 가진 매력이다.
최근에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근황부터 여쭙겠습니다.
지난 해 5월 정혜신씨와 함께 안산으로 이주해 ‘치유공간 이웃’에서 주로 지냅니다. ‘이웃’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심리치유를 위한 민간주도의 심리치유센터인데 주중엔 그곳에서 유가족들을 만나고 주말엔 경기도 양평집에 다녀오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만난 지도 오래고 문화적 여가 활동도 안한 지 오래라서 어느 땐 현실감각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걸 스스로 알아차릴 정도입니다. 그럴 땐 정혜신씨와 함께 천변을 걷거나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떱니다. 그럼 좀 나아집니다. 지난 1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올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해요.
『그래야 사람이다』를 책으로 내시면서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다시 읽어보셨을 텐데요. 주된 느낌은 어땠나요. 결코 ‘홀가분’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홀가분 하냐’는 질문 자체가 무리일 거예요. 홀가분과 정반대의 감정 단어가 ‘참담하다’입니다. ‘참담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정도가 적당한 질문일 듯해요. 글마다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져서 내가 계속 자기복제를 하고 있나 그런 의심마저 들 정도였죠. 오래전에 거론했던 어떤 문제도 현재 진행형처럼 느껴져서 좀 괴롭더군요.
책에서 제기한 여러 문제 제기가 지금도 거의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쌍용차, 세월호까지… 선생님께서 쓰시는 글에는 특정인 1인이 겨냥된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런 많은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1명을 함께 거론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요. 아니면 저희 모두가 그 1인이어야 하는지 고견 부탁드립니다.
고견까지는 아니고요. 저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말하는 글은 암세포만 공격해서 치료하는 최신 레이저 장비처럼 정확해야 파괴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측이라든가 특정그룹 등으로 지칭하면 입 큰 개구리가 자기는 빼고 다른 대상을 지목하는 것처럼 모두 자기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거론하지 않으면 글 쓰는 이의 만족이나 명분용 알리바이를 쌓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죠. 그건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치해서 다루는 일과는 다릅니다. 실용적 글쓰기의 한 방법일 수도 있겠네요.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동시에 공전을 합니다. 어느 하나만 굴러가서는 유지가 불가능한 우주의 원리입니다. 어떤 구조적 문제에 접근할 때도 그 원리는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분명합니다. 청와대를 비롯해서 세월호 선장, 해경 등등.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개인적 생각으론) 사고 당시 마흔 살 이상의 성인이라면 누구나 세월호 참사를 불러온 우리 사회의 구조적 적폐에 대해 죄의식과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그 이름이 성찰이든 어른의 역할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전과 공전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인 것처럼 개인의 성찰과 구조적 문제에 대한 접근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사람일 살만한 사회가 된다는 거죠.
정부, 사회, 일상에 존재하는 한국 사회 내 권위주의를 향한 일침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권위주의 모델이 단기간에는 유효한 것처럼 보이나, 장기적으로는 사람들이 지쳐 떨어지고 지금 한국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피곤해하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무너진다면 그 원인 중 첫째나 둘째가 권위주의라고 생각할 만큼 저는 권위주의의 병폐가 끔찍하다는 쪽입니다. 매번 거론되는 체면(남의 눈)을 중시하는 문화도 권위주의에서 파생됐습니다. 그런 인식은 공적인 영역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일상에서도 행복을 느낄 기회를 차단해 버립니다. 행복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인데 그조차 내게 권위 있는 누군가의 컨펌을 받으려 하니 행복지수가 낮을 수밖에요. 권위주의는 일사불란함과 짝을 이룹니다. 외형을 중시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 가정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가까운 틀을 만들어 놓고 모든 걸 거기에 맞춥니다. 술 먹고 허구헌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라는 인간에게 대들고 욕 하는 자식에게 엄마는, 그래도 아버지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는 식입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권위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을 싸가지 없다고 매도하거나 왕따 시킵니다. 부모, 선배, 갑의 위치에 있는 이는 자기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들이 자기가 권력자가라서가 아니라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거나 재미있어서 그렇다고 믿어 버립니다. ‘위협자의 환상’이라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외형상의 반응만으로 마음까지 그렇다고 재단해 버린 후 채찍과 당근의 리더십 운운하는 사회에서 무슨 소통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생겨나겠어요. 권위주의의 폐해가 먹이사슬처럼 작동하니 온전히 행복한 사람이 있을 수 없고 그러니 삶 자체가 고단할 수밖에요.
주당 6억 원 받은 운동선수와 주당 60만 원 받는 봉급자 중에서 재능을 전방위적으로 인정하면 양쪽이 다 망가진다(121쪽)고 지적하셨는데, 한국사회가 불행히도 점점 더 그런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모호한 질문이겠지만, 대안은 있을까요?
모호한 질문이라니 대답은 단순명료하게 해보죠. 사람에 대해 부위별 인식을 하면 그런 불행의 싹을 좀 줄일 수 있을 거예요. 노래 잘하는 가수가 있으면 그 부분에서만 존중을 하고 박수를 보내면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전인격적으로 우상화합니다. 예를 들어 전인권의 샤우팅 창법이 록의 저항정신을 누구보다 잘 드러낸다고 해서 그 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저항정신이 두드러진 사람은 아닐 거잖아요. 심장 수술 분야에서 신의 손이라고 불릴 만한 솜씨를 가졌다고 해서 그 이가 부부관계의 갈등을 봉합하는 문제에서도 그런 건 아닐 건데 우리는 그렇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돈 많이 번 사람에 이르면 자본주의 사회답게 그런 왜곡된 인식은 절정에 달합니다. 동서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돈 많이 벌고 출세한 동서는 교육, 부부문제, 사회 현안에 이르기까지 발언권이 훨씬 세집니다. 한 집단의 최고의사결정권라고 해서 그 이가 그 집단에서 가장 우수한 판단력을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란 사실만 인지할 수 있어도 지금처럼 시속 200킬로미터의 속도로 망가지지는 않습니다. 돈과 권력과 재능을 전방위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양쪽 다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어요. 그게 제가 지속적으로 인간의 개별성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국 사회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갈릴 거라 하셨고, 선생님도 거기에 동의하셨는데요. 곧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1년이 됩니다. 세월호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어떻게 기억하고 싶다 정한다고 그렇게 되는 기억이 아닙니다. 사계절의 특성을 외우지 않아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은 느낌으로 저절로 알 수 있잖아요. 세월호는 우리에게 집단 무의식에 가까운 기억입니다. 트라우마입니다. 세월호 재판 중에 나온 시뮬레이션 결과에 의하면 10분이면 전원이 탈출할 수 있었던 배에서 그 수십 배에 해당되는 시간 동안 무려 304명이 학살당하듯 수장되는 장면을 슬로비디오처럼 수천만 명이 지켜봤는데 그걸 무슨 수로 잊나요. 1950년의 한국전쟁과 1997년의 IMF 사태가 한국 사회에 유형무형으로 결정적 영향을 주었듯 2014년의 세월호 참사도 그와 같습니다. 국가의 존재 의미는 물론이고 개인적 영역에서도 사생관과 사람답게 산다는 문제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준 사건입니다. 어느 영화감독의 말에 빗대어 설명하면, 세월호 참사를 304명이 죽은 한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304 개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한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엄마였고 아버지였고 자식이었고 형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연과 그리움과 고통이 존재하겠어요. 세월호 참사를 먼저 사람으로 기억해야 안전사회도 만들고 사회도 변화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정혜신 성생님 모두 ‘엄마성’을 강조하시는데요. 저희가 일상에서 ‘엄마성’을 발현하려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아주 간단해요.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면 됩니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 된다는 거죠. 현재 내가 누군가를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 나를 그렇게 보듬어 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지치고 섭섭한 순간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감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라는 거지요. (예를 들어 엄마가 자기 자식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우리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어떻게 엄마 아빠가 내게 이리 소홀할 수가 있지? 그럴 필요가 없어져요. 대개의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그 말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거나 큰 위안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면 남에게도 자기에게도 엄마성이 저절로 발현됩니다.
선생님 하면 귀걸이가 생각나는데요. 귀걸이를 하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신다면.
혈액순환에 좋다고 그래서요. 이건 젊은 친구들이 귀걸이 한 제 모습을 보고 ‘신경통이 있으신가봐요?’라고 물을 때 하는 대답이고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아내의 생일 선물이에요. 40대 후반의 어느 생일에 머리 염색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조언하면서 귀걸이도 해 보라고 귀를 뚫어 줬어요. 거절할 수 없게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선물하면서. 재밌게도 그 후부터 그녀는 귀걸이 등 악세사리를 전혀 하지 않아요. 매일 제 귀걸이를 다시 달아주면서 ‘참 잘 어울려. 근사해요’ 그런 추임새 넣어주거든요. 그러니 계속 귀걸이를 안 할 이유가 없잖아요.
정혜신 선생님은 글쓰기의 스승으로 이명수 선생님을 꼽아주셨는데요. 선생님께 글쓰기 선생님은 누구인지요.
수많은 책들이 스승이었고요. 특별히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 철학과 실용성에 많은 빚을 졌죠. 내용적으론 이 책의 머리글에 밝힌 대롭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글 쓰는 이로 자리매김 될 때 가장 축복 받은 자산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주저없이 그녀다’ 말 그대로예요. 그녀는 다른 일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쓰는 일에서도 무조건적인 응원자이자 속 깊은 도반이니까요. 글 쓰는데 그것만큼 강력한 스승이 또 있나요.
많은 부부가 선생님 부부를 존경하며 본받고 싶어 합니다. 현명한 부부 생활을 하기 위한 팁을 주신다면?
낯간지럽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다정한 배려’요. 구순의 남편이 밤에 화장실 가는 아내를 따라가 그 앞에서 무섭지 않게 노래를 불러주는 다큐 영화가 있었잖아요. 7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내내 계속된 여러 일상 중 하나였겠죠. 근데 그거 쉽지 않죠. 추운 겨울날 한밤중에 화장실 간다고 깨우면 군대에서 오밤중에 불침번 걸려서 일어날 때처럼 얼마나 싫고 짜증나겠어요. 타박하고 거절할 수만 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근데 그 노부부는 그렇게 했잖아요. 그런 게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 영화를 20대 젊은 커플들이 많이 본 것도 사랑에 대한 그런 갈급함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진짜 사랑이죠. <그래야 사람이다> 책에 사인을 하게 될 때 말미에 늘 ‘천천히. 오래. 다정하게’라고 적었습니다.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사랑에 대한 저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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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사람이다 : 사회심리에세이이명수 저 | 유리창
이 책의 열쇳말은 ‘이웃’ ‘함께’ ‘엄마’ ‘사람’이다. 따뜻하다. 저자의 글에 대한 생각은 “그것이 비판이든 인정이든 한 사람만을 겨냥한 미사일 같은 글”이지만, “인간에 대한 한없이 따뜻한 시선”(서명숙 추천사)을 가졌으므로 저자의 성찰은 독자에게 깊고 넓게 스며든다. 게다가 유머와 재치가 번뜩이는 촌철살인의 문장은 아름답고도 절절한 에세이로 읽힌다. 사람과 사회에 대해, 그 일원인 스스로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고, 나와는 생각이 다른 가족, 이웃에게 권하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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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사람이라는 것...그렇게 살아가도록 재촉을 받습니다.